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에게 기본소득을 허하라
Dossier 기본소득제, 멀지 않은 유토피아
위기의 시기에 새로운 삶,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당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실험은 계속돼야 한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무조건적 기본소득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이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이런 도식이 사람들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 만약 정반대의 논리를 제시한다면 헛소리 취급받을 게 분명하다. 가령 임금을 받는 활동과 별도로 모든 이에게 충분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돈, 즉 무조건적 소득을 매달 지급하자는 제안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소리로 들린다. 우리는 여전히 개인의 생존을 위한 수단을 척박한 자연에서 얻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르다.
장학금, 양육휴가, 퇴직연금, 가족수당, 실업수당, 공연예술계 비계약직의 실업급여, 최저생계 보조금 등은 모두 수입과 노동의 분리에 기초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보장소득(Granted Income) 제도가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여전히 불충분하다고 끊임없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이 복지제도들이야말로 '이미 실현된' 유토피아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니엘 해니와 에노 슈미트의 영화 <기본소득>(2008)을 보면, 독일 인구의 전체 소득 중에 직접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41%에 불과하다.(1) 프랑스에선 2005년 기준으로 전체 소득의 30%가 재분배(다양한 수당) 방식으로 지급됐다. "온갖 이데올로기적 담론이 성행하고, 복지국가 체제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 앞에 무릎을 꿇어도, 미테랑·시라크·사르코지를 거치는 동안 의무과세 비율은 가차 없이 상승했다."(2) 이 화살표를 조금만 더 밀어올리면 모든 사람이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본소득(Basic Income)의 도입으로 가장 먼저 얻게 되는 결과는- 사회문제와 개인적 불안의 원천이던- 실업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고용'이라는 공식 목표를 위해 지출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고용 촉진을 위해 기업에 특혜를 제공하는 관행은 과연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기업에 제공된 사회보장 분담금과 세금 감면 혜택은 1992년 총 19억 유로이던 것이 2008년에는 총 307억 유로에 달했다.(3) 1989년 한국의 대우그룹은 로렌에 공장 3개를 짓는 대가로 350억 유로를 받았지만, 2002년 공장 문을 닫으면서 직원 1천 명을 내쫓았다. 한편으로, 보장소득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사회수당 수혜자를 감시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정적 절차- 수혜자에게 모욕·참견·훈계가 될 수도 있는- 를 철폐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된다.(4)
여기서 잠깐, 우리가 지금 정확히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제안이 1960년대- 금융거래세(토빈세)를 제안한- 제임스 토빈에서 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경향의 경제학자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 상이함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크리스틴 부탱(기독민주당)이 제안하는 보장소득을 이브 코셰(녹색당), 녹색당과 좌파당을 망라한 '유토피아 운동' 등이 제안하는 보장소득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기본소득은 고용되지 않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으로 기업 보조금 같은 역할을 하며, 사회보장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마이너스 소득세'(NIT·저소득층에게 정부가 보조해주는 생활비) 개념도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좌파적 관점에서는 기본소득만으로 먹고살기에 충분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 '충분함'에 대한 정의는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공공서비스와 사회보험제도, 특정 사회수당(퇴직·실업·질병 등)에 대한 방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고, 다음의 몇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기본소득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각 가정이 아니라 개인에게 지급된다. 지급에 따른 어떤 조건도,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 개인은 일해서 추가로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이제 각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일을 계속할 수도 있고, 검소한 소비 수준에 만족하는 대신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쓸 수도 있다. 혹은 양쪽을 병행할 수도 있다. 고용되지 않은 기간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임금을 받는 노동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기본소득으로만 생활하기로 선택한 이들은 자신이 열정을 느끼는 일,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혼자 혹은 여럿이 함께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인간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활성화될 것이다. 2004년 벨기에 루뱅대학의 연구자 2명은 매달 연금을 받는 '윈 포 라이프'(프랑스 연금복권) 당첨자들의 사례를 참조해 기본소득 도입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했다. 경제학자 밥티스트 밀롱도는 이들이 복권 당첨과 기본소득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상황적 차이 중에서 한 가지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무조건적 소득 수령자는 다른 수령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하지만, 복권 당첨자는 완전히 고립된다. 그런데 자유시간의 가치는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증가한다."(5) 보장소득은 일, 시간, 소비, 타인과 맺는 관계 등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보장소득만으로 살아가는 이들뿐 아니라 임금노동을 계속하는 이들 역시 영향받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화 방식이 창조될 것이 분명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반대의 길을 갈 수도 있다. 특히 가정에 자신을 유폐하는 길을 택하는 여성들이 생겨날 것이다.
