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새로운 행로

2013-04-10     박동천

   
작가미상.

개혁당 대표,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참여당 대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그리고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를 지낸 유시민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정치적 경력 외에도 그는 <백분토론> 사회자로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줬고, 베스트셀러 저술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나는 그의 선택이 개인적 차원에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축하해주고 싶다. 이런 사례가 흔치 않았다는 점에서도 역시 유시민답다는 생각이 들고, 이제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포부도 무척이나 반갑다. 사실은 축하 이전에 이런 종류의 개인적인 선택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왈가왈부하지 않는 편이 온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그리고 그가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둔다고 결심하게 된 배경에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고 하는 공공적인 의제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기서 내가 하는 말들은 유시민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재는 유시민이지만, 이 소재를 통해 내가 다루려는 주제는 한국 정치의 현재 모습, 그리고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한번 되새겨봐야 할 정치의식이다. 그렇지만 그의 사례를 소재로 다루는 한, 내가 여기서 하는 말을 그의 개인적 선택에 관한 왈가왈부로 오해하는 독자는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점은 그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삶이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다보니 발생하는 불가피한 결과로 양해해주기만을 빈다.

유시민의 실험

정치인으로서 유시민은 실험 정신에 충만한 인물이었다. 앞에 열거한 여러 정당들이 모두 실험 정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이른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아울러 그런 시민들이 유력한 정당으로 조직돼야 한국의 정치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보고 저런 정당들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진성당원제를 도입한 목적도 근본적으로 개혁된 정당의 모델을 찾는 데 있었다. 민주당에 고질적으로 남아 있는 연고주의와 향리주의에서 탈피한 자유주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동시에 진보 진영에 고질적으로 남아 있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불식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통합진보당을 엮어내는 데 기여했다. 국회의원 선서를 하는 자리에 백바지를 입고 나가보는 실험을 했고, 주변에서 '싸가지 없다'는 매도를 당할 정도로 솔직하고 꾸밈없는 독설을 구사했다.

이와 같은 유시민의 실험들은 모두 한국 정치의 개선을 지향하는 노력이었다. 개선은 언제나 변화를 통해서만 일어나고, 이때 변화라는 것은 항상 기성의 관행이나 규범을 겨냥할 수밖에 없다. 기성의 관행이나 규범은 언제나 모종의 금기를 불문율로 담고 있어서, 이런 금기를 깨뜨리는 행위를 뭔가 '부도덕한 것'처럼 배척하고 억압한다. 유시민은 한국 정치판에서 아무런 합리적인 검토도 거치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횡행하는 이런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장 사소해 보이는 대목으로, 복장과 언어에 관한 그의 실험을 살펴보자. 국회의원의 복장 혁명을 시도한 효시는 영국 독립노동당의 키어 하디다. 그는 1892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전통적인 복장을 거부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등원했다. 당시 다른 의원들은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지만, 오늘날 영국에서 격식에서 자유로운 복장은 약간의 화젯거리는 될지언정 억압의 대상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미래를 전망해보면, 국회의원의 복장은 점점 더 자유롭고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 틀림없다. 즉, 유시민이 실험했던 정도의 복장이 한국 국회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날이 머지않아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문제되지 않을 일을 지금이라서 문제 삼는다는 것은 단순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독설'이라는 평판을 받았던 그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나름의 입장을 눈치 보지 않고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취했던 입장 하나하나를 토론한다고 하면, 나는 거의 모든 대목에서 이견을 가진다. 그렇지만 성인들 사이에서 견해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봐야 한다. 한국 정치인들 대부분은 각자가 주목하는 특정한 주제 몇 가지를 제외하면, 자신의 주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유시민의 '독설'을 핑계로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쉽사리 논박하지 못해서 치밀어오르는 오기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유시민처럼 다양한 주제에 관해 나름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본격적인 논쟁을 회피하지 않는 정치인이 늘어나야 한다. 실제로 이런 정치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은 장래에 유시민 정도의 말투는 예사로운 일로 간주될 날이 올 것이다. 이처럼 언어에 관한 그의 실험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지향한 시도로서, 미래에 통용될 표준을 남보다 앞서서 받아들여 실천한 셈이 된다.

유시민의 좌절

그의 실험들은 당장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실험 정신을 귀하게 여기면서 그의 행보에 동참한 사람들의 수가 세상 사람들의 평균적 의식에 영향을 줄 정도까지 늘어나지는 않았다. 그의 지지자가 적지는 않았지만, 정치인 사이에서든 일반인 사이에서든 다수는 그의 실험을 두려워하고 위험시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변화를 선도하는 사람들에게 늘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유시민도 처음 정치판에 뛰어들 때 자신의 시도들이 금세 효과를 내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뜻을 사람들이 처음부터 알아주지는 않을 것이고,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응을 받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숱한 비난과 악평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정치인이다.

그런데 그는 왜 2013년 2월에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그만두기로 했을까? 지난 3월에 발간한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는 "정당을 혁신하고 지역 구도를 타파해 우리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목표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잘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숱한 실패를 딛고 새로운 실험에 도전해왔던 사람이 왜 지금은 더 이상 도전할 의욕을 잃었을까?

