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대지진 3년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에서 발생한 진도 7의 강진으로 2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국제사회가 한 일이라곤 실수로 콜레라균을 퍼뜨리고 노동권을 무시하는 기업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포르토프랭스의 폐허 위로 땅거미가 지는가 싶더니 금세 사위가 캄캄해진다. 저 멀리 사거리에 걸린 붉은 신호등 불빛 말고는 앞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눈길이 미치는 곳마다 잔해가 가득 쌓여 있다. 거리를 점령한 개들이 이따금씩 울부짖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깬다.
날이 밝자 거리는 온통 자동차 엔진 소리로 가득하다. 새벽 햇살 속에서 자동차들은 인구 과잉의 이 카오스 같은 도시 속을 재주껏 비집고 다닌다. 탑탑(tap-tap·승합택시)들은 웅덩이를 피해 연신 커브를 돌아야 한다. 거리에 그대로 흘러다니는 하수의 악취에서 죽음의 냄새가 느껴진다. 폐허의 먼지가 뒤섞인 바람이 그 냄새를 산 사람들의 얼굴 위로 뿜어진다. 아이티인들은 묵묵히 초현실적인 시간을 살고 있다. 실종자들은 아직 그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웅덩이를 피해 우회할 때마다 시멘트 더미 속에 갇힌 주검들을 상상한다.
리히터 규모 7도의 강진이었다. 핵폭탄 여러 개가 지하에서 폭발할 때와 맞먹는 충격이었다. 2010년 1월 12일, 지진이 지나가고 남은 건 전체 가옥의 3분의 1뿐이었다. 이쪽 집은 창문 하나 깨진 데 없이 멀쩡한데 옆집을 보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식이었다. 말 그대로 우연의 장난이었다. 그 결과 23만 명이 죽고, 30만 명이 다치고, 130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물질적 손실은 78억 달러에 달했다. 2009년 아이티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지만 복구 작업은 진척이 없어 보인다. 불도저와 로더 등의 장비는 제 나라로 돌아간 지 오래다. 대신 다양한 색깔의 비정부기구(NGO) 티셔츠를 입은 남성 몇 명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이 속도대로라면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예상할 수 없다.
도시 전체가 온통 텐트촌이다. 여기저기 찢기고 때가 탄 텐트들이 다닥다닥 붙은 속에서 이재민 37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NGO 활동가들은 짐을 싸서 떠났다. 폐허로 변한 수km에 달하는 지역을 파란색 텐트들이 빼곡히 뒤덮은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칼로 텐트를 찢어 창을 만들어 살인적인 더위를 견디고 있다. 해질 무렵 한 여성이 자동차들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몸을 씻고 있다.
국제사회의 지원 약속 중 상당수가 지켜지지 않았다. 2012년 9월 말 유엔아이티특별대사사무소(OSE)에 따르면, 2010년 3월 미국 뉴욕에서 결정된 53억7천만 달러의 구호기금 중 절반이 조금 넘는 액수만 집행됐을 뿐이다. 원래는 2012년 가을까지 모두 지급됐어야 하지만,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공공기관이 없다는 이유로 집행이 미뤄졌다. 이른바 '국제사회'라는 편리한 익명하에 아이티 재건사업이 진행됐지만, 각 주체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진척이 느려진 것이다. 더욱이 재건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구호기관이나 해외투자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진행됐다. 한마디로 아이티를 자유무역국가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2011년 5월 취임한 아이티 대통령 미셸 마르텔리가 내건 슬로건 하나에 모든 상황이 함축돼 있다. "아이티는 투자자들에게 열려 있다."
