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예술가 혹은 벨기에 예술가

2013-04-10     세르주 고바르트

유럽은 지방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국가로 이루어진 것인가? 수도 브뤼셀에 여러 유럽의회 위원회가 있는 벨기에는 국가 정체성보다는 지역 정체성을 우선하는 것을 검토 중이고, 분리를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이에 반대했다. 벨기에의 선택에 걸린 쟁점은 무엇인가?

"벨기에라는 나라는 없다. 내가 그곳에 살고 있어서 잘 안다."(1) 플랑드르 지역 오스텐트에서 태어난 가수 아르노는 벨기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연립정부 협상이 교착되면서 500일 넘게 무정부 상태였던 벨기에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2) 더 깊게 들여다보면, 역설로 가득 찬 벨기에의 현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벨기에인 1050만 명 가운데 60%가 네덜란드어를 쓰고 있는데 그중 37%만이 자신을 플랑드르인이기에 앞서 벨기에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프랑스어 사용자 중 55%는 먼저 벨기에인이고 그다음이 왈롱인이라고 생각했다.(3)

2010년 6월 13일에 실시된 총선의 결과도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남부 프랑스어권 왈롱에서는 사회당이 제1당으로 복귀했지만, 북부 네덜란드어권 플랑드르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새 플랑드르 연대'(NVA)가 40% 넘는 지지율을 얻었다. NVA는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지 기반을 잃고 있었던(2007년에는 하원의원 1명밖에 내지 못했다) 민족주의 세력들의 연대로 탄생했고, 지난 30년간 세력을 키워온 극우파 '플랑드르 이익당'(VB)과도 동맹을 맺고 있다.

플랑드르와 왈롱의 '차이'

정치권이 500일간 기나긴 협상을 벌이는 동안 대부분 플랑드르 출신으로 구성된 예술가 그룹의 주도로 분리독립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예술가들은 분리독립이 어떤 경우에도 벨기에 국민을 앞세워 추진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 이름으로는 안 된다!'(Niet in onze naam!)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수천 명의 예술가와 지식인이 서명한 선언문을 살펴보면 "민족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하나로 귀착시키는 닫힌 문화를 선동하고 있다. 언어가 바로 그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노동자든 기업대표든 상관없이 언어를 통해서만 보려 한다"고 적혀 있다. 또 분리독립은 지역 간에, 사람들 사이에 '악의적 경쟁'을 만들어내고 '일반 시민들이 그 비용을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술가와 지식인 단체가 모든 사람을 위한 '연방 차원의 강력한 사회보장제도'를 요구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없다. 가수로는 아르노와 '엿먹으라'고 NVA의 당수인 바르트 데 베베르를 강하게 비난한 록밴드 데우스(dEUS)의 리드보컬 톰 바르만, 조형예술가 빔 델부아와 얀 파브르, 작가 톰 라누아, 안무가 알랭 플라텔과 안 테레사 데 키어스마에커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민족주의자들의 선택에 반대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플랑드르 출신 예술가들이 플랑드르에(적어도 플랑드르 유권자에게) 등을 돌린 것인가?

1980년대 초 프랑스어권 벨기에 지식인들은 '벨지튀드'(Belgitude·벨기에스러움)를 강조했다. 이 단어는 라루스 사전(2011)과 로베르 사전(2012)에 등재된 이후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졌는데, 로베르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돼 있다.

"벨지튀드: 여성명사. 어원, 1981년, 자크 브렐, '벨기에'와 '네그리튀드'(Négritude·흑인성, 흑인정신)에서 나옴. 벨기에 고유의 문화적 성질 또는 문화적 공동체로서 벨기에 고유의 정신을 일컬음. 예문: 오늘 하루 종일 사람들이 나의 벨기에스러움(벨지튀드)을 가지고 놀렸다. 베르트랑 블리에. '벨기에인들에게 벨지튀드라는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아닌 나', 다시 말해 왈롱인이 아닌 나, 플랑드르인이 아닌 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에는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벨기에인들의 깊은 자괴감이 묻어 있다."

