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못다 쓴 이야기

2013-04-10     이원규

<조봉암 평전> 저자 서문에 나는 '다시는 책을 쓰지 못할 정도로 여기 힘을 쏟았다'라고 썼다. 아홉 권짜리 대하소설을 3년 걸려 쓴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더 힘들었다. 죽산의 생애가 파란만장했고, 모아놓은 자료가 워낙 많고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연민과 위무, 그리고 소명감

마라톤을 완주하듯 죽산의 평전을 써 내려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의 생애에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 그가 실현하려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졌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책임정치', '수탈 없는 경제', '평화통일'. 이 세 가지는 죽산이 억울하게 죽은 지 50년이 넘은 지금도 유효하다.

또 하나는 '연민'과 '위무'였다. 죽산은 강화에서 출생했지만, 나 같은 인천 토박이들은 그를 인천인으로 여긴다. 인천인들은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를 받아들여 정치적 기반을 만들게 했고, 광복 후 제헌의회 의원으로 뽑아 보냈다. 그래서 그의 희생을 억울해하고 신원해주고 싶은 간곡한 정서를 공통으로 갖고 있다.

작가는 소설에 매달려 열광에 사로잡힐 때 '나 아니면 이 책을 쓸 사람이 없다'는 건방진 자기도취에 빠지곤 하는데, 그것은 에너지를 갖게 해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 책이 그러했다.

나는 약산 김원봉과 김산(장지락)의 평전을 쓴 터라 한국 독립운동사와 공산당사, 러시아와 중국 공산당사의 맥락을 파악하고 있었고, 많은 죽산 관련 자료와 20여 차례의 중국·러시아 답사 노트가 있었다. 그가 살던 강화와 인천의 거리,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만주 일대와 몽골 울란우데, 시베리아 횡단철도, 모스크바 등 모든 곳을 이미 밟아본 터였다. 그것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자기도취와 꼭 써야 한다는 소명감을 불러왔다.

남은 것은 연구가들의 성과를 넘어서는 새로운 자료의 수집이었다. 내가 재직하던 동국대 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이용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데이터베이스를 내 자료 창고처럼 드나들었다. 복사된 자료와 인터뷰 기록이 사과 박스로 8개, 컴퓨터 파일은 A4 용지로 2천 쪽쯤 된다. 죽산에 관해 우물 밑바닥까지 다 파고 들어갔다고 느끼는 순간 죽산 주변 인물 인터뷰에 나섰다.

2011년 봄, 죽산이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직후 인천 새얼문화재단은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조찬 강연회를 열었다. 그날 재단의 지용택 이사장이 죽산 선생의 딸인 조호정 여사에게 나를 소개했다,

"인천 출신 작가 이원규 교수입니다. 죽산 선생의 평전을 잘 쓰게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나는 마치 인천의 대표처럼 죽산 선생 평전의 키맨(Keyman)이라 할 수 있는 조 여사를 인왕산 아래 부암동 자택으로 찾아가 인터뷰했다.

그날 20대의 독립 투쟁부터 광복 후 정치 활동, 억울한 최후까지 죽산에 관한 모든 신문·잡지 기사를 만년필로 요약해 적은 노트를 들고 갔다. A4 용지로 300쪽이 넘었다. 그것을 보고 조 여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1시간으로 약속된 인터뷰는 3시간으로 길어졌고,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무엇이든지 사실 그대로', 이 한마디를 집필하는 동안 늘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난처한 상황을 여러 번 만났다. 첫 번째가 죽산을 사랑한 여성들에 관한 기술이었다. 죽산이 워낙 걸출한 사람이었으므로 네 여성이 모든 것을 던지며 사랑했고, 하나같이 비련으로 끝났다. '인간적 약점까지도 숨기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선생을 위무하는 길이다'는 생각을 하며 사실 그대로 책에 썼다. 유족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신념이었다.

