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는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되었나

Spécial 대처리즘, 철녀와 마녀 사이

2013-05-13     고세훈

   
<무제>, 2010 -사라 키

대처리즘의 등장은 전후 영국 정치의 기조를 형성한 혼합경제와 복지국가적 합의정치(Consensus Politics)에 대한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한다.

전후 사반세기의 영국 정치는 노동-자본 그리고 보수-노동 정당 간의 비공식적 '양해와 배려' 위에 광범위하게 구축된 합의 체제로, 같은 기간 영국은 산업혁명 이래 가장 오랜 기간 경제·사회적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영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가중되는 국제수지 적자와 파운드 위기가 함께 가시화되고, 일련의 긴축적 기조가 불가피해지면서, 합의정치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합의적 중도 노선과 결별을 선언한 에드워드 히스가 보수당 당수로 선출됐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좀더 급진적인 시장경제로의 회귀를 표방하면서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탈합의를 천명하며 출범한 히스 정부는 집권 1년이 지나지 않아 아직 합의정치에 익숙한 언론, 여론, 당내의 반발에 부딪혀 케인스주의로 정책을 대전환한다. 이런 혼선 속에서 1973년의 원유 파동, 그리고 전후 최대 규모의 광부 파업과 뒤이은 비상사태 선포, 전력 공급 제한 등 일련의 사태는 영국 사회를 극도의 혼란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히스는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가?'라는 구호와 더불어 의회를 해산했지만, 1974년 연이은 두 차례 총선에서 패하면서 해럴드 윌슨의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정치적으론 사실상 거의 무명이던 마거릿 대처가 보수당 당수로 선출된 것은 이듬해인 1975년이다. 전통 보수당 정치에서 하층 중산계급의 여성이 당수가 된 것은 당내 정치의 역학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원래 보수당에서 당수는 소수의 당 원로들- 통상 '매직 서클'로 불리는- 의 막후 조정에 의해 결정됐다. 그리고 전통적인 귀족이나 대상공인 가문, 명문 사립고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 당수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보수당은 1965년 당수의 선출 과정을 개방해 원내 보수당으로 하여금 당수를 선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는데, 같은 해 새 규정에 따라 선출된 첫 당수가 목수 아버지를 둔 공립학교 출신의 히스였다. 보수당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5년에는 당수의 지위와 관련해 좀더 민주적 개방을 추진해 현직 당수나 총리도 보수당 의원에 의해 교체하게 만들었다. 이 새로운 규정에 의해 현직 당수 히스를 몰아내고 새 당수로 선출된 인물이 식료품상 딸에, 역시 공립학교 출신인 대처였다. 히스가 비록 실패했지만 합의정치적 기조에서 처음으로 이탈을 시도한 것이나, 대처가 신자유주의적 소신 정치를 줄곧 밀고 나간 것은 당내 민주화가 가능케 한 보수당 당수의 변화된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1976년 윌슨이 사임하고 새롭게 총리가 된 제임스 캘러헌은 최악의 경제 상황을 물려받았다. 같은 해 영국은 선진국으로는 처음으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그것도 당시까지 가장 큰 규모로 구제금융을 받았으며, 뒤이은 긴축정책으로 인해 정부와 노조 간에 체결한 일련의 사회 협약은 파탄에 이르렀다. 1978~79년에는 공공부문의 대규모 파업으로 얼룩진 '불만의 겨울'이 영국 사회를 덮쳤다. 영국인은 찬란했던 대영제국이 '유럽의 병자', '제3세계로 퇴행하는 최초의 선진국'이라는 오명과 함께 몰락하는 현장을 자조와 절망감으로 지켜봐야 했다. 결국 1979년 5월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캘러헌의 노동당 정부를 퇴진시키고 보수당의 대처를 새로운 총리로 선택했을 때, 전후 합의 체제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영국 정치사에서 가장 과격한 정치적 유턴을 실험하게 될 '대처리즘' 혹은 '대처혁명'이 막을 올리게 된다.

