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를 둘러싼 유럽인들의 논쟁

Spécial 대처리즘, 철녀와 마녀 사이

2013-05-13     한주연

마거릿 대처의 죽음으로 격렬한 대처리즘 논쟁이 부활했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격찬 아니면 저주로 극단을 달린다.

지난 4월 8일, 마거릿 대처 사망 후 축하파티가 열렸다거나, '딩동, 마녀가 죽었다'는 가사의 곡이 음원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치했다는 소식은 당혹스럽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선 적어도 망자에 대한 예의는 지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철의 여인'이 남긴 외상과 내상이 크다는 방증이다. 지난 4월 17일, 50여 년 전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 이래 가장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경찰 4천 명이 동원되고, 1천만 파운드의 '거국적인' 장례식 비용에 대해 영국인 과반수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거대한 장례식을 세금으로 감당한 현 정부는 비난의 과녁이 되었으며, 영국 전체가 '거국적인'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하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우리가 제대로 된 예를 취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서 영국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성대한 장례식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캐머런 총리는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대처주의자다"라고 답했다. 대처 전 총리가 남긴 족적은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악덕을 미덕으로 만든 마녀였다"

대처 전 총리의 타계를 맞아 급히 열린 영국 국회 특별토론회는 1980년대로의 이상한 시간여행이었다. 일간지 <더 인디펜던트>는 "대처 추종자들이 대처 퇴진시 느끼던 씁쓸함, 경탄, 호의가 국회의 대처 추모 특별토론회에서 다시 쏟아져나왔다. 대처 시대의 증오도 마찬가지였다. 대처가 이뤄놓은 공과는 잊히지 않았다"고 썼다. 하지만 현재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1980년대 광산노동자, 아일랜드공화군(IRA) 등에 대해 논쟁했다. 보수든 좌파든 대처의 유산에 대해 논쟁하면서도, 현재와 관련시키지 않았다. 지나간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녀에 대해 논할 뿐 의회의 비판은 추상적 수준에 머물렀다. 좀더 과격한 비판은 노동당 소속 글렌다 잭슨 의원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대처의 임기는 이 나라와 내게 가장 가증스러운 사회적·경제적·정신적 피해를 입힌 시대였다. 대처리즘은 탐욕, 이기주의,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악덕을 미덕으로 탈바꿈시켰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 대처리즘이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대처 총리의 파마머리같이 변함없는 그녀의 사상과 함께 대처는 한 이데올로기를 창안했다. 그것은 바로 실패에도 꿋꿋이 번성하고 있는 대처리즘이다. 민영화 찬양, 금융 규제 완화, 노동법 유연화, 노동조합에 대한 엄청난 공격 등을 말한다"고 현재 세계 곳곳의 대처리즘의 존재와 영향력에 대해 썼다.

대처가 1979년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성했을 때 영국 경제는 바닥이었다. 1977년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차관을 끌어와야 할 지경이었고, 한때 열강이던 영국의 자존심도 바닥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 총리는 민영화, 자유화, 노동조합 무력화 등을 강행했다. 금융시장의 고삐를 풀어 런던은 유럽 금융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로써 대영제국의 몰락기가 끝나고 30년간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대처 총리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자본주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금융 규제 완화와 민영화로 대변되는 대처리즘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맞으며 설득력을 잃었다. 이제 금융 규제 완화만으로는 부족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기반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이제 영국 국민의 소득 격차가 너무 커져서 오히려 경제개혁이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대처 개혁의 재개혁이 시급해졌다. 1989년 동유럽 붕괴 때 많은 동유럽 국가가 독일이나 북유럽 복지국가보다는 영국을 모델 삼아 정책을 세웠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대처와 레이건만이 세계경제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대처리즘의 정신적 선구자다. 유감스럽게도 유럽도 계속 이 콘셉트에 따라 산다. 자유무역 구역, 주권국가들의 연합이 그 예다. 이 연합조차 창립 당시 계획한 좀더 긴밀한 공동체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대처가 칼 같은 단호함으로 관철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시장의 유연화였다. 구부러져야 할 유연화를 꼿꼿한 비타협주의로 이뤄낸 것이다. 이처럼 그녀가 이루려 한 개혁은 또 다른 모순을 안고 있고, 모순적 결과를 낳았다. 원래 보수 성향인 그녀가 채택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보수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대처가 관철한 정책은 기존 가치를 보전하는 보수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개혁이었다. 대처의 정치 스타일은 엄격하고 진지했는데, 그때까지 영국 보수주의자에겐 그런 직설적인 스타일이 낯설었다. 약간의 반어와 유머 코드가 들어간 대화를 즐기는 영국 상류층에겐 대처의 돌직구 스타일이 불편했다.

결국 대처 전 총리의 단호함으로 이뤄진 개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에 문화적으로 큰 변동을 가져왔다. 미국의 작가 마이클 루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레이건과 대처가 같은 기조로 행한 개혁은 미국보다 영국에 급격한 변동을 가져왔다. 원래 상업적인 것과 거리가 먼 영국의 기존 문화 환경이 크게 변했다. 원래 변화가 적고 보수적인 영국 사회는 대처리즘을 통해 성공과 물질에 가치를 두는, 고상하지 못한 미국식 사고방식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 영국 귀족 엘리트의 가치관은 새로 등장한 엘리트층 투자은행가의 가치관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무한경쟁 시대로 내몰린 공격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영국 국민의 의식구조와 문화는 더욱 급속도로 변화했다. 이런 와중에 시장개혁에서 승리해 벼락부자가 된 신흥부자들이 기존 귀족을 미국적이고 시장경제적 방식으로 압도했다. 대처 총리의 보수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모순된 결과다. 대처는 자신의 개혁과 보수주의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보수주의가 설파하는 내적 금욕이 경제활동을 하는 각 개인에게 자기규제와 책임의식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자유시장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주의는 바로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를 스스로 파괴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의 사상을 내건 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는 좌파와 노조뿐만 아니라 보수적 전통주의도 마찬가지로 공격한 결과가 됐다.

