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저널리즘과 정파투쟁

2013-05-13     피에르 랭베르 외

 

지난 4월 2일, 프랑스의 전 국세·예산부 장관 제롬 카위자크는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 보유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메디아파르(Mediapart)>의 폭로 기사가 사실임을 시인했다. 졸지에 이 인터넷 매체는 '공공의 심판자'로 등극했다. 인터넷 매체에 회의적 시선을 던지던 다른 언론매체들도 <메디아파르>의 공로를 인정해주었다. 이 일로 어려움에 처하거나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정치인들도 <메디아파르>를 치켜세웠다.

정치권 밖에서는 분노와 통쾌함이 뒤섞인 감정, 정치적 부패와 무능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좀더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호소까지 참고 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카위자크의 장관직 사임과 그의 비리에 대한 <메디아파르>의 끈질긴 조사와 폭로는 일말의 통쾌함을 선사하지 않았겠는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아마 위기를 틈타 유럽에서 부상하는 현재의 정치적 경향을 '전복주의'(Subversivism)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이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는 이 말을 사적이고 비조직적인 반란의 형태로 이해했다.(1) 국가에 대한 원망에 기초한 반란은 권력자가 제공하는 스펙터클을 개탄하거나 비웃으면서도 '하위 주체'(Subaltern)로서의 지위를 내면화한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인민이 전복주의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파시즘은 이 자양분을 먹고 자라났다. 19세기 말 이탈리아는 민족부흥운동(Risorgimento)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다른 국가에 존재하는 집단적 표현의 통로- 정당, 노조, 단체, 민주적 제도- 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 더욱이 부패가 만연해 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사회제도에 대한 냉소가 일반화돼 있었다. 전복주의는 민중뿐 아니라 엘리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현대 이탈리아에서 이 말이 사법기관들에 대항해 끈질기게 유격전을 펼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애매한 정치 프로그램을 들고 나온 오성운동(M5S) 대표 베페 그릴로를 표현할 때 공히 사용되는 이유다.

공적 스캔들과 사적인 복수

중세시대 사육제 기간에 성과 속, 귀족과 천민, 아름다움과 추함, 다시 말해 모든 전통적인 위계가 전복된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자마자 질서는 회복된다. 이런 관점에서 전복주의는 사회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의 부재에서 오는 비관주의를 표현한다. 그람시는 '비정치적 반란'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사용한다. 분명히 반란이긴 하되, 프로그램도 미래도 없는 반란이다. 정치·금융 스캔들을 좇는 저널리즘에 들어맞는 표현이다. 권력 정상에서 벌어지는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는 데 집중하는 언론매체들 사이에서,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폭로해 2년 뒤 결국 리처드 닉슨을 물러나게 한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슈타인 기자는 전설적 모범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1980년대에 이런 매체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동시에 찾아온 세 가지 변화 덕분이었다. 우선, 1970년부터 반체제 성향의 인물들이 예심판사로 임명되면서 사법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부와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기자들은 자료를 넘겨받아 진위 여부만 확인하면 되었다. <르몽드>와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 출신 다니엘 카르통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변호사나 예심판사, 팩스번호 3개 정도만 알고 있으면 쉽게 탐사(수사경찰식 취재보도)기자가 될 수 있다"(2)고 회고한다.

둘째, 대부분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는 탐사기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지형 변화의 덕을 보게 되었다. "전통적 좌우 대립이 약화되고, 갈수록 엘리트 학교 출신의 비슷비슷한 인물들이 정치를 도맡아하면서 정치투쟁의 초점이 상당 부분 도덕적 문제로 이동했다."(3) 사회학자 도미니크 마르셰티의 설명이다.

셋째, 언론매체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속적인 '실시간'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뉴스의 극장화가 진행됐다. 편집부 기자와 달리 탐사기자들은 자신의 활동을 연극화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프로레슬링이나 '코메디아 델아르테'(16~17세기 이탈리아에서 성행한 희극)에서처럼 전형적인 두 인물의 대립이라는 시나리오를 따라간다. 한편에는 기자(착한 편, 선한 천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권력의 대표자(나쁜 편, 베튄의 형리-프랑스 인기 레슬러가 사용한 악당 캐릭터)가 있다. 마르셰티는 지적한다. "탐사기자의 활동은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 부상하는 데 기여했다. 이른바 '심판자'라는 인물형이다. 이들은 최대한의 투명성을 바라는 '여론'의 기대와 요구를 등에 업고 최고 재판관과 정치 지도자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처럼 판매 부수(혹은 시청률)를 늘리기 위한 의식화된 연출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 사안으로 축소해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약화되면서 다수파가 바뀌면 정치도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그만큼 탐사기자의 역할도 협소해졌다. 그들의 폭로가 성공한다고 해도 체제에 속죄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며 기껏해야 개선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친다. <메디아파르>의 폭로 덕분에 한 장관직의 주인이 바뀌었다. 연못에 느닷없이 날아든 돌멩이 하나가 파문을 일으킨다. 삽시간에 조세천국 문제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대두된다. 그러고는 곧 새로운 뉴스에 묻혀 잊히고 파문은 잠잠해진다.

