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불편한 위상

2013-04-09     안세실 로베르

법리 논쟁이나 법과 대학생들의 논문에서만 다뤄졌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이제 안방의 TV 뉴스로 천천히 자리 이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고소득자에게 75% 소득세를 적용하는 법안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과 같은 몇 건의 극적인 결정이 한몫했을 것이다. 현재 야당인 국민운동연합(UMP)이 동성결혼 허용안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어서, 또 한 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릴 것이다. 무엇보다 엄중한 기관의 이미지와는 다른 현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가끔 TV에 출연해 자신이 쓴 소설을 소개하면서 기지 넘치는 농담도 하는데, 시사 문제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으면 '유보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처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도 저도 아닌 논평을 한다.

헌법재판소의 멋진 쿠데타

헌법재판소는 1958년에 설치됐다. 한때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게서 드골 장군의 꼭두각시라고 비난받은 적도 있지만,(1) 이제는 프랑스 경제인연합회(Medef)에 대해서도 비판적 견해를 견지하는 등 '권리와 자유를 수호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정부도 헌법재판소가 정부안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 대부분 그것을 비난하는 논평을 삼간다. 차후 야당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줄 수도 있는 기관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가 국회의원에 비해 9년 단임제라는 거의 종신에 가까운 이점을 지닌 헌법재판관들의 자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때로는 현명하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어 헌법의 권위를 걱정하는 시민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한다. 헌법재판소는 현 소장의 부친인 미셸 드브레가 구상한 것으로 입법부로부터 행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됐다. 하지만 그 시작은 볼품이 없었다. 1962년 하원위원장 가스통 모네르빌이 드골 장군을 직권남용이라고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판결 불가'라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드골 장군은 대통령 직선제를 빨리 통과시키려는 욕심에 자신이 얼마 전 통과시킨 5공화국 헌법이 정한 절차인 국회 승인을 건너뛰어버렸다.

1971년에는 68혁명이 가져다준 자유주의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인지 단체 결성을 관할 지역에 단순 신고가 아닌 법원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한 1971년 7월 1일 법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으로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자크 샤방델마 총리 내각에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지금까지 정권에 밀착된 기구라는 이미지를 단박에 걷어낼 수 있었다. 권위적인 내무장관 레이몽 마르슬랭이 수많은 정치단체들을 해산시키던 그 시절 헌법재판소는 '결사의 자유는 공화국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기본 원칙'이라고 판결하면서 시민들의 권리에 축성을 해준 것이다.

이 멋진 일격은 실제로는 쿠데타였다. 이 결정으로 헌법재판소는 자신의 권한 범위를 상당히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엄밀한 의미의 5공화국 헌법뿐만 아니라 5공화국 헌법 전문과 1946년 4공화국 헌법에도 의거해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946년 헌법에는 '공화국법이 인정하는 기본 원칙'에 대한 규정이 없다. 나중에는 1789년에 제정된 인권선언문과 합당한지 확인하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현자'들이 덜 주관적이었다면 헌법재판소의 이 대담한 움직임을 모두 환영했을 것이다. 합헌성을 판단하는 데 근거가 되는 모든 법률은 실제로 모호하고 정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헌법재판소는 기회 있을 때마다 "헌법 61조 1항은 헌법재판소에 국회와는 다른 성격의 판단을 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종종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논리에 근거해 결정을 내리곤 한다. 결사의 자유가 1971년에는 시민의 기본 권리였는데 외국인이 그 권리를 누리려 할 때는 덜 기본적인 것이 돼버렸다.(2)

정치에 휘둘린 재판관들

1982년에는 국영화법과 관련해서 인권선언문의 17조에 의거해 소유권을 박탈당한 자에 대한 보상 금액이 '응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직접보통선거로 막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판단을 믿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근시안적인 법률 해석에 매달려서인지 이후 1986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실시한 일련의 민영화 조치들을 무효화해버렸다. 헌법재판소의 눈으로만 보고 가는 기나긴 항해의 시작이었다. 이 때문에 법률가이자 이민자 지원단체(Gisti) 소속인 다니엘 로샤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련 기관이 개인의 인터넷 접속을 강제적으로 차단할 수 있도록 한 '아도피 법안'(2009년)을 개인의 권리 보호를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면서 성폭력 처벌 법안에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유럽 문제와 관련해서도 헌법재판소의 예지력에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유로존 안정, 협력 및 지배구조 관련 협약'(TSCG)을 비준하는 데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 더구나 이 협약에 따르면 예산권 행사는 국회의 권한으로 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3) 프랑스 헌법재판소의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중립적인 해석과 화려한 법률 용어 사용)는 독일연방 헌법재판소의 엄격성과 많은 대조를 보인다. 독일연방 헌법재판소는 1978년부터 유럽 차원의 민주주의가 부재한 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협정을 승인할 때 유럽연합(EU)의 정책에 대한 독일연방 의회의 관리·감독을 강화하도록 요구했다.

전문 법관들로 구성된 독일 헌법재판소와는 달리 프랑스 헌번재판소는 '사법과 정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자'들로 구성됐다. 재판관 임명도 매우 정치적이어서 대통령, 상원위원장, 하원위원장이 각각 3명씩 임명하게 돼 있다(3년마다 3명씩 교체). 종종 정치 성향이 비슷한 3명의 재판관이 (얼마 전부터 여성 재판관 3명이 포함됐다) 합의하면 자신들에게 편향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미테랑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롤랑 뒤마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뇌물 수수 스캔들에 연루되기 전까지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동안 선거비용 초과 사용이나 출처가 불확실한 선거자금에 대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에두아르 발라뒤르와 자크 시라크의 대선자금이 유효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들은 모두 '현자'인가

헌법재판소 개혁은 매우 느리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드브레 소장의 권고를 받아들여 전직 대통령에게 배정된 자리를 없애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자신도 퇴임 뒤 헌법재판소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확실히 못박았다. 하지만 2008년부터 시민도 절차를 밟아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하도록 해 헌법재판소의 사회적 성격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헌법재판소는 전지적 검열관이 돼버렸다. 2012년 헌법재판소가 심사한 법률을 살펴보면 '관세행정 정보 공개권', '환경보호를 위한 문화재 등록시설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규정', '알자스-모젤 지방의 장인조합 가입 의무', '광고시설 설치 허가', '황소경주에 관한 형사면책', '탯줄 및 태반의 혈액세포 혹은 탯줄 및 태반 세포 체취' 등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국회의원들도 헌법재판소의 '현자들'만큼 총명할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958년 프랑스 국민이 투표로 통과시킨 기본 계약인 엄중한 5공화국 헌법을 25번이나 개정했다. 국회 다수당의 남용과 헌법재판관들의 남용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것보다는 아예 제헌의회를 구성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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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임명주 myjooim@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왜 책을 읽는가> 등이 있다.

(1) François Mitterrand, <Le Coupd’Etat permanent>(항구적인 쿠데타), Plon, Paris,1964.
(2) 1971년 7월 16일 판결, www.conseil-constitutionnel.fr.
(3) Raoul Marc Jennar, ‘Deux traités pour un coup d’Etat’(하나의 쿠데타를 위한 두 개의 협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4) 헌법 56조는 정확한 기준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 ‘구성원 자격’ 참조. www.conseil-constitutionnel.fr.
(5) Raphaëlle Bacqué, Pascale Robert-Diard, ‘Comment les comptes de campagne d’Edouard Balladur furent validés?’(어떻게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선거자금이 승인됐는가?), <르몽드>, 2010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