대처리즘이 영국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가차 없는 경쟁 분위기로 생긴 에너지가 사회·문화적으로 역동적 분위기를 양산해냈다는 것이다. 저소득층과 민생을 돌보지 않은 대처리즘이 수많은 라이프스타일을 태동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금융시장이 번성하며 서비스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수많은 인종의 엘리트가 런던으로 이주하며 문화의 다양성을 더했다. 이제 영국엔 미술, 패션, 디자인, 건축, 음악, 요식업, 저항문화까지 번창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문화예술계가 마거릿 대처에게 품는 증오의 골은 깊다. 문화예술계의 투자를 삭감해 예술가들은 더욱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수많은 저항미술가가 대처 모양의 섹스 장난감을 만들거나, 대처 얼굴을 우스꽝스런 커리커처로 그렸다. 대처에 대한 증오는 예술 창조로 승화한 예가 많다. 가령 사회복지가 더 이상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 없던 1988년, 당시 미대생 데미언 허스트가 기획한 전시회는 화제를 일으켰다. 일군의 젊은 영국 아티스트들이 지원 부족으로 약해지는 미술계의 상황을 참신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표현했다. 영화·문학·연극·음악계에서도 대처리즘을 비판하는 작품이 쏟아졌다. 영화감독 켄 로치는 "영국 경제구조 중 청소년들이 도제로 노동세계에 통합되는 노동관계가 파괴되었다. 도제를 통해 청소년들은 책임감을 배우고, 또 노동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갔다. 마거릿 대처는 이런 노동관계를 파괴했다.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과도기를 없애버린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가수 엘튼 존이 2006년 내놓은 크리스마스 캐럴송 가사 중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매기 대처/ 우리 모두 오늘을 기념해요/ 당신의 죽음이 더 가까워오는 날이니까요"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종종 대처와 비교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메르켈은 대처와 얼마나 닮았을까? 대처가 사망한 후 독일 언론이 대처와 메르켈을 비교했다. 여성의 몸으로 유럽 강국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올랐으며, 보수당 소속이라는 점에서 둘은 끊임없이 비교당한다. 두 사람 모두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대처는 화학, 메르켈은 물리학 전공이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아마 자연과학에서 훈련된 객관적 세계관에서 이성적 실용주의를 얻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실용주의가 성공적 정치의 비결이라는 거다. 대처의 아버지는 잡화점을 운영했지만, 설교에 능한 기독교인이었다. 메르켈의 아버지도 동독 시절 목사였다. 이런 환경에서 두 여인은 어릴 때부터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기술을 터득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판 '철의 여인'?

하지만 두 나라의 정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의 행동 방식이 다른 것은 우선 두 나라의 정치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처가 이끌던 영국의 정치 환경에선 강한 정부와 극단적 결정이 힘을 발휘했다. 반면 현재 메르켈이 이끌고 있는 독일의 정치 환경은 야당의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런 상황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메르켈은 화해와 합의의 총리로 추앙받고 있다. 현재 메르켈은 독일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으며 올가을 선거에서 세 번째 당선이 유력하다.

또 하나 차이점은 전쟁에 대한 두 나라 국민의 다른 태도다. 대처가 포클랜드전쟁을 감행하며 인기를 얻어 3선에 성공했다면, 독일에선 2002년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라크전쟁 참전 반대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총리 재선에 성공했다. 독일에서 대처와 비견할 만한 과단성을 지닌 정치인은 오히려 노동시장 유연화 개혁을 감행한 사민당 소속 슈뢰더 총리였다. 그는 1998~2005년의 임기 동안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조를 꺾어 '어젠다 2010 개혁'을 관철했다.

대처 총리는 영국 경제가 몰락하기 직전 총리에 당선됐지만, 메르켈의 총리 당선시 독일 경제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메르켈은 독일 사민당이 제 살을 갉아먹는 심정으로 해놓은 노동시장 개혁의 양분을 자신의 공으로 흡수했다.

요컨대 반대편을 묵살하는 과단성으로 대표되는 대처 영국 총리와, 합의와 조화를 중시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는 더 이상 다를 수 없을 만큼 반대 타입이다. 대결과 갈등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메르켈은 조화와 타협에 대한 강박관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타협정치의 절대치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 최적의 것을 취하는 것이 바로 두 여걸의 공통점일 거다.

민영화와 노조 탄압, 금융 규제 완화로 대표되는 대처리즘은 지난 30여 년 동안 공산주의가 몰락한 동유럽은 물론 비서구권 후발 산업국가에서 각광받으며 수용되었다. 많은 국가정책가들이 대처리즘을 수용하면서 대처 총리가 몰락하는 영국 경제를 활성화했다는 결과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하지만 대처의 개혁 과정에서 수많은 약자가 희생되고, 보수주의자가 지키고 싶어 하는 가치 또한 무너졌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통해 금융 규제 완화보다는 오히려 제조업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구조가 더 잘 버틴다는 점, 사회복지가 강한 북유럽 모델이 위기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대처리즘을 이 시대 모범 이데올로기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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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주연 자유기고가. 독일 빌레펠트대학 문학 석사. <한겨레> 베를린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