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정부 그리고 ‘정당한’ 빈곤
Dossier 기본소득제, 멀지 않은 유토피아
정부의 경제정책은 과연 사회 변화를 부추기는 추진제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단순한 질서 유지의 도구인가?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 수단은 양날의 칼과 같다. 국유화의 결과로 부가 공유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적자가 사회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금 또한 타깃이 빈곤층을 향할 경우 갈취의 수단이 되지만, 반대로 부유층을 겨냥하면 재분배 효과가 나타난다. 기본소득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정책을 시행하며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이 누구냐에 따라, 해당 정책은 국민을 시장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도 있고, 반대로 이 시장의 법칙으로 저들의 폐부를 찌를 수도 있다.
밀턴 프리드먼이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라는 개념을 내세워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제안한 방식은 솔직히 B급 정책에 해당한다.(1) 그에 따르면 정부는 특정 소득 수준 이하의 사람들, 자유주의자의 표현대로 '빈곤 한계선' 주위의 이 사람들에게 정해진 액수를 지급하고, 납세자가 내는 세금의 총액은 정부가 지급하는 수당의 총액을 넘어선다. 1970년대 미국의 여러 주정부가 실시한 이 자유주의 형태의 최저생계 소득보장제도는, 당시 파리 이공대 출신의 두 학자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서 화두로 떠오른다. 미국 쪽 사정에 정통하며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의 자문위원까지 된 두 사람은 바로 리오넬 스톨레뤼와 크리스티앙 스토파에였다. 특히 크리스티앙 스토파에는 1973년 기획위원회 주관으로 '부의 소득세 연구 그룹 보고서'까지 작성했다.
1978∼79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연(2)에서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짚어본 철학자 미셸 푸코는 부의 소득세가 어떻게 완전고용의 목표에서 벗어나게 될 통치 방식에 해당하는지 입증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논리는 경제를 하나의 게임으로 인식하며 여기에서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제정하고 그 규칙의 적용을 보장한다. "정부가 최저생계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이 게임에 임하는 파트너가 게임 머니 전체를 잃어버리는 상황은 아예 생길 수 없고, 아울러 그 때문에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그 누구도 잃을 게 전혀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정부가 경제적 보호막을 쳐주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푸코의 관심을 사로잡으며 그를 매료시킨다(적어도 두 가지 중 하나에 푸코의 눈이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는 여기에 도덕적 판단이 배제됐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빈곤의 결과에만 초점을 두지 그 원인은 고려하지 않는다. 스톨레뤼의 표현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에만 근거하고 있으며, 어디에서 문제가 비롯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3) 따라서 기본소득제도는 '정당한' 빈곤층과 '부당한' 빈곤층을 전혀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전통적 사회정책과 단절된다. 푸코는 "일단 누군가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 미만의 사회계층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를 사람들은 별로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알아서도 안 된다. 그가 중독자인지 자발적 실업자인지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다"라며 흥분된 어투로 말한다. "국가는 그저 일정 수준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만족하고 더 멀리 바라보지도 않음으로써, 행정적 조사나 탐문·심문 등에 대해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은 이들이 다시 그 한계선 미만으로 내려가도록 부추긴다. …설령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도,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사람은 계속 정부 지원을 받는 기초수급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부의 소득세는 유럽에서 전후 수립된 사회정책과도 단절된다. "전체적 차원에서의 소득재분배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 정책의 색깔을 띠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 주안점을 둔다면, 신자유주의는 절대 빈곤을 제한하는 데 주력하고 불평등 문제는 외면한다. 사회는 특정 한계선을 기준으로 가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될 뿐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 한계선 위로는 경제적 메커니즘 속에서 게임을 하도록 방임한다. 경쟁 메커니즘과 기업 메커니즘 속에서 저마다 게임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그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하나의 기업이 돼야 한다. …이 특정 한계선 이하의 사람들은 일종의 고용 부동층이다. 완전고용 목표를 저버린 경제구조 속에서 언제라도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영속적인 인력 보유고가 되는 것이다."
완전고용에 기반을 둔 체제보다 관료주의적 성격과 규율 권력주의적 성향이 덜한 이 자유주의적 원조 체제는 우파가 기본소득을 무기로 한 도구라는 양상을 띤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원할 경우 일할 가능성을 남겨두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들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다면 일을 맡기지 않을 가능성 또한 열어두기 때문이다.
막상 정책이 시행되고 나면 언제나 강제성을 드러내는 게 자유주의 사상의 신물 나는 실체다. '하르츠4' 체제를 실시하는 독일에서든, 실질연대소득제도를 실시하는 프랑스에서든 정부는 늘 극빈자 수당 수령자에게 이들이 '정당한' 빈곤층으로서 악의 없이 순수하게 극빈자 수당을 받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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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Milton Friedman,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e et liberté), Robert Laffont, Paris, 1971(1962).
(2) Michel Foucault, <생체정치학의 탄생: 1978∼79 콜레주드프랑스 강연>(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79), Gallimard-Seuil, ‘고등연구’(Hautes Etudes) 컬렉션, Paris, 2004. 이후 인용문도 이 책에서 발췌.
(3) Lionel Stoléru, <선진국에서의 빈곤 퇴치법>(Vaincre la pauvreté dans les pays riches), Flammarion, Paris,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