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터를 읽는 도서관

- '강정평화책마을' 만들기

2013-04-10     함성호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어쩐지'라고 할 것도 없이 낯설지 않다. 일본에 의해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는 구실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420년 전, 청나라에 의해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명에 매달린 결과) 정묘호란·병자호란이 일어난 370년 전, 다시 일본에 의해 (통상조약 체결을 구실로) 운요호 사건이 발발한 138년 전, 그리고 오늘날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열거한 사건의 괄호에 묶인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는 주권 없는 상태로 일제의 식민지로,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이어져왔다. 무려 138년 동안, 그것이 얼마나 갈지는 참담하지만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앞서 열거한 사건의 내부적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420년 전에는 세금을 내는 양민의 수가 줄어 국가 재정이 부족해 군사력을 키울 여력이 없었다. 370년 전에도 역시 비슷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요인이 더 작용했다. 명나라의 쇠퇴를 간파하지 못한 엘리트들의 무능이었다. 138년 전에는 특정 상류계층의 교육, 자본, 문화, 정치의 독식에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자기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이를 흔히 '세도정치'라고 부른다. 이런 내부적 문제는 420년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군사적 발작 상태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힘이 없어서'라는 말로 모아졌고, 우리에게 힘은 곧, 교육과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지만 교육은 조선 중기 이래로 출세를 위한 수단이 되어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문화의 힘이 되지 못했다. 군사력을 위한 재정은 두꺼운 중산층을 키워 만든 게 아니라, 재벌을 키워 저임금으로 싼 물건을 만들어 수출에 주력하고 거기서 나오는 적자는 다시 서민에게 부담시켰다. 안정된 군사력은 두꺼운 중산층의 안정된 경제활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맨손으로 적과 싸울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칼과 총을 만들 돈이 있어야 하고, 그 돈은 재벌이 아니라 언제나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일에 당하여 모든 것을 군사적 바탕 위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 위험한 것과 안 위험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버리면 그 뒤에는 발작이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이 발작 상태를 제주도에서 본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모슬포~화순~강정마을~서귀포~성산' 등 남부 벨트가 이미 군사기지 공사를 진행 중이거나 군사기지 예정지로 거론되고 있다. 성산 쪽에는 신공항 예정지가 두 군데인데 그중 한 곳에 공군기지가 들어설 획률이 높다. 제주도 남부 지역에 군사벨트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런 발작적 광란은 제주도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퍼져 있다. 주한 미군사령부가 후방인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고, 그 아래 주한 미공군기지인 전북 군산이 자리한다. 평택은 산둥반도와 발해만 일대 중국의 주요 군사기지에 대한 최적의 감청 장소다. 여기에 현재 해군기지를 건설 중인 제주도의 강정이 있고, 더 멀리 가면 일본의 오키나와가 있다. 그리고 좀더 서쪽으로는 '영원히 침몰하지 않는 미군의 항공모함'이라 불리는 대만이 있다. 중국의 해안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미군의 군사벨트를 연결하면 강정 해군기지의 군사적 발작 상태가 확연히 드러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미군의 중국을 겨냥한 히스테리 상태를 보여준다. 강정 해군기지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결코 군사적 기반 위에서 얘기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군의 히스테리에 덩달아 춤출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강정 해군기지를 평화의 기반 위에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고, 그 중심에 강정이 있다.

미군의 군사적 발작 상태를 저지하기 위해 강정 주민과 지킴이들은 7년째 싸움을 해오고 있다. 이것은 우선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싸움이고, 강정과 제주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며, 주민의 삶을 위한 싸움이고, 결과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또 한편으로는 주민의 삶과 자연 생태계에 대한 고려 없이 행하는 무자비한 건설과 개발에 대한 싸움이다. 이는 다시 얘기하면 인간의 삶과 터전을 무시하고, 자연을 철저히 착취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대에 대한 반성이고,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강정평화책마을 만들기는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의미를 확장하고 좀더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문인에 의해 제안되었다. 해군기지 공사장에서 강정마을을 지키고,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하는 동안, 그리고 다행히 그 싸움이 끝났을 때도 그 싸움의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 더 커지도록 하기 위해 책을 선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책에는 이미 앞서 얘기한 강정 투쟁의 모든 의미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모든 가치, 인간에 대한 예의 자연에 대한 경외 같은 것들이 지금 강정에서의 싸움을 이끌고, 또 그것이 지금 우리의 가치를 미래로 전달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건축은 건축을 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책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흔히 웅장한 도서관을 연상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도서관을 지으려면 또 땅을 파헤치고 무엇인가를 세우고 덮어야 한다. 그런 식의 건축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해온 근대화를 위한 개발 방식의 재현이고, 해군기지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돈을 모아 땅을 사서 바위를 깨고 콘크리트를 부어 도서관을 짓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 된다 한들 저들이 우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대안으로 아무것도 짓지 않고,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아무것도 파헤치지 않는 건축을 하기로 했다. 그러고나서 다시 강정마을을 보니 정말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도서관이 이미 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벽도 없고, 화려한 계단도 없고, 검색대도 없고, 웅장한 서가도 없었다. 하지만 강이 흐르고, 거대한 나무가 있고, 신령스런 못이 있고, 지저귀는 새도 있고, 팔랑대는 나비도 있었다. 아름다운 돌담이 있고, 물을 가두는 통물이 있었고, 꽃이 피는 습지도 있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열람실로 서가로 쓰기로 했다. 아무것도 건축할 필요가 없었다. 신의 선물인 이 땅과 생태를 그대로 물려받아 쓰는 것, 최고의 건축은 아무것도 건축하지 않는 것이다. 대방무우(大方無隅),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다'는 노자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방 한 칸의 서가, 자연의 열람실