기본소득 개념의 태동
진보적 기본소득의 개념은 전후 미국에서 창안됐다. 1968년 폴 새뮤얼슨,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등 경제학자 1200명과 함께 기본소득 도입을 촉구한 토빈은, 1972년 조지 맥거번 민주당 후보의 자문으로서 대선 강령에 '데모그란트'(Demogrant)라고 부르는 보편적 기본소득 계획을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가 승리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 네덜란드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부상했다.(6) 벨기에에서는 1984년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필리프 반 파레이스의 주도로 일군의 연구자와 노조활동가들이 샤를 푸리에 서클을 열었다. 그 뒤 1986년 루뱅라뇌브대학에서 열린 학회에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asic Income European Network)가 결성되고, 2004년에는 전세계로 대상을 확대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로 개칭됐다. 네트워크 창설을 주도한 국제노동기구(ILO)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2012년 초 인도에서 시작한 보장소득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특히 최근 몇 년간 기본소득 논쟁이 활발했다. 12년 동안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다 독일 북부에 정착한 수잔 비스트가 벌인 활동 덕분이다. 그녀가 트레일러에서 생활한 것은 자유로운 삶을 원해서였지만, 베이비시터 일을 하고 받는 보수로는 집세 내기가 빠듯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족수당을 과세소득으로 통합하는 세제개혁안이 발표됐을 때, 비스트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녀는 스위스 독일어 지역에서 '기본소득을 위한 이니셔티브'(Initiative Grundeinkommen)를 창립한 해니와 슈미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기본소득 개념에 눈뜨게 된다. 그녀가 주도한 대중적인 서명운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급기야 2010년 독일 하원에서 기본소득 관련 토론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해니와 슈미트가 만든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선 1994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정부가 도입을 추진하던 직업진입계약(CIP)에 반대해 학생들이 들고일어선 상황에서 '최적의 보장소득을 위한 선전단'(CARGO)이라는 단체가 결성됐고, 이후 실업에 대항한 공동행동(AC!)이라는 단체로 통합됐다. 그리고 기본소득 제안은 1997~98년 겨울 실업자 운동과 함께 다시 등장했다. 당시 생태주의 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이 움직임에 가담했고,(7) 아직 형성 중이던 대안세계화 운동 내부에서도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했다.(8) 학술지 <사회과학 반공리주의 운동>(MAUSS)을 이끄는 알랭 카이예 역시 이 대열에 참여했다.
2003년부터 공연예술계 비계약직 실업급여가 공격받기 시작하자, 그들 중 일부는 이 제도를 수호하는 것을 넘어 인구 전체로 대상을 확대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럴 경우, 실업의 시기와 노동의 시기를 오가는 것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사실상 노동의 시기는 자양분을 얻는 원천으로서 실업 시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 운동을 지지한 사회당 소속의 파리4구청장 크리스토프 지라르는 지난해 10월 사회당 전당대회 전날 보편소득의 점진적인 도입을 제안했다.(9)
법제화 과정에서 상당 부분 축소되긴 했지만, 1988년 미셸 로카르 정부의 최저통합수당(RMI) 도입 당시, 사회가 구성원에게 기본적인 생존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의회 내 토론의 중심을 이루었다. 법안 취지 설명을 맡은 장미셸 블로르제를 위시한 일부 좌파 의원들은 '사회 통합 효과'를 RMI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수당을 얻기 위해 심사를 받아야 하고 반대급부의 제공을 약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권리'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10) 실업자들이 시위에서 외친 "먹고살 돈을 달라!"는 단순한 구호 역시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물자 부족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 비굴해질 필요가 없어야 한다.