무엇이든지 사실 그대로

두 번째는 '일제에 협조했다는 자료가 있어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유보한다'고 한 국가보훈처의 결정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1940년 1월 초 <매일신보>에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기업인들의 신년 기원 광고에 성관사(誠寬社)의 기업 대표로 죽산의 이름이 실린 것, 다음해인 1941년 12월 같은 신문에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나는 죽산의 결백을 믿지만 그 증거를 찾아야 했다. 신의주형무소 수감 시절 전향한 사상범들의 이름과 통계, 전향 성명(聲明), 인천 왕겨조합장 시절 그의 동태를 감시한 경찰의 기밀보고서, 인천 도원동 집이 일제의 특혜로 받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폐쇄등기 열람, 인천상공회의소 통계연보, 북한·미국·소련 쪽의 자료 등을 샅샅이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일제에 협조한 흔적이 나오면 어쩌나, 긴장되는 작업이었다.

다행히 그런 기록은 없었다. 아무리 죽산을 위무하려는 마음이 강하더라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이 나왔다면 사실 그대로 썼거나, 애타게 부친의 명예 회복을 갈망하는 유족을 생각해 원고와 자료를 불태웠을 것이다.

세 번째는 북한 쪽 기록이었다. 대법원이 죽산의 간첩죄를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선고했으므로 이 문제는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인 금년 1월 17일 새 자료가 나왔다. 몇 개 신문이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알렉산더 푸자노프 평양주재 소련 대사의 개인 기록(Journal)을 공개했는데, 거기 죽산과 관련한 김일성 주석의 언급이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즉시 한길사에 연락해 편집 중지를 요청하고 원문을 구했다. 러시아어 육필 원문은 못 구했지만 직접화법 영어 번역문을 확보했다. 4·19 당시 김일성 주석은 'We too made a mistake'라고 죽산의 죽음과 관련해 푸자노프 대사에게 말했다. '실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고, 그 이상은 없었다. 나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만약 '우리가 보낸 공작금을 죽산이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면, 그게 죽산을 파멸시키기 위한 역공작일지라도 나는 평전 출간을 중단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앞서 초고 탈고 직후 고비가 있었다. 애국지사들의 평전을 한 해 세 권씩 집필하는 분이 있다. 그분이 죽산의 평전을 출간한 것이다. 내 평전을 출간해온 출판사가 죽산 평전 출간을 난처해했다.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 나는 이제 죽산을 잊어도 되지. 이 지긋지긋한 일을 안 해도 되네.'

그러면서 먼저 출간한 죽산 평전을 꼼꼼히 읽었다. 그러고 나서 얻은 결론은 '나도 써야 한다'였다. 예컨대 '죽산의 첫사랑인 김이옥양이 부모가 반대해 죽산과 맺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강화에 떠돌고 있는 많은 죽산 전설 중 하나다. 나는 호적과 족보를 손에 넣어 김이옥의 부모가 누군지, 그의 집이 어딘지 찾아가 옛 주춧돌이라도 만져보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 그녀의 부모는 일찍 죽고 연령 차가 많은 오빠 김인배씨가 그들을 반대했다. 그분의 책은 그렇게 철저하지 못했다.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그 책은 죽산의 생애를 기술한 소중한 성과 중 하나다.) 나는 다시 매달려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명문 출판사 한길사에 알려져 출간을 합의하게 되었다.

못다 쓴 이야기

쓰지 못한 이야기도 많다. 갈홍기 목사는 외무차관과 공보처장을 지내며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의 대변인 노릇을 한 사람으로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죽산과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도 강화 출신인데 유년기에 죽산과 동문수학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죽산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이 자랐으며 아버지(갈형대)가 교장으로 있던 기독교계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친구'라고 했다. 강화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나왔다는 죽산의 회고록이나 졸업대장 기록과 달리 잠두의숙과 보창학교에 다녔다는 말인데, 죽산과 7년의 나이 차가 나므로 동문수학했다고 보기 어려워 신뢰가 가지 않았다. 유찬식·조광원·조구원·정수근 선생 등 강화의 소년 시절 교유한 분들의 자료가 많아 갈 목사는 평전에서 빼버렸다.

