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치에서 살아남는 법
인구 2천만 명의 도시 카라치. 촉수처럼 사방으로 뻗은 도로 위에서 또다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라이크 후세인은 뒷좌석에 친구 무프티 사우드 라흐멘을 태우고 혼잡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매복한 저격수가 쏜 총탄이 후세인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관통하며 두 눈을 날려버렸다. 후세인은 나중에 "마치 날카로운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며 그 순간을 회고했다. 그의 친구는 곧바로 사태를 파악했지만 결국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친구는 내게 코란 구절을 암송해달라고 했다. 그제야 누군가 소음총으로 우리를 쏘았다는 것을 알았다." 급진 수니파 단체(ASWJ)에서 일하던 후세인은 장님이 되었다. 그의 친구는 2012년 한 해 동안 거리 한복판에서 살해되거나 끌려가 고문받다 목숨을 잃은 2400명의 카라치 시민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파키스탄의 경제수도 카라치에서는 언론과 경찰이 '표적살해'라고 부르는 사건이 빈발하면서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치안 불안이 갈수록 심각해지는데 경찰은 속수무책이다. "방금 전에 일어난 표적살해 뉴스를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검은 치마를 입은 탄비어 파티마 부인이 울음을 삼키며 말을 잇는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희생자 중에 내 아들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리러 온 것이다. 몇 달 후면 치를 결혼 날짜까지 받아둔 터였다."
"요즘 살인사건이 급증하는 것은 상당 부분 종교 갈등으로 인한 폭력 증가와 관련 있다." 조라 유수프 파키스탄 인권위원회(HRCP) 위원장의 설명이다. "여기에 정치나 치정에 얽힌 동기들이 가세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당국은 상황을 부정하는 길을 택한 듯하다. 공식 통계 수치가 정확하다면 이 사건들은 수많은 일반 범죄사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드주 공보부 장관 샤르질 메몬은 2012년 11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천 건이 넘는 살인사건 중에서 경찰에 표적살해로 신고되는 건수는 370건에 불과하다."
"도시가 조폭 손에 접수된 것 같다"
살해 이유가 무엇이든, 종교·민족·정치적 소속이 어디든 이곳 주민들은 일단 집 밖으로 나서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염려해야 한다. 한 민간기업의 인사 담당 중역인 45살의 후마 하비브는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아들들이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심장이 멎는 것 같다. 이 도시에서 사람 목숨은 상해서 버리는 음식물의 값어치도 안 된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 첩경은 누군가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달려들 때 반항하는 것이다. 십중팔구 범인은 총을 쏘고 숲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치안 부재 상황을 일종의 저항, 혹은 사회적 혁명의 서막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슬람은행금융조사연구소(RIIBF)를 이끌고 있는 경제학자 샤이드 하산 시디키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악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어떤 혁명도 폭발하지 않고 있다."
혼란이 지속되면서 경제적 삶이 불안해진다. 회사들이 연이어 문을 닫으면서 수십만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지고 있다. 노사 갈등은 일상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손수레에 짐을 산더미처럼 쌓아 파키스탄 최대의 시장, 주디아 바자르로 실어나르는 일을 하는 암자드 알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12개월 중 거의 6개월은 이런저런 정당의 파업 촉구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집회가 열린다." 그는 종일 그렇게 일하고 번 돈 200~300루피(약 2150~3300원)로 일곱 식구를 먹여야 한다. 시디키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40%가 하루 100루피(약 1100원) 이하를 버는 나라에서 그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어른 둘, 아이 둘로 구성된 가족이 단칸방에 살며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하려면 한 달에 최소 1만2천 루피(약 1만3300원)가 필요하다. "이 나라에는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디키의 설명이다. "대부분이 극빈상태로 살아가고 있으며, 극소수만이 엄청난 부를 향유한다." 재야 경제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파키스탄 전체 2%의 인구가 국가 경제 전체를 좌지우지한다.
