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넘어 '민주주의'로
[커버스토리-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서]
'연대 필요성' 강조하는 '사회적 자유주의'
과연 냉혹한 자본주의 교화할 수 있을까?
공화국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위대한 약속을 지켜주지 않는다. 이 약속이 문서상 규정에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실현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삼스런 문제는 아니지만, 요즘 들어 더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상하고 있다.평등의 문제가 거의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평등의 문제는 소득 격차에서도 비롯되지만, 사회적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단이 막혀버렸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실업과 질병 등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평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자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직업과 거주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만 ‘자유’는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실상에서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현실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한 분석과 제안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다. 이는 전통적인 ‘좌파’의 소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사회모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종말’, ‘역사의 종말’이라 불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1) 역사의 종말은 약간 과장된 듯 하지만,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의 종말’이나 ‘상식의 승리’는 분명한 듯하다. 이제 우리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말을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변신한 좌파의 혼란스러운 정체성
모든 것이 단순화하는 동시에 복잡하게 변했다. 우선, ‘시장’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경제체제는 자유와 효율성이란 관점에서 다른 경제체제는 오류에 불과한 것으로 단순화시켰다는 점이다. 실제로 동유럽 국가들은 그런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다. 반면에 복잡해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극단주의자’들은 완전히 한직으로 밀려나고, 앤서니 블레어부터 리오넬 조스팽까지 좌파였던 인물들이 ‘현실주의자’로 변절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당원인 파스칼 라미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사무총장이 됐다.
하지만 가혹한 현실은 그대로이고 불평등은 심해졌다. 의문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거의 언제나 묻혀버린다. 변혁의지는 멀어지고, 현실순응의 ‘현대성’만이 용인되는 시장경제의 지배 아래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인 민주주의가 어떻게 완성될 수 있을까? 불완전해 보이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야 교정하고 개혁할 수 있을까? 좌파의 가치관과 우파의 가치관이 다르긴 하지만, 이 두가치관이 현실이란 측면에서 어떻게 이상적으로 융화할 수는 없을까? 또 그런 융화에 모순은 없는 것일까?
방대한 문제인 만큼 기대감도 크다. 이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유권자에게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불안이 정말로 숙명인지, 또 이의 해결을 위한 진정한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 걱정하는 모든 시민에게 관련된 문제다.
반드시 서로 중첩되지는 않지만, 점증하는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현대화한 사회주의를 나름의 시각에서 다루려는 다양한 연구들이 이런 의문에 대답해보려 시도하고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 효력을 갖는 윤리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평등이란 특별한 개념과 평등에 이르기 위한 방법들도 거론된다. 인간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미래상이 회자된다.
이쯤에서 ‘자유주의적 좌파(Gauche liberale)’의 뜻을 정확히 정의해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레이몽 아롱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철학자로 유명한 세르주 오디에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족보를 추적한 책에서,(2)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의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식 전체주의’까지 거부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식 전체주의’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부르주아식 자유주의까지 거부했다는 오디에의 시각은 명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회적 불평등 외면
혁신적 탈바꿈을 시도했다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와 영국의 신노동당식 제3의 길로 대변되는 현대판 중도 좌파는, 평등을 지지할 뿐, 평등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따라서 태생적인 불평등은 물론 사회적인 불평등의 근절을 주장하지 않으며, “규범화되고 규제받는 시장에 잠재된 좋은 점과,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특징을 그대로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경제적인 효율성이란 기준 아래서 평등을 추구하는 편이 더 낫고 실현 가능성도 크며, 따라서 평등의 추구는 ‘연대 의식’의 요구로 해석한다.
당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기본 골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평등을 목표로 하는 평등주의를 포기한 대신에, ‘정치적 자유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인 최소한의 사회정의를 누릴 권리’를 사회적 권리로 인정하는 것이다. 평등주의의 유토피아는 끝난 셈이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평등하지도 않고, 평등할 수도 없다. 따라서 불평등이 민주주의와 시장에 방해만 되는 불평불만으로 변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제도적 장치를 창설하는 편이 더 낫고, 여기에서 연대가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게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공통된 주장이다.
