솅겐(국경개방) 지역의 새로운 ‘민족 위기’

2013-04-09     로랑 게슬랭·세바스티앙 고베르

2004년 동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EU)에 통합돼 이들 간 국경이 점차 사라지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국가 정체성의 부활이 진정됐다. 하지만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솅겐 국경’ 반대편에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정체성 문제를 도구화하는 정치 전략에 볼모로 잡혀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향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지만 서로 다른 다섯 나라에서 사셨다." 폭염이 헝가리의 티서강가, 거대한 카르파티아산맥 서부 산록 지대 위에 위치한 차키프 마을을 덮쳤다. 트란스카르파티아가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편입돼 있지만, 1920년 6월 4일의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4일 헝가리와 연합국 사이에 맺은 헝가리의 국경 확정 조약)이 이 지역을 갓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에 양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미국산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이는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인 전 세관원 산도르 이갸르토의 두 뺨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헝가리로 귀국한 할아버지는 이후 1938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헝가리군에 징집돼 동부전선에 나가 싸웠다. 그리고 1944년 헝가리가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될 때 할아버지는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됐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차키프에는 칼뱅파 교회, 천주교, 그리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등이 공존한다. 중앙 광장엔 '위대한 애국 전쟁의' 참전 용사,(1) 즉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소련 장병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지리학자들은 차키프에서 몇km 떨어진 서쪽 라키프 마을을 유럽의 중앙이라 여겨 1887년 마을 근처에 '유럽의 중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비석을 세웠다. 오늘날 트란스카르파티아는 유럽연합(EU)의 동부 국경, 즉 헝가리·슬로바키아·폴란드를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와 구분짓는 '솅겐 국경'(유럽의 EU 소속 국가와 비소속 국가를 구분하는 경계) 사이에 끼여 잊힌 변방이 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유럽은 밥줄이다. 자신의 대륙과 유럽을 가르는 최후의 장벽인 국경 너머에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 있는 것이다.

모든 중앙 유럽이 그렇듯 트란스카르파티아는 오랫동안 헝가리인, 루테니아인(옛 카르파티아우크라이나, 현재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루마니아인, 유대인이 뒤섞인 다문화권에 속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정체성 단순화 작업이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함께 빠르게 진행됐다. 2001년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2) 1921년엔(3)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헝가리인 수가 이 지역 전체 주민의 17%에 달했지만 현재는 대략 12%, 15만 명에 불과하다. 이갸르토가 덧붙여 말한다. "매년 5천~6천 명이 헝가리로 이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미래가 전혀 없고 경제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헝가리·슬로바키아의 교차점에 위치한 소비에트연방의 옛 철길 관문인 국경도시 촙의 많은 고급 주택 소유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농사일을 관두었다. 익명을 요구하는 한 현지 기자가 털어놨다. "신기할 것도 없다. 아름다운 저택을 소유한 이들은 밀거래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담배 밀수와 불법 이민 장사를 한다." 카르파티아의 산들과 800km 넘게 이어지는 험난한 도로 사정 때문에 키예프와 단절된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헝가리인들은 발길을 과감하게 서쪽(헝가리)으로 돌렸다. 이들은 헝가리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키예프 현지보다 1시간 늦은 부다페스트 시간에 맞춰 생활하고 있다.

예전에 소비에트연방과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국경 비무장지대, 이른바 '노맨스랜드' (No Man's Land)를 경찰과 경찰견 그리고 열감지기가 지키고 있다. 해마다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소말리아의 이주노동자들이 이 장벽을 넘으려고 한다. 2년 전부터 이 지역의 행정 중심 도시 우주고로트로 넘어갈 날만 학수고대하는 소말리아인 하루니가 속사정을 밝힌다. "국경을 넘어가는 데 대략 5천 유로가 든다. 2012년 여름에 발견된 슬로바키아 쪽으로 난 2개의 터널 속에서 13만 유로 규모의 전리품, 밀수 담배 1만3천 보루를 발견했다." 사회학자 안탈 오르케니는 이렇게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작은 밀거래를 해야만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솅겐 국경이 생긴 이후 주민들은 과거보다 EU와 더 단절됐다."