인천의 명망가인 고 신태범 박사는 내가 존경한 분이다. 죽산이 공산주의를 버리고 전향하는 동기가 된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를, 미군방첩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에 압수된 것을 친밀하게 지낸 인천 CIC 대장이 보여줘 읽은 분이다. 그가 지인들에게 그 편지 주인이 죽산임을 알았다고 말한 것으로 내 취재에 잡혔다. 그러나 신 박사는 회고록에서 '죽산임을 몰랐다'고 썼다. 죽산이 그 후 인천 CIC에 연행되어 전향 요청을 받을 때 미군을 도와 전향을 권유했을 개연성이 컸으나, 분명하지 않아 역시 빼고 말았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죽산의 가묘가 있다는 이야기도 쓰지 않았다. 내가 답사하지 못한 곳이고, 죽산 사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써서 철저한 반공주의로 산 죽산의 색깔을 애매하게 할 우려가 있어서였다.

호사가들이 좋아할 이야기도 있다. 죽산의 농림부 장관실에서 일한 여비서 김제영 선생은 뒷날 소설가가 되었다. 내가 소설을 쓰는 후배인지라 마음놓고 그 시절 일을 말했다.

"호호, 당시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관들은 다 그랬지만 조 장관님도 젊고 예쁜 여자를 무척 좋아하셨어. 농지개혁법안을 손질하러 우이동 산장 같은 데로 가면서 '제영아, 너도 일하러 같이 가자' 하셨는데, 국장과 비서관들이 다른 할 일이 있다며 만류했지."

'오프더레코드'로 하신 말씀인데다 죽산의 여성 편력이 평전의 중심은 아니었으므로 역시 빼버렸다.

한국전쟁 직후 상황을 적은 내 취재 노트에는 이런 것도 있다. 6월 26일과 27일, 국회부의장 죽산은 가족도 챙기지 못하고 국회 문서를 피란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25일 심야의 임시국회에 나오지 않은 의원들 집으로 '어서 피란하라'는 긴급 전령을 보내라고 국회사무처에 명령했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찾아갔으나 의원 80여 명이 집에 없었다. 일찌감치 국회도 내팽개치고 피란 떠난 게 아니라 자기 집이 아닌 젊은 정인의 집에 가 있었던 것이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된 직후 정치보위부는 도강하지 못한 국회의원 체포에 나섰으나 성과가 없었다. 역시 집에 있지 않고 정인의 집에 꼭꼭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보위부원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고, 많은 의원이 납북을 면했다.

7월 31일, 죽산의 부인 김조이 여사는 도강하지 못해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다. 김 여사는 젊은 시절 다른 20명과 함께 죽산의 장학생으로 뽑혀 모스크바공산대학에 유학했다. 여자 동기생으로 고명자와 김명시가 있었는데, 인공(조선인민공화국) 치하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 둘이 김 여사를 납북시키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의 작은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자세히 쓰지 못했다.

책을 쓰면서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왜 정체되어 있을까' 생각했다.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려면 수레바퀴가 양쪽에서 균형을 잡아 구르듯이 진보와 보수가 함께 굴러야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죽산이 진보당 창당대회에서 말한 한국의 진보주의였다.

그 정신의 바탕은 같다. 분단 모순 속이라 생태적 한계에 갇혀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반대편 바퀴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없어서 국민에게 외면당하고 헛바퀴만 돌리고 있다. 죽산은 그러지 않았다. 상하이 시절 민족주의 진영을 포용해 유일독립당운동을 펼쳤으며, 광복 후에는 끊임없이 좌우 합작을 시도했다. 국회부의장으로서 본회의를 주재할 때 늘 여야가 충돌하지 않게 이끌어갔다. 그는 이상적인 정반합론(正反合論)의 실천자였다.

이 문제를 나는 책에 쓰지 않았다. 죽산의 생애를 판화처럼 복원하려는 본령과 멀고, 정치적 논쟁으로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다. 작가가 소설에서 늘 그러하듯이 직접 주제를 강조하지 않아도 독자가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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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규 소설가. 인천과 서해를 배경으로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을 주로 썼으며, 동국대에서 소설을 강의했다. 장편소설 <훈장과 굴레> <황해>, 평전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등을 썼다. 최근 <조봉암 평전>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