연대가 진부한 개념이라 해도 연대에 대한 기대감은 우리 삶 속에서 여전하다. 정치철학과 윤리철학의 영역에 속한 이 연대의 개념은 1840년 공화적 사회주의의 창설자 중 하나인 피에르 르루가 처음 사용한 뒤, 이제는 거의 일상적인 단어가 돼버렸다. 르루는 “내가 처음으로 법학에서 ‘연대’라는 개념을 빌려와 철학, 말하자면 내 판단으로는 종교에 도입했다. 나는 기독교의 자선을 인간적인 연대로 바꿔가고 싶었다”라고 말했다.(3) 한편 국제연맹 창설에 기여한 레옹 부르주아는 19세기 말까지 이 개념을 연장시켜 연대의 윤리적 필요성을 의무로 생각하기도 했다.(4) 따라서 연대는 법의 권위보다는 감정과 양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회정의라는 개념을 대신하며 막연히 좋은 것이란 선입견을 우리에게 안겨줬다.
좌파의 자유주의, 이상주의와 결별
‘연대’로 냉혹한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교화시킬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한계를 부드럽게 완화시키겠다는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불평등을 피할 수 없다는 고통스런 의식이야말로, 경제적 효율성과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여기서 핵심 전제는 불평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 혹은 영리한 사람이 변화를 만들어내며 성공의 길을 개척해 민주주의를 돕는다는 전제도 깔려 있다. 결국 성공할 만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주의에 사로잡혀, 남보다 먼저 사회적 신분 상승이란 사다리를 올라가는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철학자이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소장인 모니크 캉토 스페르베르가 지적하듯이, 지금과 같은 변화의 시대에는 불확실성이 증가한 만큼, ‘능력과 진취력을 지닌 사람’에게는 기회가 늘었다. 이런 기회를 붙잡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격차는 당연히 커지기 마련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평등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또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인간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은 본래 착하다는 성선설을 루소가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악은 분명히 존재한다. 자유주의는 ‘악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한 데서 시작됐다. 따라서 좌파의 자유주의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식욕·의지·능력 등의 차이가 갈등과 투쟁, 그리고 계급을 낳는다. 이런 이유에서도 수많은 자발적 행위의 결과로 생산된 재화의 분배만큼이나 복잡한 현상에 ‘공정함’ 등과 같은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좌파의 자유주의는 결국 이상주의와 결별하고, ‘연대 지향적이고 비극적인 자유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비극적’이란 수식어가 더해진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악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정의에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시장은 인간과 떼어놓을 수 없다. 시장을 부인하는 것은 ‘복잡하고 양면적인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현실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연대한 사회의 목표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상황’을 완화시키고, 다채로운 인간 조건(공공재, 가족, 영성, 지식, 창조, 전통, 악에 꺾이지 않는 힘, 인도주의적 세계관 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려면 이해집단과 여론의 다양한 목소리를 아우르는 합의를 끌어내는 방향으로 사회적 지원과 규제를 다듬어가야 한다. 예컨대 해고를 규제하는 대신에 일자리를 상실한 사람이 궁핍한 상태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하고, 일자리를 다시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시행돼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을 유지하고 누구든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다. 시장은 부의 축적 조건이기도 하지만, 자기비판과 자기완성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지배 수단이 아니라 자유의 도구인 시장에서는 누구나 자주적으로 자기만의 삶을 꾸려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좌파의 자유주의는 기본적인 보호장치를 보장하고, 누구에게든 진취력을 발휘해서 각자의 삶을 마음대로 꾸려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각자의 지능지수에 달려 있다. 따라서 좌파의 자유주의는 얼핏 생각하면 신자유주의와 확연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사회주의, 전통적 자유주의와 화합 가능성
모니크 캉토 스페르베르를 비롯해 많은 좌파 학자가 주장하듯이, 이런 규범적 자유주의, 즉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은 좌파만이 아니라 우파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또한 오디에나 캉토 스페르베르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레이몽 아롱은 일찍이 사회주의와 전통적 자유주의의 화합 가능성을 예측했다. 물론, 아롱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의지가 있는 자유주의’를 뜻했다.(5)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둘의 화학적 결합이 한층 명백히 드러났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 모두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막연히 윤리적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그 때문에 ‘연대’라는 핵심적 개념 이외에도 존중과 투명성, 또 약간의 부정적 의미가 스며있는 배척과 차별 등이 과거에는 정의라는 단어가 사용되던 곳에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가 이런 식으로 희석돼 정치적 결정의 장에서 밀려나 양심의 문제로 취급되는 이유는 ‘국민’이란 개념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한 탓도 크다.