클린턴위원회? '거대한 농담'
아이티 지진 발생 직후, 세계은행 지원금 승인을 위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장막스 벨레리브 전 아이티 총리를 공동의장으로 하는 임시아이티재건위원회(IHRC)가 설치됐다. 그러나 2년 뒤, 이 모든 게 거대한 농담임이 밝혀졌다. 영국의 NGO 옥스팸이 2011년 1월 6일 낸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IHRC는 '우유부단과 늑장 대응의 소굴'이었다. 2011년 말, IHRC의 임무가 종결되고 아이티재건기금(HRF)이 그 뒤를 이었다. 아이티 정부, 경영자단체,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IDB), NGO들이 운영하는 이 기구는 국제 지원을 얻어내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 2010년 1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출범한 '클린턴-부시 아이티 펀드'는 2012년 12월 31일자로 사업에서 손을 뺐다. 이 펀드에 모인 돈 중에서 5400만 달러가 아이티에 지원됐다. 그 결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르누벨리스트>의 로베르송 알퐁스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들은 지원금이 생산적인 분야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그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흑백을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다."(2012년 12월 7일) 자금 지원이 뜸해지는 상황에서,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2012년 11월 7일 아이티를 떠나면서 "아직은 아이티 지원을 그만둘 때가 아니다"라며 지원을 호소했다.
기부금 운영위원회 내부에서 각국은 자국 기업들의 이익을 방어하느라 여념이 없다. 소규모 프로젝트들이 전체적 비전 없이 산만하게 추진되는 이유다. 그중 절반은 자금 부족으로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 현재 아이티는 외국 기업들의 새로운 엘도라도가 돼버렸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 전문을 보면, 아이티 주재 미국 대사 케네스 머튼은 이를 두고 '골드러시'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미국은 벼랑 끝에 몰린 아이티의 상황을 이용해 자국 기업의 배를 불린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가령 IHRC의 지원금 2억6700만 달러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미국 기업들이 따낸 계약만 1500건에 달한다. 반면 현지 기업이 가져간 계약은 20건에 불과하다.
모든 재건 프로젝트는 우선 클린턴 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한 뒤 세계은행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IHRC 내에 반부패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2011년 3월에 이르러서였다. 그 사이 이미 전체 프로젝트의 3분의 2가 승인을 받았다. 더욱이 100만 달러 이하 규모의 프로젝트들은 심사에서 제외됐다.
대통령 주변의 독재 잔당들
계약을 따낸 기업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보수가 지급되거나, 유령 학교를 세우거나 하는 비리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벨레리브는 공동위원장 재직 당시인 2010년 11월 8일 하루에만 도미니크공화국 상원위원이 소유한 3개 회사에 8개 계약을 몰아주기도 했다. 총계약금액은 3억8500만 달러에 달했다. 르네 프레발 전 아이티 대통령은 비난 여론이 들끓는 분위기 속에서 임기를 마쳤다.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1) 지원금 중에서 수백만 달러를 빼돌려 2011년 자신의 후계자 쥐드 셀레스탱 후보의 대선 자금으로 유용한 혐의 때문이다.
많은 젊은이가 아직도 마르텔리 현 대통령의 선거 유세용 분홍색 팔찌를 착용하고 다닌다. '스위티 미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콤파스(아이티 댄스음악) 가수 출신의 마르텔리는 무상교육, 부패 척결과 치안을 공약으로 서민들의 표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 독재자 뒤발리에와 가까웠던 인물들과 약 10년 전 마약 거래에 연루된 경찰들까지 포함된 그의 측근들에 대한 의심이 확산되고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마르텔리 대통령 측근들이 연루된 광범위한 아동 인신매매 조직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마르텔리 대통령은 캐나다의 지원하에 '16/6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공공 광장을 점유하는 이재민들에게 각각 2만 구르드(약 52만 원)를 지원해 16개 지역 6개 캠프로 분산 수용하는 계획이다. 그러나 때로 철거 과정에서 폭력이 동원된다. 더욱이 이 정도의 지원금으로는 빈민가 변두리나 산비탈 같은 곳에 판잣집 하나 짓기도 힘들다.