우크라이나 안보에 대한 위협

노맨스랜드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작은 마을 베레호베(4)는 오래전에 이미 공동화된 것처럼 보인다. 한 무리의 유기견들이 마을 중앙의 작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세월이 낡은 헝가리 건물들의 파스텔 톤을 퇴색시켰다. 월급 상한선을 250유로로 책정한 이탈리아 방직공장을 제외하면 이곳 또한 일자리가 귀하다. 라코치 페렌츠 2세(1676~1735·헝가리 독립운동 지도자) 연구소의 소장 일디코 오로스는 주장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붙잡아두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을 마치는 대로 헝가리로 이주한다. 예전엔 아무도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이 없었지만, 헝가리 소수민족 거주 지역의 어린이들이 우크라이나 학교를 다니며, 우크라이나에 조금씩 동화되고 있다." 이 일대에선 오랫동안 분쟁이 있었다. 슬라브족 공동체가 주로 루테니아어를 사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트집을 잡았다(상자 기사 참조). 오로스가 덧붙인다. "우리는 20세기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 많은 엘리트 지식인들이 학살됐다. 1996년 개관한 이 연구소에서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헝가리 젊은이들은 온전한 교육을 모국어로 받을 수 있게 됐다. 우크라이나 대학은 이런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베레호베와 우주고로트를 연결하는 도로에는 1703∼11년 합스부르크가에 맞서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왕자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옛 거점인 팔라노크 성이 있다. 젊은 대학졸업 실업자 베티 헨켈이 증언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여기에 산 지 채 2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헝가리인들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현재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정상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학교와 정당, 그리고 단체가 있다. 우리는 모두와 어울려 살며 현 정부에 최대한 협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주고로트의 트란스카르파티아대학의 부총장 로만 오피친스키는 베레호베 연구소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비판한다. "베레호베 연구소의 교육과정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헝가리어는 우크라이나에서 취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들의 교육 프로그램도 현실적인 교육을 감안하지 않은 채 문헌학이나 역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역사 교수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 대학엔 헝가리 학과가 있는데, 다른 학생을 제치고 주로 헝가리어권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돌아가고 있다. 헝가리어권 학생들은 자신이 차별당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저들이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1991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과 우크라이나어권과 많은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서부 지역 사이의 언어적 분열이 각종 정치적 조작을 가능케 하고 있다. 베레호베 헝가리 연구소의 부소장 이스트반 체르니치코는 이렇게 주장한다. "러시아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정착한 소비에트연방 시절, 우리는 대대적인 '러시아화 작업'을 겪었다. 그 여파로 2004년 우크라이나의 헝가리인들은 빅토르 유셴코와 율리야 티모셴코가 주도한 '오렌지 혁명'을 지지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새 정권은 동부 지역이 지나치게 많은 자율권을 획득할까 두려워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지방분권을 추진할 의향을 접고, 대신 가능한 모든 지역에 우크라이나어를 쓰도록 강요했다. 우크라이나의 소수민족들은 이같은 정체성 분쟁에 볼모로 잡혀 있다."

2010년 대선에서 티모셴코를 물리치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언어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2012년 8월 그는 지역 주민의 10% 이상이 구사하는 지방 소수언어의 공식 지위를 인정하는 법률에 서명한다. 이 일로 인해 몇 주 뒤 10월 28일에 치를 총선에서 그는 러시어권 유권자들의 표를 결집하고 소수민족의 표도 얻을 수 있었다.

트란스카르파티아의 헝가리 공동체를 대표하는 두 정당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헝가리민주연맹(UMDSZ)(5)의 총재이자 베레호베의 시장인 이스트반 가이도스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지역당 후보로 출마해 우크라이나 의회, 이른바 '베르크호프나 라다'(Verkhovna Rada) 의원에 당선됐다. "이제 헝가리어는 면 단위와 시 단위의 공식 언어다. 우리 마을에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률은 우리에게 간판과 공식 성명서를 두 언어로 표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관공서의 모두 직원이 헝가리어를 구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헝가리어 구사 능력이 직원 채용의 기준이 될 것이다."

