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혁명가의 여정

Spécial·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

2013-04-10     이냐시오 라모네

"마침내 영원이 그를 그 자신으로 바꿔놓는…."(1)

지난 3월 15일 정치적으로 비상하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했다. 그는 이제 에밀리아노 사파타, 체 게바라, 살바도르 아옌데 등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가슴에 살아 있는 위대한 신념의 수호자들 사이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운명의 시작은 초라했다.

차베스는 지독히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베네수엘라의 서쪽 끝, 안데스산맥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야노스라고 불리는 대평원의 작은 마을 사바네타가 그의 고향이다. 1954년 그가 태어났을 때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그의 부모는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임시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입이 변변치 않아 큰아들 아단과 둘째아들 우고를 할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우고는 15살 때까지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이주민의 혼혈인 할머니 로사 이네스의 손에서 자랐는데, 영리하고 교육자이며 지혜롭고 자애로운 할머니가 어린 우고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음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로사 이네스는 어린 두 손자와 함께 마을 끝에 있는 흙벽에 야자수잎을 얹은 전통 원주민 가옥에서 살았다. 물론 수도와 전기는 없었다. 직접 키운 과일로 과자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버는 돈이 수입의 전부였다. 우고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밭일을 하고, 나무를 자르고, 옥수수를 키우고, 과일을 따고 가축을 돌보며 선조 때부터 내려온 농사법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집안일과 과자 만드는 것도 거들었다. 예닐곱 살 때부터는 만든 과자를 들고 나가 사바네타의 거리에서, 극장 앞에서, 닭싸움 경기장 앞에서, 시장에서 팔았다.

"마을에는 흙바닥으로 된 길이 4개 있었는데 장마철에는 지옥으로 변한다." 차베스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어린 우고에게 세계를 의미했다. 사회적 계급에 따라 '부자들'은 마을 아래쪽에 돌로 만든 저택에서 살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산 중턱의 초가집에서 살았다. 인종에 따른 구분도 있었다.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 유럽 이민자의 후손은 상업과 목재산업에 종사했고 혼혈인들은 주로 노동을 했다.

베네수엘라의 '소년'(2)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했다. 가죽구두 대신 대마로 짠 짚신을 신고 왔다는 이유로 다시 집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고는 가만있지 않고 복수를 꿈꿨다. 할머니에게 읽기와 쓰기를 배워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 지역 주교가 학교를 방문했을 때 환영사를 할 학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베스의 첫 대중 연설이었다.

할머니는 어린 우고에게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사바네타 거리에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1819년 시몬 볼리바르가 안데스산맥을 넘어가기 전에 잠시 쉬었던 100년 된 나무, 1859년 에세키엘 사모라가 산타이네스 전투를 치르기 위해 말을 타고 지나간, 아직도 당당한 기병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한 거리를 보여주었다. 어린 우고는 남미 '독립의 아버지'인 엘 리베르타도르(El Libertador·해방자) 볼리바르와 '연방전쟁'의 영웅이며 가난한 농민을 위해 급진적인 농지개혁을 실시했던, 그리고 '자유로운 땅,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구호를 외쳤던 사모라를 숭배하며 자랐다. 또한 조상 중 한 분이 사모라와 함께 산타이네스 전투에 참전했다는 것도, 1924년 감옥에서 돌아가신 '마이산타'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외증조할아버지 페드로 페레스 델가도 대령에 대해서도 들었다. 외할아버지 델가도 대령은 로빈 후드처럼 부자에게서 재산을 탈취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 이 지방에서 유명한 게릴라였다.

기계적인 사회결정론이란 없다.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완전히 다른 운명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차베스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강한 계급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절대 내 뿌리를 잊은 적이 없다. 내 뿌리는 민중 속 저 깊은 곳에 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우고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 사바네타를 떠나 주도인 바리나스로 갔다. 때는 1966년. 베트남전쟁이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1958년부터 민주주의가 회복됐지만 게릴라 활동은 여전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무장투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우고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공부·야구·여학생, 오로지 이 세 가지에만 정신이 팔린 사춘기 소년이었다.

우고는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특히 수학·물리·화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성적이 처지는 친구들에게 보충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학교에는 여러 정치조직이 있었다. 극좌파 운동가인 형 아단도 정치조직에 속해 있었다. 모두 우고를 자신의 조직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지만 우고의 머리에는 야구밖에 없었다. 집착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왼손잡이 투수로 실력이 뛰어나서 지역신문에 날 정도였다. 이 역시 차베스의 아우라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차베스 우고의 성격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완성됐다. 자신감이 넘치고 말솜씨와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어디서나 거침이 없었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이른바 '타고난 지도자' 같은 사람이 되었다. 차베스는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한다. 드디어 1971년 사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 청년 차베스는 대평원의 시골 마을을 떠나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만큼이나 미래적이고 공포스러운 수도 카라카스에 입성하게 된다.