그 캠프 중 한 곳인 델마스의 하늘에 번갯불이 번쩍인다. 어둠 속에서 순간적으로 눈빛들이 빛난다. 강도 무리일지 모른다. 이곳은 무법천지다. 무기를 들이대면서 행인들 주머니를 털거나 경찰서가 코앞에 보이는 텐트 속으로 여성을 끌고 들어가 성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12년 11월 12일에 나온 국제인권연맹(FIDH) 보고서는 "치안 불안이 심각하다"고 경고하면서 "이 상황은 전혀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며, 국제사회의 결정에 끌려다니는 아이티 정부의 정치적·경제적 선택이 낳은 결과"라고 분석한다. 유엔 소속의 한 감독관은 "지진 이후 범죄율이 100배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비상트네르 지역. 한 남자가 비틀대며 걷다가 도로에 주저앉는다. 행인들은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져 몸을 떨고 있는 그를 외면하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자동차들이 그를 피해가도록 누군가 그의 주위로 나무 막대를 걸쳐놓는다. 항구의 반대편, 포르토프랭스에서 가장 큰 빈민가인 시테솔레이에서는 진흙 파이를 사려는 사람들의 긴 줄이 보인다. 한 여성이 오랫동안 버터를 섞은 진흙을 반죽하고 있다. 수백 개의 파이가 햇빛에 마르고 있다. 20살의 제프는 막 잠에서 깬 얼굴로 아픈 배를 움켜쥐며 웃는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하루 3번 먹는다." 저 멀리 넓은 공터에서 젊은이들이 맨발로 공을 차며 뛰어다니는 게 보인다.
아이티 전체 부의 85%를 독차지하는 소수의 엘리트들- 전체 인구의 3%- 은 포르토프랭스의 고지대에 모여 산다. 번쩍거리는 4륜구동차 속 그들의 상큼한 얼굴은 후텁지근한 바깥 공기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들은 가능하면 저지대의 비참한 풍경을 마주치지 않으려 길을 돌아간다. 하지만 빈민가는 갈수록 확장돼 곧 그들의 창문 앞까지 밀고 올라올 기세다. 작가 리오넬 트루이요가 분노에 차서 말한다. "마르텔리 대통령의 문제점은 자선 정책만을 펼친다는 데 있다. 그는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립할 능력이 없다. 그의 측근들은 인민을 경멸하는 독재의 아들들이다.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에게 없던 것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공평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구조적 기초 위에서 불평등한 부의 분배를 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문제를 외면한다. 이 나라의 가난이 NGO들과 경제권력에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이티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상점에 불과하다!"(2)
뒤발리에 독재 치하에서 수많은 고문이 자행됐던 '포르디망슈' 감옥 터에는 유골이 즐비하다. 벽에는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귀환을 환영합니다!"라는 낙서가 눈에 띈다. '피의 독재' 시대가 지금보다 나았다는 뜻일까? 가난을 면할 수만 있다면 피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일까? 전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아들, 일명 '베이비 독'(Baby Doc)으로 불리는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25년 동안 프랑스에서 비참한 망명 생활을 해오다 귀국해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재판으로 그는 면죄부를 받고, 스위스 계좌에 묶인 600만 달러를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함석판으로 얼기설기 이어붙인 집들이 태양빛에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 사이로 흘러가는 쓰레기의 강 위로 검은 돼지들이 몰려다닌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이런 조건에서라면 언제라도 콜레라가 창궐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10년 10월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 7400명이 죽고 62만 명이 감염됐다. 시테솔레이 지역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감염됐다. 가난한 지역일수록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콜레라균의 진원지는 네팔 평화유지군으로 알려졌다. 아이티인들은 실책을 인정하지 않는 유엔에 분노하고 있다.
잔해 더미로 가득한 길가에 밤이 온다. 피 묻은 셔츠 하나가 눈에 띈다. 억울하게 숨진 이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 아이티의 수호성녀 알타그라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포르토프랭스 곳곳에서 할렐루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신앙의 힘으로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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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셀린 라팔리 Céline Raffalliy 언론인.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중남미에너지동맹(페트로카리브) 협정에 따라 베네수엘라는 아이티에 우대 가격으로 석유를 제공하고 발전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2) Raoul Peck의 다큐멘터리, <죽음의 원조>(Assistance mortelle·2013) 참조. http://assistance-mortelle.arte.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