대처리즘의 내용과 성격

우리가 대처 정부의 정치적 행태를 구태여 총리의 이름을 빌려 '대처리즘' 혹은 '대처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대처 개인의 정치 스타일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받았기 때문이다. 대처는 정책 과정을 총리 중심의 사인화된 체제로 변모시켰다. 총리관저의 '정책단'이 확대 개편되고, 당이나 내각보다 당 내외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우익 '싱크탱크'들이 그의 노선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데 동원됐다. 주요 경제정책을 재무부(다우닝가 11번지)가 아닌 총리관저(다우닝가 10번지)가 주도하면서, 당의 공식 정책기구나 내각의 '공동 책임의 원리'는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과거 보수당의 고참 정치인 로드 헤일셤은 '선출된 독재'의 위험을 경고한 바 있지만, 영국 정부 역사에서 당과 내각이 총리와 그 측근에 의해 이처럼 무시된 것은 처음이었다.

사인화된 정책 과정은 합의정치에서 전면적이고 과격한 이탈을 구조적으로 용인했다. 히스 정부의 실패한 실험(유턴)을 반복할 의사가 전혀 없는 대처는 소신정치(Conviction Politics)를 단호하고도 신속하게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케인스식 총수요 관리 정책의 포기, 공공지출 삭감, (부자) 감세, 통화주의와 금융자유화, 민영화, 탈규제, 투자 유인 확보를 통한 공급 측 경제 논리, 관료와 노조 권한의 감축 등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핵심인 정책이었다.

자유시장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처의 신뢰는 무엇보다 통화주의, 그리고 부자 감세와 지출 삭감 등 공급 측 경제학이 중심이 된 경제정책에서 명료하게 드러났다. 특히 통화 공급과 인플레이션의 인과적 관계를 경직적으로 사고한 대처에게 "인플레이션은 항상 어디에서나 화폐적 현상"이라는 밀턴 프리드먼의 언명은 종교적 계명 혹은 자연과학적 법칙 이상의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통화주의의 단순하고 낙관적인 메시지는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검증된 바 없지만, 그것을 하나의 도그마 차원으로 승격시킨 대처에게 이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통화량 통제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인플레이션은 점차 상승했다. 대처가 퇴진할 무렵 고이자율이 수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으로 인해 국민총생산(GNP)과 제조업의 산출량은 급감했고, 실업자는 집권할 때의 130만 명에서 200만 명 이상으로 급등했다. 초대 내각의 온건파로서 대처에 의해 축출된 I. 길모어가 "불행히도 대처의 통화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론으로서 죽음보다 더욱 비참한 운명, 즉 그것이 실천에 옮겨졌다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고 통탄한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대처에겐 시장이야말로 부의 유일한 창출자였고, 시장 자유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사부문의 확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녀는 대체로 세 가지 방식, 곧 정부 서비스의 외주, 정부 활동의 탈규제, 정부 소유 기업이나 자산의 민간 매각을 통해 민영화를 추진했다. 무엇보다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한 국유산업 매각은 전후 합의 체제가 용인했던 국가주의와의 가장 노골적이고 상징적인 단절이었다. 대처 정부의 공기업 매각은 집권 11년 동안 총 65만 종업원의 17개 거대산업을 민간으로 이전시킬 정도로 억척스럽고 공격적이었다. 또한 소득세의 최고 한계세율을 83%에서 40%로 대폭 낮췄을 뿐 아니라 자본이득세와 자본이전세의 기준선을 상향 조정하고 기업세는 52%에서 35%로 대폭 낮췄다. 또 역진적 효과의 간접세인 부과가치세는 오히려 10%가량 증가시켰다. 대처 퇴진 무렵에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더욱 악화됐다.

