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딜레마에 갇힌 평양, 끝나지 않을 기싸움

2013-05-13     임을출

   
지난 3월 8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연평도 포격'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한겨레 제공

북한 김정은 정권에 핵무기는 체제 유지의 핵심 수단으로 간주된다. 북한은 핵무력에 대해 '민족의 생명', '통일 조선의 국보'로 규정했다. 이제 '핵 없는 북한'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무엇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정권'을 공동운명체로 묶어놓았을까.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과의 오랜 대결과 이에 따른 장기적 국제 고립의 산물이고, 갈수록 벌어지는 남북 간 국력 격차, 나아가 북한 경제 파탄의 산물이다. 미국과의 대결 국면이 심화될수록, 경제가 어려울수록, 남북 간 격차가 벌어질수록 체제 안전의 담보인 군부의 입김이 세지고, 대외 강경책을 통해 대내 결속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핵개발은 대미·대남 관계의 돌파구를 여는 핵심 카드로 여기는 것이다.

북한은 올해 한-미 군사훈련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한 뒤 미국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가 부과되었고, 한-미 군사훈련이 잇따랐다. 북한은 군사적 대응 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높였고, 이 경쟁의 소용돌이에 남북한 유일한 소통과 교류의 상징이자 향후 통일을 대비한 장대한 실험의 장이던 개성공단은 속절없이 날아가버렸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빌미로 북한이 남한 노동자의 개성공단 출입을 막은 지 꼭 한 달 만이다. 북한 노동자 5만3천 여 명의 출근을 중단시킨 지 24일 만이다. 북한은 나아가 오는 8월 예정인 한-미 합동 '을지 프리덤 가디언' 연습까지 문제 삼고 나섰다. 북한은 애초 '개성공단은 북한의 달러박스'라는 언론 보도와, '북한이 공단 근로를 인질로 잡으면 구출작전을 벌이겠다'는 김관진 국방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고 사과를 요구한 바 있다.

북, 근본적인 관계 재설정 요구

북한의 '최고존엄'인 지도자 김정은과 김정은 정권 사수를 뛰어넘는 절대가치란 있을 수 없다. 개성공단은 버리기 아까운 카드이지만 절대가치를 훼손당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북한은 표면적으로 한-미 연례 군사훈련에 대응하면서 전시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려다보니 개성공단 통행을 막게 되었고, 이른바 '최고존엄을 헐뜯는' 남한의 언론 보도 내용을 문제 삼아 북한 노동자들을 먼저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비즈니스 차원이 아닌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한 개성공단의 정상화는 당분간 힘들 듯하다. 이에 따라 남북관계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남한 체제와 내부에 관한 문제를 이유로 개성공단의 존폐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지속한다면 개성공단 가동 재개라는 희망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 정권은 출범 초기만 해도 '경제강성대국 건설'을 내세우면서 주민 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건설에 매진할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에도 나름대로 일관된 메시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김정은 정권이 경제발전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뜻을 내비친 사례는 적지 않다. 김정은은 2012년 4월 15일 첫 공개연설에서 '주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직접 읽은 2013년 신년사에서는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2013년 <조선신보>(1월 2일)는 "위성발사, 그다음 단계의 목표는 이미 예고돼 있다"면서 그 목표가 "주민들이 생활 속에서 실감할 수 있는 경제 부흥 구상의 결실을 맺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3년 1월 29일 당세포비서대회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제국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주도권을 더욱 확실히 틀어쥐게 되었으며,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에서 전환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되었다"라고 연설했다. 2013년 2월 12일 외무성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자위적 핵억제력에 의거해 경제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 힘을 집중하려던 것이 우리 목표였다"고 밝혔다. 지난 3월에는 '정전협정 무효화', '1호 근무태세', '전시상황 돌입', '개성공단 폐쇄' 등 연일 긴장 수위를 높이던 북한이 10년 만에 경공업대회(3월 18일)를 열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김정은은 "경공업전선은 농업전선과 함께 현 시기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투쟁에서 화력을 집중해야 할 주 타격 방향"이라며 "일촉즉발의 첨예한 정세가 조성된 속에서도 경공업을 올해 경제건설의 주 목표로 삼은 이유는 인민생활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과 생활력을 과시하며, 조국통일의 혁명적 대사변을 앞당기기 위해서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대한 의지는 전례 없는 높은 수위의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면서 많이 퇴색돼버렸다. 지난해 12월 로켓 실험 발사의 성공 이후 북한은 미국 주도의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에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군사적 긴장 수위를 장기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왔다. '핵 불바다', '제2의 조선전쟁', '핵 선제타격' 같은 표현도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공식 문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북한 주요 매체가 이를 연일 인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다.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보다 더 모험적이고 도발적인 언행을 구사한 점이나, 특히 미국을 겨냥해 본토 타격까지 언급하는 등 정면대결을 불사하는 태도는 분명히 아버지 김정일과 다른 점이다. 북한은 이제 이전같이 적당한 선에서 미국과 타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을 겨냥해 앞으로 비핵화 회담은 없다고 선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김정은 정권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양국 관계의 근본적인 재설정이다. 북한은 핵억지력을 넘은 핵타격을 주장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핵보유 국가임을 선언했고, 따라서 북한은 북-미 관계를 '핵보유국 대 핵보유국'의 관계로 정립하면서 핵보유국 간 한반도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하기를 희망한다. 북한은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면서 핵협상의 초점을 비핵화에서 군축으로 전환하려는 기존 입장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개성 카드' 유혹 끝내 뿌리치지 못해