모든 유형의 동기가 뒤얽힌 '다방향 살인'
그러나 요즘은 부유층마저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 파키스탄은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지 못하면서 만성적 전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전기 공급이 끊기는 통에 산업생산이 순조롭지 못하다. 저임금 일자리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외화벌이 수단이 되는 섬유산업이 가장 큰 피해자다. 섬유업체 경영자들의 모임인 파키스탄 전국섬유협회(APTMA) 회장 아흐산 바시르는 "전력 위기 때문에 수출업체들이 10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봤다"며 안타까워한다. 수출 예상액이 135억 달러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2012년 섬유 수출은 파키스탄 전체 수출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으며, 경제활동인구의 38%를 고용했다.(1) 섬유산업이 추락할 경우 노동자들이 겪을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그들을 보호해줄 노조가 없기 때문에 실업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회적 불안과 잦은 전력 공급 중단 사태가 누적되면서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해외로 빠져나간 생산 시설과 자본을 다시 유치하기 위해 금융지원책을 마련했지만, 업체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APTMA 남파키스탄 지역 책임자 야신 시디크는 "세제 감면과 관세 면제 덕분에 몇몇 기업이 되돌아오긴 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경영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당신의 목숨과 재산, 사업이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때, 당신은 경제적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셈이다. 대안을 찾아 떠나는 수밖에 없다."
방글라데시의 값싼 노동력 이상의 '대안'을 찾지 못하는 마당에 업체들은 조직폭력배에게 돈까지 상납해야 한다. 갈수록 확대되는 조직폭력 문제는 파키스탄의 최대 산업 지대 부근인 리아리의 항구 주변에서 가장 심각하다. 폭력배들이 요구하는 돈 내기를 거부하는 가게 주인이나 기업주는 언제라도 보복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단순한 살해에서 납치와 고문까지, 보복 방식은 다양하다.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언제 마대에 담겨 길가에 버려진 주검이 될지 모른다. 경영인들은 회합을 열고, 항의 집회와 파업 등을 통해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서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많은 상인과 업체들이 폭력배들에게 매달 보호의 대가를 지불한다." 카라치 상인협회 회장 아티크 미르가 설명한다. "정부는 우리를 보호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마치 도시 전체가 강도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 같다. 이미 일부 지역은 그들의 통제하에 있다."
이처럼 범죄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당국은 속수무책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능력도, 수단도, 의지도 없다. 유수프는 "2012년 살인사건들은 전년의 사건과 다른 차원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2011년에는 폭력사태가 주로 특정 지역의 종족 갈등에서 기인했다. 파슈툰족과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모하지르족의 유혈충돌이 있던 카티파하리 지역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폭력사태는 도시 전체와 전 계층을 망라한다. 신드 주정부 치안 자문위원 샤르푸딘 메논은 이를 "정치, 종족, 종교, 치정 등 모든 종류의 동기가 뒤얽힌 '다방향의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그중에는 "혼란을 틈타 개인적 원한을 풀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다."
카라치는 외국인 방문자들에게 자유로운 도시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폭력사태가 계속되는 것은 급진 종교단체들이 준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격 종파들이 카라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 세력을 넓혀왔다. 1971년에는 종족 분리주의가 득세해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벵골인이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다. 그럼에도 종족 분쟁이 여전히 득세하는 것을 보면 파키스탄의 통치자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급진 광신자들의 파키스탄 유입
치열한 독립 투쟁을 벌이다 1947년 인도에서 망명해온 모하지르족(우르두어로 '망명자'라는 뜻)은, 파키스탄에 교육받고 숙련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파키스탄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정부가 도입한 쿼터제 덕분에 그들은 공직과 교직 진출 시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원주민, 특히 아와미민족당(ANP)으로 결집한 신디족과 파슈툰족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72년에는 우르두어를 신드주의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는 신디족과 모하지르족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 1980년대, 모하지르족의 전국적 규합을 목적으로 한 정당 '무타히다 카우미 운동'(MQM)이 창당되면서 다시금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번엔 파슈툰 마약상이 배후 세력이었다. 이 사건으로 카라치의 두 공동체 사이에 팬 골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도 신디족과 모하지르족의 충돌은 계속됐다. 1988년과 1990년에 유혈사태가 발생했으며, 1992년과 1995년엔 MQM에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탄압으로 또다시 희생자가 나왔다. 그럼에도 MQM은 종족적 기반마저 뛰어넘는 세력 확장 덕에 2008년 총선 당시 카라치에서 69.2%를 득표하는 성과를 올렸다.