노조운동을 경제적 질환으로 본 대처

대처의 반국가개입적 도그마는 노동시장과 관련해 혹독하게 적용되었다. 그녀에게 노조운동은 영국 경제를 인플레이션, 낮은 경쟁력, 낮은 생산성, 파운드의 가치 절하, 저성장, 그리고 다시 훨씬 큰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에 빠지게 하는 원흉이었으며, 사회 혼란의 원인제공자이고 '영국병'의 근원이었다. 1970년대 이후 3개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노조운동으로 인해 침몰했다고 인식한 대처는 집권 11년 동안 무려 8개의 (반)노조 입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영국 노조운동을 사실상 괴멸시켰다. 대처 정부는 집권 직후인 1980년대 초, 철강업과 인쇄업의 파업을 연이어 패퇴시킨 바 있다. 그러나 1984~85년의 광부 파업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을 때, 그것은 지난 한 세기 영국 노조운동을 주도하던 '무적의' 광부노조, 그 찬란한 연대의 역사를 종식시켰을 뿐 아니라 영국 노사관계의 풍토가 변화하는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사상 초유의 노조 불인정 캠페인이 기업주들에 의해 전개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노조의 인정 여부와 단체협약의 준수 여부도 기업의 자율에 맡겼는데, 1984~90년에만 9%의 작업장에서 노조 결성이 불허되었고, 노조를 인정한 작업장 수는 40% 이하로 격감했다. 1990년 대처가 퇴임할 때에 이르면서, 제3자 개입은 금지되었고 '클로즈드숍'(비노조원 취업 불능)은 폐지되었다. 파업을 위한 조합원 비밀투표(80% 찬성)는 의무조항이 되었고, 단체행동을 이탈하거나 그에 반하는 조합원의 자유행동이 용인되었으며, 파업으로 인한 손실에 관해 사용자 제소가 (1906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가능해졌다. 특히 조합원의 파업 전 비밀투표는 대처의 각별한 소신이 광범위하고 치열한 '노조 반대의 맹위를 뚫고' 쟁취해낸 전과였다. 1979~90년 노조조직률은 52%에서 42%로 격감했고, 파업은 4600회에서 630회로 무려 85% 감소했고, 파업 참가자는 200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역시 85%나 감소했다. 대처 이후 지금까지 영국은 미국을 제외한 선진 산업국가 가운데 노조권력의 총합지수가 가장 낮고, 그녀의 노동정책은 노동자-자본의 권력 균형을 자본 편향적으로 확실하게 이전시킴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의 관철을 위한 든든한 지반을 제공했다.

복지국가를 사회주의로 매도한 대처에 따르면 국가 주도의 복지 체계는 개인의 선택 폭, 즉 자유를 줄이고 사부문의 자원을 핍진시키며 인플레이션 등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의존 문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그녀는 복지 다원화 혹은 민영화의 이름으로 무려 8개의 복지 관련 입법을 통해 국가 복지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급부 요건이 강화되었다. 실업급부는 과세 대상이 되고, 주택급부는 대폭 삭감되고, 의료처방비는 인상되었다. 유아급부는 동결되고, 연금은 소득 아닌 인플레이션에만 연계되게 하고, 보충급부는 소득 지지로 대체되었다. 복지 지출의 외형적 수치에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영국 복지 체계에서 국가 역할이 '잔여적'인 데 불과하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지면서, 기존 계층화가 오히려 심화되거나 급부 대상자의 시장 재편입을 강제하는 재상품화 효과가 두드러졌다. 대륙 국가에 비해 국가 복지의 계급적 기반이 취약했던 영국의 복지 체제는, 이제 더욱 취약해진 제도적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게 되었다. 가령 훗날 토니 블레어 정부의 '일을 위한 복지' 전략이 대처주의가 정해준 틀 안에서 구상된 것이란 비판이 그래서 가능하다.