탐사기자 드니 로베르는 1996년 펴낸 책에서 최근 5년간 프랑스를 뒤흔든 각종 정치·금융 스캔들이 어떻게 실망스러운 방식으로 귀결됐는지를 밝힌다. "'비리'가 터지는 동안에도 비리는 계속된다."(책 제목) 공직자윤리법이 도입됐지만, 금융자유화 덕분에 오히려 노골적인 경로를 따라 부패가 만연됐다. 파나마 국적의 기업, 스위스와 룩셈부르크 은행 등을 이용한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름과 얼굴만 달라졌을 뿐 변한 건 하나도 없다. 새롭게 패를 나눠가졌을 뿐이다. 우리 같은 기자는 단지 체제의 자기조절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드니 로베르가 17년 전에 던진 질문이다.

기자의 추적 탐사 활동을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보는 에드위 플레넬은 이런 생각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카위자크 사건이 해결된 뒤부터 이 <메디아파르>의 창립자는 수십 명의 자사 기자들을 대신해 언론매체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관심을 독점했다. 카위자크가 자신의 비리를 실토하기 전까지 몇몇 언론매체는 <메디아파르>의 기사가 신빙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플레넬은 언론인들 간의 유대 강화를 촉구하며 "<메디아파르>가 비리를 폭로했을 때 카위자크는 곧바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왜냐하면 우리가 폭로한 정보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라디오 방송 <BFM>, 2013년 4월 9일)

"폭로주의, 결국 보수의 포로가 될 것"

하지만 과거 그의 책임하에 줄줄이 나온 오보를 생각하면 이런 훈계가 놀라울 따름이다. 우선, 그의 이름으로 나간 '파나마 스캔들' 관련 기사(<르몽드> 1991년 8월 27일자) 때문에 <르몽드>는 "사회당 자금 출처와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기사로 내보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정정보도까지 실어야 했다.(1991년 9월 5일자) 1996~2004년, 플레넬이 편집장으로 있는 동안 <르몽드>가 저지른 실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일이 열거하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그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1999년 4월 8일 머리기사로 나간 기사, '코소바인들의 추방을 위한 말굽 작전'의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2000년 2월 5일 1면에 '리오넬 조스팽 정부가 660억 프랑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기사가 나갔지만 이 역시 다음날 바로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2000년 10월 14일에는 '브뤼셀, 비벤디의 시그램 인수를 막다'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하지만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비벤디의 손을 들어줬다. 2002년 12월 28일 라엘이 이끄는 단체가 인간복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뒤 '최초로 인간복제에 성공한 종교단체'라는 대문짝만 한 머리기사 제목을 뽑았지만, 이 역시 꾸며낸 일이라는 게 밝혀졌다.

2003년 6월 17일자로 나간 알레그르 사건(연쇄살인범이 연루된 변태 섹스 파티) 관련 기사 '본지 기자 노에 호수의 집에서 벌어진 일들을 재구성하다'에서, "집 안 벽에 땅에서 약 50cm쯤 높이에 아이 키 정도 길이의 사슬이 고정돼 있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 상상적 저널리즘의 기념비적 작품을 창작한 기자는 나중에 "집 안을 본 적이 없다"고 실토한다.(<르몽드> 2003년 9월 28일자)

그러나 드니 로베르와 에른스트 바케스가 2001년 2월 룩셈부르크 어음교환소 클리어스트림에 관한 책 <폭로>를 출간했을 때, <르몽드>는 카위자크에 대한 <메디아파르>의 폭로에 의혹을 제기했을 때와 같은 논리를 내세워 그들을 비판했다.(2001년 2월 26일자) 상고심에서 '로베르와 바케스의 탐사보도가 신빙성이 있다'는 판결이 내려지기 5년 전, 플레넬은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탐사는 빛 좋은 개살구다. 어떤 신빙성도 없다. 세계 금융에 대한 다양한 음모 이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고는 그 책의 출판이 "역설적으로 정치적 무관심과 의식의 약화를 초래할 것"(4)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결론은 '카위자크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최근에 발생한 이 스캔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전복주의가 만연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하는 동시에 냉소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사실상 이 스캔들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는- 현재로서는- 오직 사적 형태로만 분출된다. 집단적 항의로 발전하지 못하는 한 이 스캔들은 일반적 징후의 일부로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사회당은 변화의 대변자를 자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환상은 깨졌다. 그와 함께 조만간 긴축과 부패의 연합이 몰락할 것이라는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그람시는 좌·우를 막론하고 전복주의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위기가 도래하면 전복주의는 어쩔 수 없이 보수주의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다른 출구를 찾고 싶다면 언론을 통한 폭로보다 정치적 결집에 나서는 것이 훨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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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랭베르 & 라즈미그 크쉐양 Pierre Rimbert & Razmig Keucheya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사회학자. 라즈미그 크쉐양은 안토니오 그람시 텍스트 선집 <기동전과 진지전>(La Fabrique·파리·2012)을 출간했다.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안토니오 그람시, <Cahiers de prison 1·2·3·4·5>, Gallimard, Paris, 1996. 특히 3, §46. 한국판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 <그람시의 옥중수고 1·2>, 거름, 1999.
(2) Daniel Carton, ‘Bien entendu, c’est off’(물론 오프더레코드입니다), <Ce que les journalistes politiques ne racontent jamais>(정치기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 Albin Michel, Paris, 2003.
(3) Dominique Marchetti, ‘Les révélations du journalisme d’investigation’(조사 저널리즘의 폭로),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n°131~132, Paris, 2000년 6월.
(4) <Le Soir>, Bruxelles, 2006년 10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