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군인들의 슬픈 블루스

2013-05-13     도로테 티에노

지난 4월 22일 프랑스 의회가 말리 파병 연장안을 가결하면서, 말리에 1천여 명 규모의 ‘지원군’을 ‘항구적’으로 주둔시키기로 확정했다. 국제지원군도 북부 키달에서 차드군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말리군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군기강, 전투력, 병사 양성. 이 군대에는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지난 3월 초 북부 복귀를 앞둔 가오 주둔 말리군 사령관이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지난 1월 11일 말리 북부 지역에 군사개입이 시작된 이후 전문가들은 저마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실 프랑스와 차드를 비롯한 외국 군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말리군은 아무런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구, 특히 아프리카의 지원이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말리군은 반군의 공격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지원군의 힘을 빌렸다. 향후 한동안은 상당 규모의 외국 군대가 말리에 장기 주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말리군은 현재 큰 혼란에 휩싸여 있다. 내부 분열이 심각하고, 다양한 사유의 불만이 여기저기 터져나오고 있다. 세르발 작전 이후 많은 장교와 하사관이 사적인 자리에서 "신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다면 전쟁이 끝난 뒤 군복을 벗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

군 내부에 위기감이 고조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1993년 알파 우마르 코나레 대통령이 타만라셋 평화협정(1)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고 북부 투아레그족의 독립 의지(2)를 잠재우기 위해, 수백 명의 반군 병사를 말리 정규군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최초의 군사 통합은 현역 군인들에게 그다지 좋은 추억을 남기지 않았다. 가령 1994년 '편입 병사들'이 정부의 말에 의심을 품고 무기를 탈취해 달아났다. 1996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이때도 말리군 병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부의 타협과 그로 인한 결과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정규군은 10년 가까이 편입군과 불안한 동거를 지속했다. 2006년 이야드 아그 갈리- 5년 뒤 투아레그족을 모아 과격 이슬람 단체 '안사르딘'('이슬람 수호자'란 뜻)을 창설한 인물- 와 가까운 '편입 병사들'이 여러 북부 조직 사이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비난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23일, 키달 정규군에 복귀한 편입 병사들이 반군을 도와 말리군 기지를 급습하고 다시 투아레그족 지도자가 있는 사막으로 되돌아갔다. 말리군 병사들의 처지에서 볼 때 이는 너무 심한 배신이었다. "우리는 10년 동안 모든 것을 함께했다. 밥도 같이 먹고, 차도 같이 마셨다." 한 말리군 하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옛 전우들이 직접 칼라슈니코프 총을 들고 동료 6명을 사살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마두 투마니 투레 정권은 말리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3)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은 오히려 반군에게 회유책을 쓰기까지 했다. 정규군으로 되돌아온 병사들을 말리군에서 제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진급시켜줬다. 한 말리군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2006년 오랜 망령이 되살아났다. 그간 정규군 군인들은 정부가 반군을 말리군에 편입하고 계급을 나눠주는데도 꾹 참아왔다. 정부는 시종일관 타마셰크족(4)을 정치적으로 다루었다. 심지어 할당제까지 도입하며 그들에게 특혜를 줬다. 키달에 주둔할 병사들을 지역 내에서 모집했다. 하지만 원래 군인이란 조국 전체를 수호하는 자가 아닌가. 결국 이런 일들은 정규군 병사들의 사기만 저하시켰다."

2012년 똑같은 원인이 불씨가 되어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반군은 정부가 독립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약속했던 지방분권을 이행하지 않는 데 불만을 갖고 다시 독립을 요구했다. "모든 무기를 소지한 자들에게 공동의 적은 오로지 하나, 바로 국가를 대표하는 말리군"이라고 아브두르하마네 당벨레 대령이 개탄했다.

장교 10명 중 9명이 세습 장교

2012년 1월 말, 키달 북쪽에 주둔한 아겔호크부대에서 끔찍한 참극이 발생했다. 아자와드해방국민운동(MNLA)과 안사르딘을 포함한 북부 무장조직 출신의 군대가 말리군 80명을 학살한 것이다. 그중에는 참수를 당한 병사까지 있었다. 하지만 투레 대통령은 또 2006년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북부에 주둔 중인 말리군들은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지켜보며 또다시 모멸감을 느꼈다.