1990년대 중반 라운트리재단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대처 시대 영국 사회의 불평등 수준은 종전 이후 가장 심각한 상태였다. 사회적 갈등과 분화가 심화될수록, 그것이 폭력적으로 분출되는 빈도 또한 늘어나기 마련이다. 경제와 관련해 국가의 전면적 후퇴를 추진한 대처 정부가 법과 질서의 문제에서는 국가의 전진 배치를 강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적 보수주의가 사회적 결속의 전통적 방식으로서 국가 복지 등 온정주의적 배려를 강조한 데 반해, 대처리즘에서는 법을 앞세운 물리적 강제력에 의한 질서와 안정의 유지가 부각되었다.

실제로 대처 정부는 공공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련의 법을 통해 경찰력과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특히 경찰의 무장 형태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였다. 경찰은 이제 플라스틱 총알이나 최루가스 등 북아일랜드에서 사용하는 폭동 진압 장비로 무장됐다. 검문이나 수색, 체포, 구금 등과 관련해서도 광범위한 자율권을 행사함으로써 파업의 분쇄기구로 활용됐다. 사법부의 판결 재량권 또한 그에 걸맞게 급격히 확대되었다. 가령 사법부는 보석금의 액수를 대폭 올림으로써 노사분규 관련 '불법'을 사전에 봉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대도시에서 폭동과 테러의 급증과 함께 대중 소요의 빈도와 범죄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요컨대 대처의 '제한된, 강한 국가'가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적 권위주의는, '국가는 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는 실천적 장치'라는 좌파의 주장을 오히려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대처와 대처주의 평가

대처가 물러날 즈음 그녀의 정책 행보에 대한 불만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상태였다. 저돌적인 탈국가 조치들은 기간산업 부문뿐 아니라 복지 영역의 낙후와 쇠퇴를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인플레이션율, 실업률, GNP와 제조업산출량 등 거시적 경제지표에서 과거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대처가 당 내외의 엄청난 반발을 무릅쓰고 도입한 인두세(일명 폴텍스·Poll Tax)는 보수당 내외 정치인의 반발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중산계급이 포함된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연일 야기했다.

돌이켜보면 대처 집권시 전후 합의 체제는 이미 다양한 구조적 요인에 의해 압박받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문제는 이탈 자체가 아니라 이탈의 속도와 정도였다. 히스가 전통적 보수주의에서 '성급한' 이탈로 우왕좌왕하다가 퇴진했다면, 대처는 '과도한' 이탈로 실패했다. 어쩌면 대처가 당 내외의 무수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1년 연속 집권이라는 영국 현대사의 최장수 총리를 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역사상 어떤 영국 정부도 "북해 석유와 민영화라는 황금거위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는 지적처럼, 그녀가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좌고우면 없이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북해 석유가 주는 횡재(약 1천억 파운드)와 더불어 방대한 국유자산 매각(900억 파운드)을 통해 얻은 재정적 지원 덕이 컸다. 더욱이 대처는 야당인 노동당의 만성적 분열과 이념적 내분, 그리고 포클랜드전쟁이 자극한 민족주의적 정서 등 원군을 등에 업고 결정적 시기마다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낼 수 있었다.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대처의 말년은 고독했다. 정책 갈등으로 핵심 측근들은 대처를 떠났고, 정치적으로 소외되는 중진들이 늘어가면서 대처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패했다'는 진단이 무성했다. '선출된 독재자' 대처의 실각은 돌연히 찾아왔다. 그녀는 1940년 네빌 체임벌린이 윈스턴 처칠로 교체된 이래 반세기 영국사에서, "총선 패배나 건강상의 이유와 무관하게 강제로 퇴진당한 유일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만일 보수당 내부에서 대처의 신임을 묻지 않았다면, 아마 영국 유권자가 보수당에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며 물었을 것이다. 어쨌든 대처는 영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997년, 18년 만에 재집권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는 대처가 민영화한 국유산업과 반노조 입법, 그리고 복지 지출의 상한선 설정 등을 계승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추진한 '제3의 길' 전략은 대처주의가 만들어준 정치적 지형 위에서 추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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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연세대 경제학과 졸,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정치학 박사. 주요 저서로 <영국노동당사>,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조지 오웰>, <존 메이너드 케인스>(역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