10월 28일 총선에서 10%란 전례 없는 득표율로 사상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국회 의석의 38석을 차지한 극우 정당 스보보다당은 이런 결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정당의 지역분과위원장인 올레 쿠친은 베레호베의 '재(再)헝가리화'가 트란스카르파티아 헝가리인들의 분리주의 경향과 부다페스트의 제국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의 헝가리인들을 위해 매년 1억 달러를 쓰고 있다. 헝가리 영사관은 단일 국적밖에 허락하지 않는 우크라이나에서 헝가리 여권을 우크라이나의 헝가리인들에게 무제한 발급하고 있다. 부다페스트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헝가리 공동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2001년부터 헝가리에서 유학과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헝가리인들에게 '헝가리 신분증'이 발급되고 있다. 그리고 키예프와 부다페스트 간 협정은 국경 50km 반경 내 거주민들에게 솅겐 국경비자 없이도 국경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2011년 1월 이후 250만 재외 헝가리인, 특히 루마니아·슬로바키아·세르비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론적으로 이중 국적을 허락지 않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도 헝가리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 베레호베 주재 헝가리 영사관 총영사 이스트반 토트가 조심스럽게 토로한다. "우크라이나 사법부는 신분을 들키지 않는 한 이중국적자를 처벌하지 않는다." 그는 헝가리 국적 취득을 신청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수를 밝히기 거부했지만,(6) 부다페스트의 대대적인 금융 지원은 인정했다. 이 자금으로 트란스카르파티아 헝가리인들의 대학, 문화단체, 정당들이 운영되고 있다.

이웃을 불안케 하는 헝가리민족주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이끄는 피데스당과 연합한 우크라이나의 헝가리 정당(KMKSZ)의 총재 미클로스 코바치는 푸념하듯 말한다. "헝가리 정부가 재외 헝가리인들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헝가리인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헝가리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헝가리인을 결집시키는 게 갈수록 힘들다. 우리가 일부 문화 활동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민속 활동에 그치고 있다. 몇 년 뒤면 우리는 꼭 공동체 문제가 아니어도 정치적 문제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헝가리인의 문제는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해결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반 총리가 헝가리의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수 없자 해외에서 헝가리 민족주의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2010년 총선에서 사회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덕분에 정권을 다시 잡은 오르반은 수년 전부터 '위대한 헝가리'의 향수를 자극하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이런 발언들은 국경 지역 헝가리 공동체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2011년 4월 25일 통과된 새로운 헌법 '헝가리 기본 법률'엔 "헝가리는 헝가리 재외 국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진다"고 명시돼 있으며, 헝가리 기독교의 뿌리와 '밀레니엄'의 역사도 상기시킨다. 심각한 경제위기와 헝가리 왕국의 3분의 2를 동강 낸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7)의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국가의 민족주의 담론이 국민을 결집시키고 있다.

헝가리식 인구 조작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50km 정도 떨어진 헝가리 동부 지역의 최대 산업 중심지 미슈콜츠 제철공장들의 구조물이 부서져 떨어지고 있다. 1980년대 초반, 레닌 제철은 직원 1만8천여 명을 고용했다. 그리고 이 지역 주민 20만 명의 3분의 2의 생계를 중공업이 좌지우지했다. 이런 현상은 시장경제의 도입과 함께 붕괴됐다. 지난 대선 때 피데스당이 장악한 미슈콜츠 시청의 공공기업 담당자 기요르기 미케는 "1990년대 활동 인구의 30%가 실업자였다. 섬유산업과 은행들이 점차 중공업을 대신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빚더미에 앉았고, 이 중 많은 사람들이 파산했다"고 진술했다. 2008년 경제위기가 닥친 이후 미슈콜츠 중심가의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게다가 유럽 보조금으로 요컨대 시청 건물은 리모델링할 수 있어도 경기를 부양시키는 데는 턱도 없다. 미케는 "전 사회당 출신 시장이 시의 채무를 3배나 증가시켜 우리는 추가 대출도 불가능하다. 전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의 질이 추락하자 피데스당에 몰표를 줬다"고 덧붙였다.

1990년대 '공산당'의 옛 거점인 미슈콜츠는 헝가리의 극우 정당 요비크당 거점으로 전락했다. 2010년 4월 지난 대선 때, 요비크당은 16.67% 득표율로 국회의석의 47석을 차지했다. 요비크당의 이 지역 지구당 위원장 아르파드 미클로스가 시내 중심에 있는 자신의 자그마한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위대한 헝가리 시대의 지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부당한 방법으로 트란스카르파티아를 차지했다. 그리고 슬로바키아나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들은 분명 자신들의 모국과 단절되길 원치 않았다. 헝가리는 평화조약의 최대 피해자다. 아직도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헝가리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헝가리의 책무다."