지난 수년간 카라치의 항구 지역은 금품 갈취, 마약·무기 밀매, 인신 매매 등에 연루된 수십 개의 범죄조직 간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 싸움 속에서조차 종족·정치적 갈등은 폭력 수위를 더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피아 조직이 몰려 있는 리아리에서는 이들 간 영역 다툼이 자주 종족 갈등으로 비화된다. 한편 이곳의 조직범죄는 흔히 정당이나 다양한 수준의 테러리스트 집단의 이해관계와 뒤얽히기 때문에 사회 조직과 경제적 삶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은 그만큼 더 강화된다. 가령, 리아리의 조직폭력배들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만약 상인들이 조직폭력배들에게 보호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순식간에 조디아바자르와 도심 전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2007년 말 또다시 파슈툰 난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상황은 더욱 꼬여갔다. 이 난민들은 스와트와 와지리스탄 부족 지역에서 진행된 탈레반 소탕 작전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다.(2) 그들 중 약 100만 명이 카라치로 들어왔는데, 대부분 동서에 걸쳐 형성된 슬럼에 자리를 잡았다. 정부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자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유화책을 통해 이슬람주의 무장단체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과 종교 중립적 정파들 사이의 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 후자에는 MQM뿐 아니라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ANP도 포함된다. ANP는 다수가 파슈툰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탈레반에 의해 배신자들의 정당으로 낙인찍혔다. 현세주의를 추구하고 파키스탄 정부에 참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으로 ANP는 자신의 본거지에서도 상당 부분 세력이 약화됐다.
탈레반 소탕 작전에 여러 차례 참여한 경찰관 샤우드리 무함마드 아슬람은 탈레반의 활동 방식을 보여주는 일례를 소개해주었다. 지난해 말, 어부로 가장한 두 남자가 카라치에 나타나 소년 7명을 모집해갔다. 이들은 "비폭력을 신봉하고 이슬람 교육에만 전념하는 단체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타블리기 자마트에서 아이들을 교육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업은 동부 지역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도시 라호레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아이들을 떠나보냈다.
그들은 모집한 아이들을 와지리스탄 북부에 위치한 행정수도 미란샤로 데려갔다.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인접한 부족 지역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코란을 공부하는 대신 자살테러를 준비하는 훈련 캠프 생활을 강요받았다. 탈레반 고위 지도자 왈리 무함마드 메수드의 지도 아래 운영되는 곳이었다. 미국의 무인기가 그곳을 폭격해 아이들을 포함해 17명이 숨졌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아이들은 강제 훈련 과정을 상세하게 증언했고, 모집책들은 체포됐다. 그들은 법정 진술 중에 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단순한 공격에 그치지 않고, 경찰·군인·법조인들을 몰살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모두 미국의 앞잡이이기 때문이다."
조폭과 다름없는 탈레반
허풍이 아니었다. 2012년 카라치에서 살해당한 경찰과 판사는 150명에 달한다. 대부분 탈레반의 소행으로 추측된다. 에사눌라 에산 파키스탄 탈레반 대변인은 "카라치의 배신자와 압제자들을 단호하게 처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래전부터 탈레반의 세력 확장에 대해 경고했지만 정부는 우리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MQM 대변인 와사이 잘릴은 울분을 터뜨린다. "싸움은 확실히 북쪽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파슈툰족과 종족·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MQM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는 혐의를 벗기는 힘들어 보인다.