정체성에 대한 벨기에인들의 복잡한 감정은 1980년 발행된 철학자 자크 소쉐가 주도하고 피에르 메르탕스와 브누아 피터르스 등 프랑스어권 작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한 공동 저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La Belgique malgr? tout·브뤼셀대학 출판부)에 잘 표현돼 있다. 하지만 예의 소쉐가 1990년에 출간한 <언제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벨기에>(La Belgique, toujours grande et belle·콩플렉스 출판)에서는 논조가 사뭇 달라졌다. 화가 피에르 알레신스키, 배우 브누아 풀보르드, 작가 장피에르 베르에겐, 아멜리 노통브 등 100명이 넘는 네덜란드어권·프랑스어권 예술가들이 자국에 대해 쓴 글에서 더 이상 '벨지튀드'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일까? 답은 '그렇다'.

플랑드르와 왈롱, 두 사회는 지난 40년간 벨기에가 겪은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맞춰 위치를 재조정해야 했다. 1970∼71년 시작된 일련의 정치기구 개편과, 나중에 이루어진 다섯 번의 헌법 개정으로 벨기에는 1994년 연방국가가 되었다. 연방은 자치권을 가진 지역을 중심으로 분할됐고 상당한 중앙권력이 '연방' 지방정부에 양도됐다. 지방정부는 플랑드르·왈롱·브뤼셀의 세 자치 지역과 네덜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 세 언어 공동체로 구성돼 있다. 언어 공동체는 여러 권한 중에서도 특히 교육·문화·미디어·스포츠정책·보건·사회·가족정책 등 사회 전반에 강력한 권한이 있고, 자치 지역은 경제·일자리·주택·환경 등의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벨기에 국가 예산 절반 이상이 자치 지역과 언어 공동체가 관리하고 있다.

사회 내부적으로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플랑드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가톨릭 사회였다. 학교 교육도 국가에서 지원하는 기독학교의 학생 수가 공립학교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심각하게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기독당(기독사회당의 전신)은 선거에서 항상 다수당을 차지했는데, 오늘날 기독당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플랑드르민주기독당(CD&V)의 지지도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시민들의 종교 활동도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습관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유화됐다.

프랑스어냐 네덜란드어냐

플랑드르 사회는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소수자로 여겨졌다. 실제로 1830년 벨기에 독립 때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채택됐고, 네덜란드어로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았음에도 1930년대가 돼서야 대학에서 네덜란드어 강의를 했을 정도로 네덜란드어는 매우 천천히 자리잡았다. 에밀 베르아랭, 모리스 마테를링크(4) 같은 작가들은 지리적으로는 네덜란드어권에 살았지만 프랑스어로 작업했고 프랑스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심지어 같은 언어를 쓰는 네덜란드에서조차 플랑드르 작가들은 전혀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벨기에인의 슬픔>(Le Chagrin des Belges·쥘리아르 출판·1985)이라는 경이로운 작품을 쓴 휘호 클라우스 같은 작가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플랑드르 민족주의운동은 무엇보다 네덜란드어를 수호하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적 측면이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플랑드르 지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 성공한 반면, 왈롱은 경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 점에서 오늘날 플랑드르의 분리독립 운동은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이탈리아 북부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못사는 남쪽을 위해 돈을 더 내고 있기 때문에 남쪽이 없으면 더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플랑드르는 오랫동안 프랑스어권 엘리트에게 복종적 (때로는 반항적)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남쪽에 대한 열등감도 없어졌다. 더구나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2개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수도 브뤼셀의 상황도 많이 변했다. 브뤼셀은 지난 100년 동안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이 더 많았고, 행정에서도 주로 프랑스어가 사용됐다. 하지만 대규모 이민이 이뤄지면서 이민자 수가 브뤼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게 되었다. 겉보기에 브뤼셀은 여전히 프랑스어권 도시지만, 그리고 브뤼셀에 사는 플랑드르인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플랑드르인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브뤼셀이 더 이상 프랑스어의 수호자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왈롱의 경우 탄광이 폐쇄되고 철강산업이 사양길을 걸으면서 경제·사회적으로 깊은 수렁에 빠졌다. 플랑드르가 인구나 경제적인 면에서 주도권을 가진 지금, NVA가 '벨기에는 더 이상 프랑스어권 국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벨기에가 프랑스어권 '국가연합'의 회원국인 것을 문제 삼는다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5)