극좌파의 경우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이 판이하게 갈린다. 기본소득 지지자끼리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기본소득 제안은 일반적으로 반자본주의 좌파가 제안해온 프로젝트와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본소득 개념이 수용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설사 수용과 도입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인 간의 신뢰가 만들게 될 변화
기본소득의 1차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데 있다. 이는 북반구뿐 아니라 역시 기본소득 활동이 진행 중인 남반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개도국에서는 경제활동이 더욱 활성되고, 선진국에서는 다소 진정될 것이다. 이는 생태주의자들이 기본소득에 관심 갖는 이유 중 하나다. 서구사회에서는 실업과 불안정 고용 상태로 인한 고통, 취약한 주거 환경, 워킹푸어가 사라지고, 일부 급여 생활자는 일터에서 겪는 육체적·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철폐되는 것은 아니며, 일부에서 최대임금 도입(11)을 병행하자고 주장하겠지만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기본소득 제안이 너무 온건하다고 보는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자 클로드 기용은 저서에서 '보장주의'(Garantisme)라는 표현으로 이를 비꼬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반란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며, 배부른 상태에서 정치를 논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한다.(12)
기본소득은 불의의 질서를 전복하고 정의로운 질서를 세우는 대신, 해니와 슈미트의 영화 부제처럼 '문화적 자극'을 주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시장 외부에서 이뤄지는 활동이 주목받고 고무될 것이다. 그 결과로 이어지는 전환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미래가 선택권이 있는 각 개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반자본주의 좌파는 "빈곤층에게 자유시간이란 곧 알코올중독, 폭력과 범죄의 증가를 의미할 뿐"(13)이라는 자유주의 에세이스트 니콜라 바브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좌파가 제출하는 급진적 정책은 자주 '좋은 삶'에 대한 일률적인 정의에 기초한 것은 사실이다.
<기본소득>의 프랑스어 버전에 해당하는 영화를 만든 스위스 활동가 올리비에 시저는 이런 논리를 거부한다. 한때 68혁명 이후 알프드오트브로방스에 세워진 농업공동체 '롱고 마이'(Longo Maï)에서 활동한 시저는, 조심스럽게 "혁명적 전위, 디데이를 준비하는 엘리트가 되기 위한 그 암묵적 전제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보장소득은 그와 반대로, "일단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그들 대신 사고하지도 않고, 그들이 따라야 할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이런 변화는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머리와 가슴, 배에 통증을 느끼고 신진대사가 힘들어질 지경이 되기를 바란다. 오랜 세월 아무 생각 없이 일터로 향하던 그들에게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그 과정을 통해 어떤 결과에 도달할지 보고 싶다."(14) 보장소득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것이 임금·고용 개념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동자운동은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조직돼왔다. 노동자는 일터에서 착취에 저항하는 수단을 연마했고, 유급휴가에서 사회보장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도를 쟁취했다. 하지만 1906년 아미앵에서 발표된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의 목표 중에 '임노동 철폐'가 포함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노동계와 그들에게 협력하는 정파의 처지에서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 사고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심지어 이단적인 태도로 간주됐다. 국제금융과세연대(ATTAC) 회원 경제학자 장마리 아리베는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노동이 사회 통합의 근본 매개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노동이 각 개인에게 한 인간, 생산자, 시민이 될 자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15)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노동을 방어하기 위해 보장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과정 속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애매함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일할 권리'는 인권선언문 안에 명시돼 있다. 그러나 해니와 슈미트는 영화 속에서 질문한다.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권리라는 것도 있는가?"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일부 임금노동자는 일터를 떠날 수 있고, 일하기를 원하는 실업자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생존이 문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와의 협상에서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된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분야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반 파레이스와 야니크 반더보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장기간 파업이 지속될 때 보장소득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 상상해볼 것"을 권한다.(16)
기본소득 지지자 중에는 임금노동에 분명하게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는 이도 있다. 탈성장론자(밀롱도와 유토피아 운동 등)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일자리가 피고용자에게 자존감, 공동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느낌을 주기는커녕 그 반대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한다. 설사 일자리가 만족을 준다고 해도, 기술적 진보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어차피 모든 이에게 일자리가 돌아가지도 않는다. 공제 시스템을 확장해 모든 이에게 평생 무조건적으로 소득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르나르 프리오 역시 이런 분석에 동의한다. "장학관으로서 공공교육을 해체하는 데 앞장서거나 몬샌토에서 재생 불가능한 종자를 생산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는 '영광의 30년'에나 가능했던 완전고용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뒤, "1960년대에 달성됐다고 주장된 완전고용은 사실은 남성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17)고 덧붙인다.