총선에 이어 대선에서도 새누리당이 승리한 정황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껏해야 표면적인 계기였을 뿐이고, 여러 차례 시도했던 정당 개혁의 꿈이 번번이 좌절된 탓에 낙담이 엄습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2012년 총선 이후 불거진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가 결정타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유시민이 지향한 목표, 즉 이른바 '당권파'의 편협한 전횡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목표는 옳았다고 본다. 그러나 대리투표라는 혐의만 가지고 당내 세력 분포에 관한 고려 없이 당 체질의 변혁을 시도한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대리투표는 절대악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보통·평등·직접·비밀 투표를 헌법에 정해놓고, 마치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어린 시절부터 외우게 만들지만, 이 항목 중 어느 것도 절대로 지켜야 할 선거의 공리는 아니다. 대리투표의 경우, 당사자의 투표권을 다른 사람이 훔쳐서 행사한다면 잘못이지만, 투표 편의를 위해 지정된 대리인이 투표를 대신하는 제도는 지금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대리투표의 정황이 발견됐다는 것만으로 부정선거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당권파'의 볼셰비키적인 행태는 불식돼야 한국 진보정당에 미래가 열린다. 그러나 당권파의 주도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당권파의 행태와 질적으로 다른 수준의 명분이 필요했다. 대리투표 혐의는 그런 명분이 되기에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유시민은 "정치의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학생운동에 가담한 이유도 "부당한 강요에 굴복하면 삶이 너무나 비천해질 것 같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과 품격"을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수치심과 분노, 슬픔, 연민, 죄책감, 의무감" 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시대와 공간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고, 그의 한탄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 대부분의 삶을 기쁨보다는 수치심이 지배한 것은 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불의한 시대의 잘못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친 행적이 기쁘고 즐거운 일을 찾아 행한 행적에 비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젊은이로 하여금 그렇게 발버둥치도록 만든 세상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나는 유시민이 지금부터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젊은 날을 조금이라도 수치스럽게 여기지는 말기를 바란다.

아무튼 그가 정치 자체를 즐거워하지 않았다니 그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오세훈도 정치를 별로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고, 노무현·안철수·문재인도 정치를 좋아서 하는 유형은 아닌 듯하다. 이렇듯 정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이 많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불행이다.

해야 할 일과 즐거운 일

정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권력투쟁이라는 측면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사적인 방식으로 경쟁에 임하려 해도 상대가 치사한 방식으로 공격해온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려면 나도 치사한 방식을 가끔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정치판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나라도 거기에 들어가 상대가 더 치사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의무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시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그의 책을 읽고서 알았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의 결심을 축하한다. 안철수, 문재인, 박근혜, 오세훈, 기타 어느 누구든, 정치활동이라는 것 자체로는 혐오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의무감 때문에 그 바닥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 걱정 말고 의무감 따위는 집어던져버리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특히 그 의무감이라는 게 즐겁지 못하고, 억지로 떠맡은 짐처럼 여겨진다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몹시 의미심장한 사항이다. 정치판에 뛰어들 의무감이란 이웃과 공동체를 향한 의무감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일보다 그 의무감을 무겁게 여겨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면, 정치가 즐겁지까지는 못하더라도 혐오스럽지는 말아야 '의무'라는 단어의 뜻과 일관된다. 정치인이 정치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은 곧 평균적인 이웃들의 행태, 공동체 안에서 흔히 행해지는 상습적인 행태를 싫어한다는 뜻을 가진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런 측면을 확인한 유시민이 정치라는 직업을 버린 것은 대단히 논리적인 선택에 해당한다.

유시민은 여기서도 다시 한번 시대를 앞서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솔직담백하게 되돌아보는 고백만 해도,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유례가 거의 없다. 덧붙여, 정치에 대한 내면의 혐오감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자 미련 없이 물러나 즐거워할 만한 일을 찾아나선 행보 역시 다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을 일이다. 정치를 좋아하지 않는 기질, 자기가 보기에 협잡을 일삼는 인간군상과 뒤엉켜 거래나 경쟁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기질은 정치인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 생각에는 유시민이, 그리고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싫어하는 까닭에는 선이 아니면 곧 악으로 여기는 단순 이분법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리투표를 곧 절대악으로 치부해버린 것도 이런 이분법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 중에는 특별히 선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유별나게 악하지도 않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도덕책에 실릴 만한 선행이 아니면 모두 악행이라고 비난하게 되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보인다. 반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행이 아닌 한, 사정과 맥락을 살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자세를 취하면,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해 보이고 여기저기에 희망을 걸어볼 여지가 눈에 띄게 된다.

이렇게 너그러운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과 즐거운 일도 이분법적으로 나눌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공동체에 봉사하는 정치를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소명을 수행하지 못할 때 가장 괴롭지 않겠는가? 유시민은 이런 소명을 받지 못했으니, 이제 정치라는 직업을 버리는 것이 맞다. 지금 정치판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이런 소명이 없다면 유시민의 뒤를 따라 각자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면 좋겠다. 단, 유시민이든 다른 사람이든, 나중에라도 이런 소명을 받게 된다면 언제든지 정치판으로 돌아와야 한다. 해야 할 일과 즐거운 일을 화해시킬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이웃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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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천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학 정치학 박사(정치철학). 저서로 <플라톤 정치철학의 해체>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등이 있다. <프레시안>에 '박동천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