오디에의 지적처럼 현실을 직시한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점적 현실’이나, 캉토 스페르베르가 지적하는 ‘다수의 독재’는 낯선 일탈 현상이 아니다. 사회적 자유주의의 출발점이었던 개인의 불평등은 사회적인 사실인 동시에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원칙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또한 다수의 법칙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다수의 판단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달리 말하면, ‘국민’의 개념과 그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피에르 로장발롱은 <민주주의의 정당성>에서,(6) 민주주의의 유일한 권력 근거인 보통선거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연적인 능력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한 채 개개인의 차이만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그는 ‘투표함의 권력’이라고도 알려진 국민주권이란 원칙까지 부인했다. 로장발롱은 사회의 총의(總意)를 과반수의 표현과 동일시하는 관습은 ‘끔찍한 거짓’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봤다. 따라서 다수가 정말로 전체를 대신하는 것처럼 인정하는 행위는 ‘국민’이 사회 구성원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기는 ‘조작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로장발롱은 “민주주의가 일탈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연구해서, 시민들이 대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현실을 확신하게 됐다”며, “투표기권율이 높은 현상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과반수는 산술적인 뜻을 갖지만 인류학적 차원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면 민주주의에 정당성을 되돌려줘야 마땅하다. 따라서 구체적인 개인들을 고려하는 식으로 ‘사회적 총의라는 힘’이 발휘돼야 한다는 논리다.
민주주의의 가치 끊임없이 고민해야
선거의 신성화에 맞서고 공익(公益)이 결정되는 ‘국민적 이성의 집결소’였지만 이제 야합의 장소로 타락해버린 의회를 견제하려면, 또 본질적으로 정당성이 불완전하고 그 정당성마저 상실해가는 행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려면, 나아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신세계’에 진입하려면 민주주의의 이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가치를 고민하고, 그 가치를 현실화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당면한 과제라는 게 로장발롱의 생각이다.
공평성은 추상적인 원칙이나 당파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제도에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주권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복잡한 현상에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각 현상의 독특함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따라서 당파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의원들이 아니라, 능력을 인정받고 완전히 자율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독립된 기관’이 필요하다. 또한 헌법적 사법 절차에 따라 도입되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난 현실을 고발”하는 성찰을 위한 기관도 필요하다. 두 경우 모두 정보 수준, 대립의 보장, 진정한 토론에 필요한 성숙한 반성 등 요구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 따라서 ‘촌스런 당파적 대립’이나 ‘불협화음에 가까운 여론’을 크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국민은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든 대표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든 워낙 판단력이 부족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로장발롱에 따르면, ‘철저히 공평한 사회’는 새로운 시민에게 동정심, 가까운 관계, 투명성 등과 같은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공평한 사회의 제도는 일종의 지도 위원회와 같은 시민 대리기관을 가동한다. 시민이 수탁자를 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이런 사회의 국민은 과반수로 귀결되는 유권자만도 아니고 저항권과 주도권을 쥔 사회적 시민만도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와 존엄성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원칙에 충실한 국민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도덕적인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요컨대 과반수가 법을 만들지 않고, 법의 기계적 적용에서 개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또한 권리의 행사에는 반드시 행동의 평가가 뒤따른다. 기계적인 법의 적용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짓이다. 국민이란 개념도 계몽된 시민과 전문가에게 맡겨진 ‘합리적 토론’ 덕분에 인류적 국민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변화는 ‘자아의 긍정적인 확인’이란 가능성까지 열어준다.