2012년 3월 22일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투레 정권이 무너졌다. 하지만 정치 지도층은 쿠데타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많은 이들이 군사 쿠데타를 필요악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신뢰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분리독립의 위기에 처한 한 나라에 질서를 회복할 만한 정치적 해법(과도정권·국민투표·선거)은 전혀 없었다.(5) "나도 이번 쿠데타를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고 아겔호크 학살 희생자를 직접 땅에 묻는 일을 거든 한 말리군 중사가 말했다. "학살극이 일어났는데도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병사들이 개죽음을 당했는데, 정작 우리 편에 서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도 바마코의 하층민과 청년층도 바마코 인근 카티 부대에서 시작된 쿠데타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돼도 군인들의 운명은 개선되지 않았다. 쿠데타 세력이 내건 약속(군의 위상을 떨어뜨린 자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군사장비와 무기 등을 새로 도입하기로 함)은 영영 실현되지 않았다. 말리군 규모는 400~800명의 병사로 구성된 8개 대대가 전부였다. 말리군이 군비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리군의 위기가 단순히 장비 부족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좀더 뿌리 깊은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군부 지도자로 등극한 아마두 하야 사노고는 측근들을 여러 치안조직의 수장으로 앉혔다. 하지만 외국 지원군이 말리에 파병된 이후 그는 순식간에 세력이 약화됐다. '국방치안개혁관리군사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단 사노고는 결국 전투장 밖으로 멀리 내쳐졌다. 그리고 임명 6개월이 지난 지난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위원장직에 공식 취임했다. 이 기간에 군부 지도자 사노고는 말리의 주 기지인 세바레를 단 한 차례 방문했다. 2012년 1월 11일 격렬한 저항 끝에 패배한 코나전투 직후 사노고는 전투 공적과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장병들에게 계급을 나눠줬다. 북부 주둔 정규군 병사들은 이런 '계급 잔치'를 부당한 처사로 여겼다. 역사는 이렇듯 다시 반복됐다.

바마코 출신의 보카는 "사막 한복판에서 반군과 마약밀매 조직의 공격에 노출된 채 힘겹게 북부를 지키기 위해 땀방울을 흘리지 않은 자는 결코 우리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3년 전에 군대 생활을 시작한 이래 대부분의 시간을 키달, 테살리트 등 말리 북단에서 보냈다. 시카소, 카티, 세바레 등 안락한 남부 주둔지에 비해 이 지역의 군 생활은 상당히 고됐다.

2012년 3월 쿠데타 이후, 군은 25일 이상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에게 5만 세파프랑(종전에는 6천 세파프랑)(6)의 전쟁포상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보카는 "문제는 돈이 아니라 불공정성이다"라고 일갈했다. "병사들의 능력에 맞는 계급 배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장교 10명 중 9명은 장교의 자녀, 즉 세습 장교다." 그들은 일종의 특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낙하산 인사에 신물이 난 하사관들은 그들을 무시하기 일쑤다.

수메일로 부베예 마이가 전 국방장관은 전쟁터에서 패배한 군사들이 지속적으로 군을 이탈하는 현상을 말리군이 현재 작전을 수행하거나 최전선에 투입될 능력이 없음을 방증하는 예라고 지적했다. 그는 "군이 무슨 관료 집단처럼 돼버렸다"고 비판했다. 전투 능력도 없고, 크고 작은 밀매로 먹고살 정도로 군인 봉급도 형편없다는 것이다.(7)

이브라히마 아히루 당벨레 대령도 "군이 때로는 실제 전투나 훈련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교정기관 내지는 교육기관으로 여겨질 정도"라고 개탄했다. 장교들이 권위를 유지하는 데 더욱 애먹는 이유는 부하들에게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병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전쟁포상금이 지연되거나, 봉급이 체납되기 일쑤다. 그나마 봉급도 쥐꼬리만 하다. 이등병의 초봉은 5만5천 세파프랑(약 80유로)에 불과하다. 13년차 중사 역시 월 13만 세파프랑밖에 받지 못한다.