탈레반은 조직폭력배들을 본받아 상인들에게 돈 상납을 강요하고, 저항하는 이들에겐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반면 시아파 소수파를 공격하는 급진 수니파 단체에는 지원과 노하우를 제공한다. 이들은 카라치 내 일부 파슈툰 지역에서 이발사들에게 턱수염 면도를 금지하고, 여성들에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경찰은 어떤 통계 자료도 제시하지 못했지만, 일부 관측자들에 따르면 카라치 내에서 암약하는 탈레반 수는 4천~5천 명에 이를 것으로 본다. 카라치항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의 물자 수송을 위한 유일한 해상 통로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처럼 많은 텔레반이 암약한다는 사실은 카라치 시민뿐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아슬람은 2011년 발생한 14건의 폭탄테러를 모두 탈레반의 소행으로 본다. 지난 1월에는 만고피르에서 100kg의 폭발물이 사전에 발견되었다. 정치학자 타우시프 아흐메드 칸은 경고한다. "정면 돌파를 할 때가 왔다. 그러지 않으면 카라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참혹한 유혈사태를 겪게 될 것이다. 현세적이고 진보적인 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카라치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카라치는 탈레반이 아니라도 이미 권력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정당 간의 정치적 폭력으로 신음하고 있다. 유수프가 설명한다. "카라치는 정치적 분열 양상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 이권 다툼도 치열한 곳이다. 폭력조직이든, 탈레반이든, 정치인이든, 해체된 근본주의 단체이든 카라치를 폭력과 피로 뒤덮을 수 있는 후보자는 너무나 많다."
카라치대학 사회학부 학장인 범죄학자 파테 무함마드 부르파트는 "범죄사건의 5%만이 법적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수형자 10명 중 9명은 여전히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샤르푸딘 메몬은 경찰 인력의 부족, 갈수록 신뢰도가 떨어지는 정보력에서 비롯된 제도적 불능 상태를 비판한다.
파키스탄 체제가 붕괴할 가능성은 있을까? "파키스탄이라는 국가가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부르파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국가에 충성하든 정당 활동에 참여하든,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제학자 시디키의 전망 역시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파키스탄의 교육 예산은 에티오피아보다 더 적은 수준이다." 보건 예산은 거의 "세계 꼴찌 수준이다." 시디키는 묻는다. "이런 기반 위에서 혁명이나 건전한 방향으로의 온건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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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슈라프 칸 Ashraf Kahn 카라치 주재 언론인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파키스탄 섬유산업부, <Overview>, www.textile.gov.pk, 2013.
(2) Jean-Luc Racine, ‘Au Pakistan, un président sous influence’(사면초가의 내우외환, 파키스탄 새 정부), Muhammad Idrees Ahmad, ‘Le Pakistan fabrique ses propres ennemis’(각자의 입구로 들어간 파키스탄 분쟁, 그러나 출구는 없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1월호(한국어판 12월호), 2009년 12월호(한국어판 2010년 2월호).
