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유혹에 빠진 유엔

2013-04-10     클로에 모렐

2010년 웹사이트 Business.un.org가 개설되면서 10년 전 코피 아타 아난 사무총장이 계획한 유엔과 민간기업 사이의 협력이 더욱 확대됐다. 기업은 표면적으로 유엔에 대한 자금 지원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기업의 속성상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한편 기업의 일탈보다 더 큰 문제는 유엔 산하 기구들이 겪고 있는 재정난이다.

재정난을 핑계로 유엔이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문제는 기업과의 제휴에서 사업 투명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95년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참가한 자리에서 "국제 규모의 사업에 다국적기업의 긴밀한 참여"를 원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부트로스갈리의 뒤를 이어 사무총장에 오른 코피 아난도 기꺼이 전임자의 선례를 뒤따랐다. 가령 아난은 2000년 7월 존 G. 러기 하버드대학 교수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사업을 발족했다.(1) 이에 따라 유엔은 인권과 관련한 10개 원칙을 준수하는 데 동참하는 기업에 유엔의 '특별한 개발 파트너' 지위를 부여했다.(2) 한편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이 발표한 '비즈니스와 인권: 중간보고'(2000)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비즈니스와 인권이 상호 발전 관계에 있다는 평가가 담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인권과 비즈니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유엔헌장에도, 세계인권선언에도 전혀 기술된 바 없다. 오늘날 UNGC사업에는 30여 개국, 7천여 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UNGC사업을 규제할 만한 법적 틀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제재 수단이 마련되어 있고, 2008년 이후 10개 기본 원칙에 대한 진척 상황을 보고하지 않은 600개 이상 기업이 가차 없이 사업에서 퇴출됐다.(3) 하지만 문제는 기업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할 만한 엄격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참여 기업들은 연례 보고서만 제출하면 그만이다. 사실상 사업국 승인만 있으면 모든 제휴 기업은 'UNGC' 로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기업의 속성상 UNGC사업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표준화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표준화하려는 계획은 1970년대 처음 구상됐다. 미국 기업 ITT가 1973년 칠레 쿠데타에 관여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같은 맥락에서 국제노동기구(ILO)가 1977년 '다국적기업의 원칙과 사회정책에 관한 삼자선언'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 선언은 별 구속력 없는 수단에 그쳤을 뿐이다.

문제는 비단 UNGC사업만이 아니다. 오늘날 점차 많은 유엔 산하 기구들이 기업과의 협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가령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프랑스 굴지의 화장품 회사 로레알과 여성 과학자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한 시상식을 주관한다. 또한 다임러 AG와는 '다양한 문화적 교류'를 장려하기 위한 취지에서 '몬디알로고'상 시상식을 개최한다. 또한 삼성과는 유형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와 전세계 경제·사회 개발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한편 프록터앤갬블은 아프리카 여학생들이 결석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생리대를 무료 지원하는 대가로 유네스코 로고를 자사 상품에 부착할 권한을 얻었다.

현재 유네스코는 2011년 팔레스타인 유네스코 가입에 반발한 미국과 영국의 분담금 납부 거부로 인해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과의 제휴는 유네스코가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령 유네스코와 제휴를 맺은 노키아는 글을 배우러 온 아프리카인들에게 휴대전화를 지급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일하는 엘스 매코미시에 따르면, 유네스코는 부족한 읽기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읽기 연습 자료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전송한다. 물론 학생들도 문자 서비스를 이용해 과제물을 제출해야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이 읽기 능력 향상에 얼마나 효과 있을지 의문이다. 어쨌든 그 덕에 노키아는 구식 모델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냈다.

기업과의 제휴는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98년 세계보건기구(WHO) 수장을 맡은 그로 할렘 브룬틀란트 사무총장은 취임 초부터 민간 제약사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2009~2010년 신종인플루엔자 A(H1N1)가 대유행했을 때 WHO는 제약사와 자금 지원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략적 전문가 자문위원회(SAGE)에 조언을 구했다. 심지어 SAGE 회의에는 제약사가 보낸 대표들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하기까지 했다. WHO의 전염병 경고에 힘입어 제약업체들은 75억~100억 달러에 달하는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4) 한편 WHO는 신종인플루엔자 A 관리 외에도, 에이즈 치료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제약산업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5) 이익 상충의 위험이 전혀 발생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는 셈이다.

오늘날 유엔은 기업과의 협력을 점차 확대해나가고 있다. 거의 모든 사업을 기업에 하청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더욱이 민간부문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 역시 점차 잦아지고 있다. 이러다 혹 유엔이 '민영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강대국의 지원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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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에 모렐 Chloé Maurel 현대사학자. <유네스코 역사: 초기 30년(1945~74년)>(아르마탕 출판사·파리·2010)을 저술했다.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Christian G. Caubet, ‘재계와의 위험한 관계’(Liaisons dangereuses avec le monde des affair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9월호.
(2) Thomas G. Weiss, Ramesh Thakur, ‘Global Governance and the UN: An Unfinished Journey’, 인디애나대학 출판부, 블루밍턴, 2010.
(3) ‘지속 가능한 개발: 유엔에서 퇴출당한 630개 기업’(Développement durable: 630 entreprises éjéctées par l‘ONU), http:// greentechexpert.blogspot.fr, 2008년 7월 2일.
(4) Chloé Maurel, ‘세계보건기구와 위기 및 세계 재앙 관리’(L’OMS et la gestion des crises et catastrophes mondiales), <샹티에 폴리티크>, 파리, 제8호, 2010년 6월.
(5) Auriane Guilbaud, ‘세계보건거버넌스에 대한 기업의 점진적 참여: 에이즈 및 기타 등한시되는 질병 퇴치 사례)’(L‘insertion progressive des entreprises dans la gouvernance mondiale de la santé. Le cas de la lutte contre le VIH/sida et les maladies négligées), 파리정치대학 박사논문, 시앙스포-CERI, 파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