이런 이상적인 정치는 유럽헌법조약에서 제시한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약간 막연하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띤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개체의 사회’와 ‘개체의 경제’를 동시에 옹호하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로장발롱이 개략적으로 밝힌 목표와 수단은 귀족주의 냄새를 풍긴다. 물론 이런 귀족주의 성향은 그가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로 정당화되며, 대의 민주주의라는 틀에서만 가능한 듯하다. 그러나 몇몇 기상천외한 주장까지 갈 것도 없이, 민주주의의 심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견제 세력들이 보통선거, 즉 유권자의 지적 수준을 막론하고, 각 유권자가 갖는 한 표의 무게를 제한하려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려는 의지 필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L’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소장으로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대표 편집자이기도 한 자크 쥘리아르는 <세계의 여왕>에서,(7) 유럽 국민투표의 결과에 격한 감정을 숨김없이 토로한 후에, ‘이른바 대의정치라는 경건한 거짓말’과 도박과도 같은 보통선거를 거부할 방법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그는 여론의 힘에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여론은 국민의 목소리이고, 때때로 도덕적인 힘을 갖는다. 로장발롱이 높이 평가한 독립된 사법기관 중 하나인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여론과 보통선거는 대립된 개념이 아니다. 쥘리아르를 따르면 “여론조사, 선거, 국민투표, 집단 토론은 결국 동일한 현상, 즉 여론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의회 제도와 여론 형성 제도의 공조에 기반을 둬야겠지만, 국민을 교육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성적 판단과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지도자의 권유에 따라 국민을 교육할 사람은 국민 자신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의 현명한 판단은 정치인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결국 국민에게는 민주적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국민에게 높은 목표를 추구하도록 끌어가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말이기는 하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려는 의지, 즉 평등을 다양한 의미에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은 여기에서 언급된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을 근거로 정치를 윤리적인 방향으로 바꿔가는 데 있다. 또한 투명성을 이유로 엘리트 계급을 감시 아래 두어야 하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국민’을 엘리트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민주적 시민’은 법보다 계약, 집단보다 개인, 선택보다 합의, 투표보다 대화를 요구할 것이다. 이상적인 시민의 등장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과 얼마나 부합하는 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사회적 자유주의를 통해 줄기차게 자본주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게 나은지, 아니면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으로 영리하게 변장하는 것이 나은지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작가. 저서 <반역자들의 예언>(2002), <세계를 조종하는 리모컨>(2005) 등이 있다.
번역•강주헌 2nabbi@ilemonde.com
불문학 박사 출신의 문화비평가 겸 번역전문가. <선물> <해리포터 철학교실> 등 100여 권의 번역서를 펴냈다.
<각주>
(1)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La Fin de l’histoire et le Dernier Homme), 파리, 플라마리옹, 1992.
(2) 이 문단의 이어지는 인용문은 모두 같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3) 피에르 르루, <인성론>(De l’Humanité), 파리, 페로탱, 1840.
(4) 레옹 부르주아, <연대의 철학>(Philosophie de la solidarité), 1879.
(5) 세르주 오디에의 <역사 철학자, 레몽 아롱>(Raymond Aron, philosophe de l’histoire)에서 인용. 세르주 오디에, 마르크 올리비에 바루크, 페린 시몽 나엥이 공동 편집, 파리, 에디시옹 드 팔루아, 2008.
(6) 이 책은 <반민주주의, 불신 시대의 정치>(La contre-democratie. La politique a l’âge de la defiance, 세이유, 2006) 이후에 발표된 책이다.
(7) 이 책은 2008년 정치학 서적 상을 받았다.
사회주의의 자유주의적 해석 19세기 말에 프랑스에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한 연대에 대한 공화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그때부터 일종의 재분배를 요구했다. 사회주의가 이런 사상을 정치 강령에 포함시켰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재분배를 어떤 방향에서 이해했을까? 재분배가 원칙이라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소득의 이전이다. 한편 극단적인 형태를 취하면 재분배 원칙은 무일푼인 사람에게 추가적 헤택을 주는 데 역점을 기울이고, 그런 정책이 경제와 개인의 행동과 감정에 끼치는 영향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 서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