크리켓 선수 출신이 정치 귀족에 반기를 들다
지난 3월 15일은 파키스탄 역사에 기록될 날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쿠데타나 정치적 혼란으로 국회가 해산되지 않고 회기를 채웠기 때문이다. 1947년 독립 이후 파키스탄에서는 세 번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정치적 혼돈과 헌법 유린 사태가 그 뒤를 잇는 일이 반복되어왔다. 회기 마지막 날, 여당인 중도좌파 성향의 파키스탄인민당(PPP)(1) 소속 국회 의장 대행 야스민 레흐만이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 우리를 축복하사, 이 땅에 민주주의가 지속되고 다음 회기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주 전, 군부는 5월 11일로 예정된 “총선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여론의 우려를 잠재웠다. 군 공보부 책임자 아슬람 살림 바자와는 지난 2월 21일 주둔지 라왈핀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5년 전부터 정치적 일정을 존중해왔다”고 강조한 뒤, 군부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정한 선거를 정해진 일정대로 치르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메시지는 파키스탄 국민에게 작은 희망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이들은 이번 선거가 무사히 치러져서 비록 작으나마 변화가 찾아오기 바라고 있다. 투자회사 토플린의 애널리스트 노만 칸은 “차기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쌓인 부채와 늘어난 재정 적자, 낮은 투자율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빈곤과 실업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 후, “새 정권은 무엇보다 심각한 전력 부족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3월 초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양국을 잇는 가스관 건설 계획에 합의한 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파키스탄에서 군부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대법원 역시 결의를 표명했다. 대법원장은 “누구도, 설사 꿈에라도, 총선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프티카르 무하마드 초드리 대법원장은 그보다 며칠 전 2월 28일 한 공판에서 캐나다에 거주하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슬람 율법학자 마울라나 타히룰 카드리가 “총선 선거관리위원회를 해산한 후 재구성해야 한다”며 낸 청원을 기각한 바 있다.
카드리는 지난 1월 정권과 부패에 맞서 대대적으로 ‘평화적 항의’를 이끌면서 파키스탄 정계에 핵심 인사로 부상했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약 400km 떨어진 카드리의 정치적 근거지 라호르에서 출발한 수천 명의 시위대는 살을 에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닷새 동안 국회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이처럼 예상하지 못한 시위가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일각에서는 그때까지 단지 온라인 코란 판매회사 사장으로만 알려져 있던 카드리가 사실은 총선을 방해하려는 군부의 음모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러나 정부와 협상이 있은 후 시위대는 평화롭게 자진해산했고, 대법원에서 청원이 기각된 후 카드리는 정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3월 15일부터 정부와 국회 업무가 일시 중지된 상태에서 과도 정부를 이끌 책임자 인선이 미해결로 남아 있다. 여야 합의로 임시 총리를 지명하기로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과정임이 드러났고, 다시금 정국이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키베르파크툰크와주와 발루치스탄주의 상황, 3월 초 카라치에서 50명의 사망자를 낸 폭탄테러와 ‘카라치의 성녀’라 불리던 비정부기구 활동가 파빈 레흐만 암살사건 등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든다. 유권자들은 청렴한 판사 출신의 파쿠르딘 에브라임이 이끄는 파키스탄 선거관리위원회(ECP)가 공정한 선거를 보장해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현재 파키스탄 정계는 어떤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우선 2008년 총선에서 전체 272석 중 124석을 얻은 인민당(PPP)이 있다. 다음으로는 91석을 얻은 나와즈 샤리프의 파키스탄 무슬림연맹(PML-N·경제에 관해서만 자유주의고 다른 분야에서는 보수)이 있다. 한편 신생 민족주의 정당, ‘정의를 위한 운동’(PTI)이 급부상하고 있다. PTI를 창당한 크리켓 선수 출신 임란 칸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부토와 샤리프 집안 인물들로 채워진 기존 여야 정당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이용하고 있다. 칸은 3월 10일 페샤아르에서 개최된 회합에서 “파키스탄의 일부 가문이 만들어놓은 정치적 세습 왕조 체제를 끝장낼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한 총선을 보이콧하고, 선거 당일 ‘항의 연좌시위’에 참가할 것을 촉구하던 카드리가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후 남은 공백을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긴장이 계속되는 와중에, 2007년 베나지르 부토 암살 배후로 지목된 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3월 1일 두바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귀국 의사를 밝혔다.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무샤라프는 “활동을 높게 평가한다”며 지지 의사를 표명한 카드리 혹은 임란 칸에게 동맹을 제안할 수도 있다. 이런 움직임을 파키스탄 정국의 지각변동을 암시하는 전주곡으로 봐야 할까? 파키스탄의 엘리트들은 서둘러 두 선동가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1) Jean-Luc Racine, ‘Au Pakistan, un président sous influence’(사면초가의 내우외환, 파키스탄 새 정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1월호(한국어판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