족벌주의와 형평성 결여로 군 사령부는 병사들 사이에 정당성을 잃고 끊임없이 위상을 위협받고 있다. 군사학교나 장교양성학교가 전무한 탓에 말리는 지휘관을 제대로 양성할 만한 여건이 안 된다. 가령 한 교관은 자신이 가르치는 장교들 가운데 지도상의 좌표를 읽거나 거리를 계산할 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라고 회고했다.

북부 주민은 그동안 자국 군대를 믿지 못해 간다코이, 간다이조, 말리북부해방전선(FLNM) 등 자위군 민병대를 조직해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수백 명의 민병이 현재 1994년 투아레그족 편입 때와 동일한 조건으로, 대다수가 나이가 많은 상황에서 기존 연령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말리 정규군에 편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군대가 주민 버리고 먼저 도망쳐

아마두 투마니 투레는 그동안 자신의 영향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북부군과 남부군 사이는 물론 '그린베레'(사노고 대위가 소속된 군대)와 공수특공대 '레드베레'(장성 출신의 대통령 투레가 소속된 군대) 사이의 대립을 조장해왔다. 레드베레는 2006년 이후 미국과 프랑스의 방침에 따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더 좋은 무기와 더 많은 보수를 받고, 더 우수한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다른 말리군 병사들 사이에 질시하는 눈길이 따갑다. 2012년 4월 30일 레드베레가 바마코에서 반쿠데타를 시도하며 레드베레와 그린베레가 충돌했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죽고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다.

지난 1월 북부 지역을 재탈환한 뒤 북부 부대들로 복귀한 말리군들은 끔찍한 만행(8)을 저질렀다. 이는 과격 이슬람주의자들(모든 불행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타마셰크족 배신자들)과 그들의 공모자로 인식되는 일부 송가이족(북부 지역의 다수족)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말리군은 부패한 국가만큼이나 자신들이 지켜야 할 북부 지역의 주민들을 경멸하고 있다. 경멸하기는 상대편도 마찬가지다. 가오 지역 주민들은 2012년 3월 31일 군복을 벗어던지고 민간인을 내버려둔 채 홀로 달아난 말리 병사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지난 1월 26일에는, '서아프리카 통일과 지하드를 위한 운동'(MUJAO) 소속 반군들이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말리군은 몇 달간 점령하는 사이 자칭 '전략적 후퇴'를 되풀이해왔다. 하지만 이는 주민들 사이에 평판만 떨어뜨릴 뿐이다. 말리가 평화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군이 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병사들은 감정을 분출할 곳을 찾기보다 먼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최근 몇 달간 승전보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리군이 참여해 신뢰할 만한 화해 프로세스를 구축하지 못하면 결국 평화로운 말리의 모습은 허황된 신기루로 끝나고 말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와 아프리카 군대, 그리고 향후 유엔 평화 유지 임무를 위해 파병될 1만2600명의 '유엔군'은 생각보다 더 오래 말리에 주둔하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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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테 티에노 Dorothée Thiéno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알제리의 중재로 1991년 1월 6일 타만라셋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키달·가오·통북투, 이 세 지역의 무장이 해제됐다.
(2) 니제르와 알제리에도 거주하는 투아레그족은 말리 전체 인구의 4%를 차지한다. 키달지구를 제외한 북부 지역에서 소수를 차지한다.
(3) Jacques Delcroze, ‘가물거리는 말리의 민주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9월호.
(4) 타마셰크는 투아레그의 동의어로, 투아레그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지칭한다.
(5) Philippe Leymarie, ‘혼란 속 말리, 관망 속 알제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월호.
(6) 1천 세파프랑=1.52유로.
(7) ‘말리의 세 가지 상처’, <르몽드>, 2013년 2월 1일.
(8) ‘말리: 병사들이 레레 지역에서 수감자들을 고문했다’, 휴먼라이츠워치, www.hrw.org, 2013년 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