오르반 총리는 재외 헝가리인들에게 여권을 발급해주며 자신의 지지층도 확보하고, 헝가리 인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헝가리 인구는 35만 명이 감소했다. 가임 여성 1인당 출산율이 2.1명에 달해야 세대 교체가 보장되지만 출산율은 대략 1.3명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재외 헝가리인들을 유입시켜 인구 감소 위기를 타개하려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졸탄 칸토르는 이같은 오르반의 이론을 반박한다. 그는 트리아농(헝가리) 여권이 '자연 국적 확인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말 EU 가입 전에 재외 헝가리인들에게 여권을 발급해준 것은 저들의 헝가리 정착을 부추겼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국경이 개방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르반 총리는 요비크당의 주요 캠페인 의제인 인접 국가의 헝가리 공동체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 공론장으로 끌어들였다. 이것이 요비크당의 상승세를 꺾을 수도 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헝가리 정치인들의 민족주의 선거 공약 경쟁이 우려를 낳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분쟁이 빈번하게 터지고 있다. 첫 집권 때 민족슬로바키아국민당(SNS)과 연정정부를 꾸린 로베르트 피코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2010년 페데스당이 "트리아농 조약 이전의… 위대한 헝가리 시대로의 회귀를 원한다"며 이렇게 지적했다.(8) "그래서 슬로바키아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수천 명의 슬로바키아인이 헝가리 국적을 취득한다고 상상해봐라. 헝가리 정치인들은 남부 슬로바키아가 마치 자기 영토의 일부였던 것처럼 행동한다." 2009년 7월, 슬로바키아는 관공서와 모든 공공장소에서 헝가리어 사용을 금지했다. 2010년부터는 이중국적을 취득할 경우 슬로바키아 국적을 빼앗겠다며 이중국적을 금지했다. SNS의 총재 잔 슬로타는 이런 결정을 환영하며 헝가리인들을 "슬로바키아 몸속의 암"이라고 규정했다. 프레쇼프시의 SNS 지구위원장 시릴 레츠코는 이같은 조처가 아주 합당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수민족인 헝가리인들이 분리독립의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헝가리인 50만여 명이 슬로바키아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헝가리 국경 지역인 남부에 거주하고 있다. 벨케 라츠코프체 마을에서 10km 떨어진 코시체까지 까마득하게 개펄이 뻗쳐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자캅 엘레메르가 헝가리 국경선이 있는 남쪽을 멍하니 응시하며 말햇다. "우리는 헝가리인이다. 하지만 국적은 슬로바키아다. 우리는 다중 국적을 요구하고 있다. 부다페스트의 지시를 받고 싶지 않다." 슬로바키아 국회 나로드나 라다의 모스트 히딕스당(9) 국회의원 14명 중 하나인 엘레메르가 항변했다. "우리는 2009년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헝가리연합당(SMK)을 탈당했다. 우리 스스로를 '민족당'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로바키아 사회에 통합을 격려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뿌리와 문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해외 헝가리 정당들은 부다페스트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데, 모스트 히딕스당의 정치적 선택은 독특했지만 결실이 있었다. 2010년 6월 총선에서 모스트 히딕스당은 SMK를 상대로 8.12%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다. 민족주의 강성 노선을 표방한 SMK는 5% 득표율에 그쳤다. 오르케니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크라이나나 루마니아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하게 슬로바키아에서는 국제결혼이 많다. 소수민족인 헝가리인들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슬로바키아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이롭다. 따라서 소수민족의 정체성(국적) 전략이 사회·경제학적 운에 크게 좌우된다."

미슈콜츠에서 몇km 떨어진 헝가리에서 부크젠트케레즈트 마을의 슬로바키아 민족협의회 대표 이스트바나 조로지가 슬로바키아 민속음악 콘서트가 열리고 있는 음악홀을 소개한 뒤 덧붙여 말했다. "18세기 중반 유리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곳에 당도한 조상들은 미슈콜츠 주변에 정착했다. 현재 이 공장들이 문을 닫았지만, 우리는 헝가리에 잘 통합됐다. 이 지역을 떠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을에는 비록 슬로바키아 초등학교가 여전히 있지만 부모의 언어를 쓰는 마을 주민 수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오르케니는 "만약 헝가리의 경제 상황이 악화된다면 슬로바키아인들은 슬로바키아 이주에 관심 갖게 될 것이다. 부크젠트케레즈트의 주민들은 진지하게 자신의 뿌리와 재결합하려 할 게 분명하다"고 예측한다.