강정에는 도서관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책마을이 된다. 서가는 마을의 집집마다 있고, 거리 곳곳에 있게 된다. 쓰지 않고 버려둔 빈 헛간의 한구석에 책을 꽂고, 방 한 칸을 내줄 주민이 있으면 그곳에 서가를 꾸미고, 방이 곧 작은 열람실이 되기도 한다. 자기 집 거실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럴 땐 거실이 열람실이 되기엔 좀 불편하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는 툇마루가 될 수도 있고, 동네의 큰 느티나무 아래 그네를 매달고 거기를 열람실로 쓸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다 서가를 만들 수 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정자다. 강정마을에는 바다가 보이는 넓직한 해변에 정자가 하나 있다. 정자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책장으로 꾸미며 지붕에 바짝 올려놓으면 그대로 해변 서가와 열람실로 변한다. 커다란 대문을 이용할 수도 있다. 대문은 보통 두 짝 문으로 만들어진다. 한쪽은 사람들이 자주 여닫는 문이고, 다른 한쪽은 보통 수레나 차가 들어올 때만 활짝 열어놓는다. 이 부분을 이용해 대문 서가를 꾸밀 수 있다. 그리고 여닫을 수 있게 만들면 수레나 차량이 출입할 때도 별 무리가 없다. 담장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보통 시멘트로 만든 담에 설치할 예정인데, 부분부분 서가가 설치된 담에는 작고 예쁜 지붕을 씌워 책을 보호하고, '거리 가구'(Street Furniture)의 기능도 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풍경이 열람실로 된다. 열람실 유형은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짓는 트리하우스형 열람실, 나무에 매다는 그네형 열람실, 집에서 흔히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매개하는 툇마루형 열람실, 지붕과 탁 트인 풍경이 바라보이는 정자형 열람실이다.

도서관의 분류 체계는 '강정평화책마을'에 그대로 적용된다. 단지 여기서는 골목길과 차로, 농로와 수로를 따라 난 길을 통해 이루어질 뿐이다. 문학·역사·철학·과학·미술·음악 등의 서가는 이미 나 있는 크고 작은 도로를 가꾸면서 이어지고 구분된다. 아스팔트로 덮인 길은 양쪽 도로 가장자리를 30cm쯤 들어내고 녹도로 꾸민다. 수로를 따라 나 있는 길은 그대로 검은 돌을 쌓아 무너지지 않게 보완하면서 녹도의 종류, 수로냐 농로냐에 따라 자신이 목적하는 분류 체계의 줄기를 잡아갈 수 있다.

이 길 중간중간에 분류 항목에 해당하는 서가와 열람실이 존재함은 물론이다. 거기에서는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리고, 흐르는 물소리도 들리며, 야자수 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들리고, 해변의 파도 치는 소리도 들린다. 흐르는 뭉게구름, 녹색 숲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살갗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는 바람, 햇빛. 강정평화책마을은 이런 공감각적 열람실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사람들과 어떻게 가깝게 할 것인가? 책이 있다고 사람들이 모이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 분야에 적합한 워크숍을 계획했다. 예를 들면 문학에서는 '자서전 쓰기'나 '시창작 교실', 음악에서는 '작은 오페라 교실', 미술에서는 '그림책 만들기', 철학에서는 '영화로 보는 철학'. 이를 통해 워크숍을 수행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모든 목록은 가능한 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강정평화책마을에서 사람들이 책만 읽고 돌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느낌의 도서관

자연은 인간이 평생 읽어내야 할 가장 완벽하고 방대한 텍스트이다. 책을 읽는 것은 이 방대한 자연을 읽어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열람실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오래 책을 읽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드는 열람실은 불편하다. 그 열람실에서 단 몇 분이라도 책을 읽는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족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단 몇 분이라도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막상 그저 그런 느낌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서 어느 순간 물소리가 들리고, 새가 지저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자연의 열람실 기억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책에서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연의 느낌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바다. 우리가 도서관을 '짓는' 것이 아니라 책마을을 '만드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기 삶과 터전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자연을 도륙하고 파탄 내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결국에는 수많은 콘크리트 쓰레기만 양산했을 뿐이다. 세계사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 삶을 지키는 데 가장 먼저인 것은 우리가 우리 삶과, 우리 삶의 터전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강정평화책마을은 그 처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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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성호 시인, 건축실험집단 'EON'대표. <문학과 사회>(1990)로 등단. <공간> 건축평론 신인상(1991). 시집으로 <56억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건축평론집으로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반하는 건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