차베스는 곧바로 군사교육에 매료됐다. 이제 야구는 먼 나라 얘기가 되었고 그는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받은 군사교육은 이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전에는 중학교만 졸업하고도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교수진도 새로 교체됐다. 군 당국이 '확실하지 않거나', '급진적'이라고 생각되는 장교들을 사관학교의 교수로 대거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휘하에 두기는 꺼리면서도 미래의 장교들을 교육하는 임무는 기꺼이 맡겼던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1958년 독재자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가 축출된 이후 민주행동당(사회민주주의 계열)과 코페이당(기독민주주의 계열)이 푼토피호 협약에 따라 교대로 정권을 잡고 있었다. 부패가 만연했다. 극좌파 조직과 연결된 장교들이 이미 1962년에 푸에르토카벨로와 카루파노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게릴라에 합류하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이 산으로 들어갔다. 약식 처형, 고문, 실종…. 탄압은 무자비했다. 미국의 존재는 노골적이었다. 미 대표부 직원들은 석유개발 지역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 사령부에도 주재했다. 미 중앙정보국(CIA)도 많은 수의 요원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했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도 일조했다.

차베스는 사관학교에서 배운 이론교육을 온몸으로 흡수했는데, 에세키엘 사모라의 전문가인 페레스 아르카이스 장군에게서 볼리바르주의를 배웠다. 볼리바르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모두 암기했다. 전투에서 사용된 모든 전략을 지도에 자세하게 재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볼리바르에 정통한 시몬 로드리게스의 저작도 읽었다. 여기서 로드리게스, 볼리바르, 자모라라는 차베스의 '3개 사상적 뿌리' 이론이 만들어진다. 이 3명이 쓴 정치 저작물에서 독립, 주권, 사회정의, 포용, 평등,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개념을 배웠다. 이 개념은 차후 차베스가 펼치는 정치사회 정책의 뼈대가 된다.

차베스는 머리가 좋았고 특히 과학에 강했다. 기억력도 놀라웠다. 최우수 생도였고 리더였다. 카를 마르크스, 레닌, 안토니오 그람시, 프란츠 파농, 체 게바라에 관한 책을 몰래 읽었고 사관학교 밖의 공산당(PCV), 급진 노동당(La cause R), 좌파혁명운동(MIR), 사회주의운동(MAS) 등 다양한 극좌파 정치 서클에 참여했다. 비밀리에 조직의 지도자들도 만났다. 이때도 모두 차베스를 자신의 조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군대에 좌파 세력을 침투시키는 것은 좌파의 오래된 야심이기도 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났던 군사봉기를 연구하면서 차베스는 정권을 잡으면 만성적인 빈곤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파 군사독재 정권을 막기 위해서는 군대와 좌파 정치조직이 연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차베스가 주창한 '민군동맹'의 중심 개념이다.

차베스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군사정권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연구했는데 특히 과테말라의 야코보 아르벤스, 볼리비아의 후안 호세 토레스, 파나마의 오마르 토리호스, 페루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정권에 관심을 가졌다. 차베스가 1974년 사관생도 자격으로 페루의 수도 리마를 방문해 알바라도 장군을 접견했는데 그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25년 후 정권을 잡은 뒤 1999년 투표로 새로 제정된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헌법'을 알바라도의 유명한 '파란 소책자' 같은 형식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특정 정치적 배경 없이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21살의 신임 장교가 된 차베스의 머리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5년 동안 군에서 조용히 준비했다. 4개의 결정적인 사건이 그를 도왔다. 1989년 신자유주의 충격요법에 반대해서 카라카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민봉기,(3) 1992년의 군사 쿠데타와 실패로 인한 2년간의 옥살이, 1994년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 이때부터 선거에서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차베스는 199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때가 된 사상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기 때문"이라고 빅토르 위고의 말을 인용해 출마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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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냐시오 라모네 Ignacio Ramo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발행인

이 기사는 저자와 차베스 대통령 사이의 대담을 책으로 엮은 <우고 차베스, 나의 첫 번째 인생>에서 발췌한 것이다. 올 하반기에 스페인어로 출간될 예정이다.

번역 / 임명주

(1)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Le Tombeau d’Edgar Poe’(에드거 앨런 포의 무덤)의 첫 구절(1877).
(2) 알퐁소 도데의 자전적 소설, <Le Petit Chose>(소년 이야기·1868) 비유.
(3)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하고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이 실시한 구조조정 계획은 긴축정책, 복지국가 기초 해체, 생필품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1989년 2월 27일 카라카스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거리와 상점 등을 약탈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서 일어난 세계 최초의 봉기로 ‘사회당’ 정부는 군대를 이용해 시위대를 진압해 3천 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카라카소’(Caracazo)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