2004년 동부 유럽권이 EU에 가입할 때, 사람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민족 정체성의 부흥이 의식화(Spiritualisation), 즉 점진적인 국경의 소멸과 함께 시들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유럽의 통합은 실제로 대부분 관념화된 중부 유럽의 부활을 실현시켜야 했다. 하지만 경제위기와 유럽 정책의 실패는 중부 유럽 국가들의 우발적인 사태를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2008년 코소보의 독립 선언은 유럽 대륙에서 국가 건설 프로세스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국경이 또 변경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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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랑 게슬랭 & 세바스티앙 고베르 Laurent Geslin & Sébastien Gobert 두 사람은 우크라이나에 체류하면서 동구권 국가들의 변화상을 기사로 다루고 있다. 프랑스어로 된 <르가르 쉬르 레스트>(Regard sur l'Est)의 편집위원이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에 붙인 이름.
(2) 우크라이나의 다음 인구조사는 2013년에 실시할 예정이다.
(3) Slovensky naucny slovnik, I. zvazok, Bratislava-cesky Tesin, 1932.
(4) 베레호베시 주민은 대략 25만 명이고, 이 중 절반 정도가 헝가리인이다.
(5) 크라이나의 헝가리민주연맹(UMDSZ)은 헝가리사회당(MSZP)과 합당했다.
(6) 외 헝가리인 30만 명이 헝가리 국적을 신청한 가운데, 부다페스트 당국은 이 중 18만 명에게 헝가리 여권을 발급해줬다.
(7) 카엘 민켄베르그, ‘국경 강박에 시달리는 동부 유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1년 1월호.
(8) 베르트 피코, ‘자신의 흑사병을 수출하는 헝가리’, <피가로>, 파리, 2010년 6월 3일.
(9) 로바키아어 모스트(Most)와 헝가리어 히드(Hid)는 ‘가교’(假橋)를 의미한다.


루테니아의 국가 찾기

2001년 인구조사 때 트란스카르파티아의 루테니아인(Ruthenes·루테니아인은 '러시아인'의 라틴어식 이름이지만, 사실은 중세 말 우연히 리투아니아 영토에 흡수된 우크라이나인들을 지칭함) 수가 1만 명이라고 발표됐다. 하지만 주판 박사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우리가 영토 자치권을 주장할까봐 두려워 데이터를 위조했다. 우리는 80만 명이다"라며 수치를 바로잡았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몰락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당시 트란스카르파티아 주민들에겐 잠재적인 지방자치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대략 78%의 주민이 지방자치에 찬성했지만, 지방자치는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루테니아계 미국 역사학자 폴 로버트 마고치에 따르면, 루테니아인들은 슬라브족으로서 카르파티아산맥 서쪽 경사면,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폴란드, 심지어 세르비아 북부 보이보디네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동부 슬라브 방언을 구사하며, 키릴 자모를 쓰고, 전통적으로 동방귀일(歸一)교회나 정교회 등과 같은 동방기독교 의식을 따르고 있다. 이들의 수는 추정치마다 다르지만 90만~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스보보다당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공동체의 특수 상황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올레 쿠친은 "루테니아인은 우크라이나인이다. 이와 정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러시아로부터 돈을 받고 우크라이나를 약화시키려는 자들이다"라며 분개했다. 그렇다면 루테니아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으로 간주됐다. 일각에서는 루테니아인은 슬로바키아인, 심지어 슬라브족화된 헝가리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네스트 겔너 같은 일부 민족주의 이론가들은 "국가란 신념, 충성심, 인간 연대의 가공물이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인간들이 서로를 인정하면 국가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이후, 동유럽에서 루테니아 국가 이념의 재건 바람이 부는 것도 그래서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 티토주의자들은 루테니아인의 특이한 정체성을 인정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미국과 캐나다에서 디아스포라 생활을 했다.

1990년 초반 슬로바키아가 루테니아 국적을 인정한 덕분에 루테니아 (재건)운동이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1995년 이후, 슬로바키아에서 젬플린 지방의 방언을 토대로 루테니아어를 법제화했다. 프레소프 루테니아 연구소 직원 안나 울리쉬코바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방언은 다른 언어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루테니아어 형태였다. 그러나 지역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 레토로망어(1)를 법제화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을 채택했다. 슬로바키아·우크라이나·폴란드·세르비아에 맞는 각기 다른 표준언어를 마련하고 이와 동시에 루테니아를 통합할 수 있는 다섯 번째 표준언어(루테니아어)를 만들었다." 프레소프 루테니아 연구소는 슬로바키아와 미국의 루테니아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자금을 지원하는 대학이다. 울리쉬코바는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슬로바키아에는 11개의 초·중·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2009년 프레소프 루테니아 연구소가 대학 인가를 받았다."

미래는 이 문화의 재건이 일관되고 조직적인 동질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증언할 것이다.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루테니아 건설은 세월만이 해결할 수 있는 가설이다.

(1) 레토로망어는 스위스의 네 번째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