게으른 매미, 부지런한 개미 또는 수분하는 꿀벌
이탈리아 노동자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에 영향받은 프랑스의 얀 물리에부탕, CARGO의 공동 창립자 로랑 기요토 등은 임금노동 비판의 근거를 카를 마르크스의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개념에서 찾는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에서 마르크스는 "역사 속에서 사회 전체에 의해 축적된 지식이 가치 창출의 중심이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자율주의자들은 우리가 비물질 경제에 진입함으로써 이미 그 시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폭력적 방식으로 갈수록 더 기생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바깥에서 발전된, 그 담지자들에게서 분리될 수 없는 역량을 전유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의 역량을 실현하기 위해 더 이상 자본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의 핵심적 생산 과정은 고용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물리에부탕은 느긋한 '매미'와 부지런한 '개미'(라퐁텐 우화에 등장하는 동물들) 사이에 '꿀벌'이라는 제3의 유형을 추가한다. 꿀벌의 수분(受粉) 활동은 직접적 가치를 생산하지 않지만, 그것 없이는 다른 어떤 생산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은 평범한 일상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다른 이들의 노동으로 빌어먹는 무능한 '구호 대상자들'이라는, 데마고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폭로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앙드레 고르는 이 논리를 보장소득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하는 것은 함정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럴 경우 "노동가치와 생산주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소득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기본소득은 '화폐화할 수 없는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18)
기본소득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해 굳이 '일반지성'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1796년 기본소득 개념의 창안자 중 한 명인 영미권의 혁명적 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모두의 것인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한 이들은 당연히 보상금을 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 보상금이 바로 기본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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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모나 숄레 Mona Choll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http://le-revenu-de-base.blogspot.fr.
(2) Yann Moulier-Boutang, <L’Abeille et l’Economiste>(꿀벌과 경제학자), Carnets Nord, Paris, 2010.
(3) 2013년 프랑스 국민의료보험(Sécurité sociale) 예산법안, 별항 5.
(4) 취업청(Pȏle emploi)은 노동시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대신 지금과 완전히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5) Baptiste Mylondo, <Un revenu pour tous: Précis d’utopie réaliste>(모두를 위한 소득: 현실적 유토피아 개론), Utopia, Paris, 2010.
(6) Yannick Vanderborght & Philippe Van Parijs, <L’Allocation universelle>(보편수당), La Découverte, coll. ‘Repères’, Paris, 2005 참조.
(7) André Gorz, <Misères du présent, richesse du possible>(현재의 비참, 가능의 부), Galilée, Paris, 1997.
(8) Jean-Paul Maréchal, ‘Revenu minimum ou “deuxiéme chéque”?’(최소소득 혹은 “두 번째 수표”?), 1993년 3월호. Ignacio Ramonet, ‘L’Aurore’(서광), 2000년 1월호. Yoland Bresson, ‘Instaurer un revenu d’existence contre l’exclusion’(사회적 배제에 대항해 존재소득을 도입하자), 1994년 2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89년 존재소득 도입을 위한 협회(AIRE)를 창립하고 BIEN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브레송은, 기본소득 금액을 너무 적게 책정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고 보장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우파’로 분류됐다.
(9) Christophe Girard, ‘Ma contribution pour le congrès du PS, pour un revenu social garanti’(사회보장소득을 위한 사회당 전당대회 연설), www.huffingtonpost.fr, 2012년 9월 4일.
(10) Laurent Geffroy, <Garantir le revenu: Histoire et actualité d’une utopie concréte>(소득 보장: 구체적인 유토피아의 역사와 현재), La Découverte, coll. ‘Bibliothéque du Mauss’, Paris, 2002.
(11) Sam Pizzigati, ‘Plafonner les revenus, une idée américaine’(최고소득, 상한을 정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2월호.
(12) Claude Guillon, <Economie de la misère>(비참의 경제), La Digitale, Quimperlé, 1999.
(13) ‘Les 35 heures? Violence conjugale et alcoolisme!’(35시간 노동제? 가정폭력과 알코올중독!), www.acrimed.org, 2003년 11월 15일.
(14) Revenu garanti, ‘la première vision positive du XXIe siècle’(보장소득, 21세기에 등장한 최초의 긍정적 시각), www.peripheries.net, 2010년 12월.
(15) Baptiste Mylondo, <Un revenu pour tous: Précis d’utopie réaliste>(모두를 위한 소득: 현실적 유토피아 개론), Utopia, Paris, 2010에서 인용.
(16) <L’Allocation universelle>, op. cit.
(17) Bernard Friot, L’Enjeu du salaire, La Dispute, coll. ‘Travail et salariat’, Paris, 2012. 고용 관련 통계에 여성과 농업 종사자들의 노동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Margaret Maruani & Monique Meron, ‘Contes et mécomptes de l’emploi des femmes’(여성노동, 그 실상과 착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2월호 참조.
(18) André Gorz, <L’Immatériel>(비물질), Galilée, Pari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