모국어로 나를 옭아매지 말라

엄밀히 말하면 이제 언어는 더 이상 주도권이나 차별의 요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정적의 말인 프랑스어는 더 이상 금기어가 아니고, 네덜란드어의 수호도 우선과제가 아니다.

예술가, 특히 북쪽의 예술가들은 지금 플랑드르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벨기에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다. 플랑드르의 여러 극단과 음악밴드는 프랑스어로 이름을 짓기도 하고 네덜란드어·프랑스어로 공연을 하고 있다. <권력 3부작>(Triptyque du Pouvoir)의 작가 톰 라누아는, 최근 아비뇽 연극축제에서 기 카시에의 연출로 자신의 작품 <내 어머니의 언어>(Sprakeloos)를 무대에 올려 자신이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로 공연했다. 때로는 표준 네덜란드어가 아닌 지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미카엘 로스캄이 감독하고 마티아스 쇼에나에츠가 주연을 맡아 2012년 오스카상 외국어영화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불헤드>(Rundskop)는, 서부지방어로 대사하고 네덜란드어 자막을 넣었다. 쇼에나에르츠는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프랑스 영화 <재와 뼈>(De rouille et d'os)에서 연기했다. 이렇게 플랑드르 문화는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에 프랑스어로 수출되기도 하는데, 이것을 배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플라텔은 마드리드에서 발레 작품 <코러스>(C(h)oeurs)를 발표할 예정이고, 안무가 시디 라르비 셰르카우이는 신작 <테주카>(Tezuka)를 파리에서 공연할 것이다. 대중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단 스튜이벤, 록그룹 데우스, 신인가수 셀라 수는 거의 영어로 노래한다.

언어와 문화가 항상 연관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벨기에인에게 언어는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고, 플랑드르 민족주의자들이 벨기에인이라는 정체성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2012년 10월 NVA가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특히 안트베르펜에서) 벨기에를 '국가연합'으로 만들겠다는 위협이 점점 커져가는 지금, 예술가들은 NVA를 전혀 다른 말로 부르려 한다.(6) 2011년 1월 플랑드르의 일간지 <데 모르헨>(De Morgen)에 실린 '바르트 데 베베르는 언제까지 우리의 인내심을 남용할 것인가?'(Quousque tandem abutere, Bart De Wever, patientia nostra?)(7)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작가 톰 라누아는 이렇게 선언했다. "내 모국어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모국어 때문에 다양한 기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모국어로 나를 옭아매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벨기에의 상황을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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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주 고바르트 Serge Govaert 벨기에 브뤼셀 CRISP 사회정치정보연구소장

번역 / 임명주

(1) <리베라시옹>, 2010년 6월 12일자.
(2) 이른바 ‘전통 정당’이라 불리는 6개 정당이 ‘새 플랑드르 연대’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엘리오 디뤼포 사회당 당수를 총리로 임명하고 2011년 12월부터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3) 입소스(Ipsos) 설문조사, 2010.
(4) Franck Venaille, ‘마테르링크의 왕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월호.
(5) 플랑드르 지역 일간지 <라부아 뒤노르>(La Voix du Nord), 2012년 10월 10일자.
(6) Confederation. 독립국가들이 조약을 맺어 통합한 느슨한 연합체. 연방과 달리 회원국은 주권을 유지한다.
(7) “Quousque tandem abutere, Catilina, partientia nostra?” 키케로가 독재자 카틸리나를 향해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한 연설 중 한 구절. 카틸리나 대신 ‘새 플랑드르 연대’(NVA) 당수의 이름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