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이 말하고 싶은 것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RPDC)은 다시 한번 전세계를 숨죽이게 했다. 미국에 대한 핵공격,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1) 폐기, '불가피한 제2의 한국전쟁' 같은 일련의 위협과 일본을 비롯한 괌에 있는 미국 기지를 겨냥한 미사일 배치 등이 그 좋은 예이다. 2012년 3월 중순 이후 북한의 선전 공세는 극에 달하고 있다. 전세계 미디어는 즐기는 듯이 북한의 호전적 독설을 타전하고 있으며, 일련의 위협에서 어떤 것에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지 못한 채 북한의 선전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북한은 이런 반응에 아주 흡족해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정부의 강경책 이후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 아래서 북한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이같은 미국의 정책 실패와 지난 2월까지 북한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이명박 정부의 정책 실패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상황은 15년 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흐르는 실정이다.
분명히 북한은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이 상황은 일본 영토를 통과하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 기술을 지닌 1998년 같다. 클린턴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정책 기조를 바꿨으며, 2000년 10월엔 마들렌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고려했다. 하지만 그 이후 부시 대통령은 전임자의 업적을 일소해버렸다. 북한은 2006년·2009년·2013년, 세 번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하며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북한은 다량의 플로토늄과 핵탄두화가 가능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 또 최근에 핵무기는 '협상의 대상'이 아님을 선언하면서 미래에 있을 협상의 벽을 높이고 있다.
김씨 세습왕조의 두 번째 권력계승자인 30대의 김정은은 2011년 12월에(2) 죽은 아버지 김정일에 이어 정권을 장악했다. 그 이후 북한은 가장 평화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국제 인권기구에 따르면, 물론 그동안에도 북한에는 20만 명의 죄수가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었지만.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1년 후(노동당 제1서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원수) 김정은은 유례가 없는 격렬한 공세를 펼쳤다. 지난해 12월의 인공위성 발사, 지난 2월의 핵실험 등과 같은 조치를 병행해가면서 말이다. 물론 국제연합 안정보장이사회는 이런 북한의 조치를 강하게 규탄한 바 있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5년 동안 고등학교에 다녔다. 외국 경험으로 인해 그는 분명 기성세대에 비해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1990년대 말 이후 북한이 고수해온 노선을 따르고 있다. 바로 '강성대국 건설' 노선이다. 이것은 경제발전과 군사력을 조화시키는 슬로건처럼 보인다. 어휘상 차이를 제외하면 이 슬로건은 19세기 외세와 부딪힌 일본 메이지 시대(3)의 야망(부국강병, 즉 부유한 국가와 강한 군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선 이 두 목표가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번영'은 개혁을 전제로 한다. 개혁은 특히 외국에 대한 문호 개방과 기술 지원 및 투자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외국 원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동맹국은 북한의 위협이 지속되는 한 모든 협력을 거절하는 실정이다.
이에 맞서 북한은 공세를 펴면서 현상태를 흔들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전략적 인내'를 문제 삼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옥죄고 고립시키는 국제 제재를 위한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이 이중 플레이 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국제적 비난에 목소리를 더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북한을 돕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명백한 도전인 북한의 세 번째 핵실험 역시 중국 정부에 주권 수호를 위한 북한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핵실험을 통해 억제력을 보유하게 된 북한 당국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핵무기 공격에 대해 피난처를 마련했다고 판단한다. 미국 정부는 최소한 다섯 차례에 걸쳐 이같은 위협 카드를 내보인 적이 있다. 북한은 주민에게 핵실험 강행 정책이 성공적이었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실제로 북한은 사반세기 전부터 외부 공격에 끄떡없는 나라를 만들고 외세로부터 독립이라는 성스러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앞세워 체제 정당화를 위한 희생을 강요했다. 김정일 시대의 유일한 외교적 성과인 핵무기 포기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세계로부터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집착과 김정은 체제가 포스트전체주의로의 이행이 아니라는 허울 좋은 부정이 바로 북한에서 볼 수 있는 극에 달한 민족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옛 소련의 몰락 이후 국제 질서에서 자취를 감춘 이념적 양극화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포스트 식민주의 역사를 따른다.
실제로 유럽에서 '냉전시대'는 평화의 시대였다. 이와는 달리 아시아, 특히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냉전시대는 식민지 해방 전쟁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무장 충돌의 시대였다.(4) 북한에서는 선전을 통해 점령국 일본에 맞서 김일성의 지휘 아래 결집한 독립군의 '영광스러운 전투'에 대한 성스러운 기억을 계속 되살리고 있다.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이 전투이기도 하다. 북한은 현재 상황을 철저하게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차원과 다시 연결시키는 전략을 펴고 있다.
옛 소련 멸망 이후 포스트 식민주의의 여러 주제- 가령 독립, 민족주권, 인정투쟁 등- 이 대대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이 북한 주민에게 항구적 전쟁 상태라는 인식을 불어넣고, 또 그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더욱 위협을 느끼도록 했다. 하지만 이제 핵보유국이 된 북한은 결코 이라크 같은 운명을 겪지 않을 것이며, 또 그런 내용을 계속 선전할 것이다.
어쨌든 북한의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중국과 이웃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중국의 군사력 개입이 불투명하다. 실제로 중국은 남한 주도 아래 '흥분 상태의' 한반도 통일을 초래할 수 있는 일체의 불안정한 사태를 피하려 한다. 자국 국경에 미군이 배치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북한은 분명 패하게 된다. 하지만 남한과 일본에도 커다란 피해를 안겨줄 것이다. 또한 전쟁 와중에 과연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나 플로토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제재 조치나 보이콧과는 다른 접근 방법을 찾아내야만 할 수많은 위협이 상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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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필리프 퐁스 Philiipe Pons <르몽드> 도쿄특파원.
아시아의 현대사를 40년간 지켜본 <르몽드> 기자로, 1970년대 초 베트남전쟁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현장을 누볐다. 그는 1971년 일본 전통예술인 가부키와 노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을 처음 찾았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1973년부터 2년간 베트남전을 취재하는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가 1976년 <르몽드>에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줄곧 도쿄특파원으로 활약하며 일본 관련 저술을 여러 권 펴냈다. 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뛰며 북한에도 여러 차례 드나들었으며, 한반도 문제에 관해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 특파원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번역 / 변광배 프랑스 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 대표.
(1) 1950년 남북한 사이에 있은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 조인으로 종결되었다. 그 후로 그 어떤 평화조약도 체결되지 않았다.
(2) Bruce Cummings, “김씨 왕조 혹은 왕의 두 시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2월호 참고.
(3)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시작되었다.
(4) Heonik Kwon, <다른 냉전>, 콜럼비아대학 출판부, 뉴욕,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