미국이 북한의 이런 주장과 처지를 존중하거나 수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의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고 궁색할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31일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나온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은 이런 북한의 처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북한은 향후 국정 운영 방향을 시사하는 당 중앙위 전원회의 결정문에서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을 거론하며 "자위적 핵무력을 강화·발전시켜 나라의 방위력을 철벽으로 다지면서 경제 건설에 더 큰 힘을 넣겠다"고 밝혔다. 과거 할아버지인 김일성 시대의 '경제·국방 병진노선'이 사실상 경제를 희생하면서 국방부문 투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듯이 '경제·핵무력 병진노선'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제재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우리에게 항시적으로 핵위협을 가해오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는 핵보검을 더욱 억세게 틀어쥐고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억척같이 다져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대미·대남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국가의 제한된 자원을 핵무력 증강 부문에 우선 배분시켜 경제발전 지연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이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통해 '핵무기'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과시했으나, 이 두 상극의 목표는 김정은 정권의 딜레마를 잘 보여주면서 또 한편으로 험난한 미래를 예고해주는 것이다. 체제 고수를 위한 개성공단과 같은 실리 프로젝트를 걷어차버리면 고립과 폐쇄가 뒤따를 것이고, 이에 따라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다. 사실 핵은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고립을 심화시키는 핵심 요소이고, 경제발전을 제약하는 최대 변수이다.

그래서 개성공단 완전 폐쇄를 둘러싼 북한의 고민은 아직 끝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북한이 보여준 일련의 처지를 보면,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체류인원 전원 철수 조치를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도 공단 완전 폐쇄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더욱이 북한은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중대 조치'를 운운하던 지난 4월 27일과 달리 우리 측의 대화 제의와 철수 조치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도 구구절절이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입장을 잇달아 내놓았다. 중앙특구지도개발총국의 발표뿐 아니라, 지난 4월 26일 나온 국방위원회 정책국 담화에서 "이명박 정부 때도 살아남은 개성공단을 박근혜 정부가 폐쇄 수순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시한 대목에서도 북한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북한은 개성공단 잠정 중단 조치를 먼저 취했다. 그들은 우리 정부가 노동자들을 불과 한 달을 넘기지 않고 빠르게 철수시키는 초강수 대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한마디로 허를 찔린 셈이다. 한-미 연합 독수리훈련이 종료된 이후 대화 분위기를 만들어 공장 가동을 재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은 개성공단에 대한 우리 정부와 언론의 잘못된 인식과 평가를 바로잡고, 공단 가동 재개 후에는 개성공단의 확대 발전을 위한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잠정 중단 카드를 활용하려 한 것이다. 북한은 그들이 주장하듯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전시상황에서도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지키려 했던 개성공단을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제2의 오판 가능성 상존

때마침 한국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4월 29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강력한 억제에 기인한 것으로 강해야 할 때는 강하고, 유연해야 할 때는 유연한 정책"이라고 밝힌 점이 주목을 끈다. 이는 상당 기간 '강대강 대응'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번 우리 정부의 정공법 대응이 보여주듯, 북한이 어떤 도발 카드를 내놓으면 우리는 좀더 강한 카드를 내놓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북한에 끌려가지 않고, 지금까지의 악습을 뜯어고치면서 우리 주도로 남북관계의 질서를 재편성해나가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확고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연속적인 일관된 발언 속에 담겨 있다. 미국을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핵보유는 용납할 수 없으며 도발시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 대목에서도 재확인된다. 그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다른 날개인 '대화의 문'도 열어놓고 있음을 강조했다. 다만,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한마디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도발과 고립의 길을 단념하며 올바른 선택을 할 경우 남북경협, 나아가 국제사회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지원까지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보내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 내외적 체제 위협 요소가 상존한다고 믿는 상황에서 스스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개성공단 잠정 중단과 같은 유사한 오판을 다시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 정권은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결의를 거의 매일 다지면서 병진노선을 이론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개성공단과 관련해서도 북한의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은 5월 5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개성공단의 운명은 남측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면서 공단 정상화를 위해서는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와 군사적 도발을 먼저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적으로 북한의 경제 회생을 위한 결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개성공단을 희생해서라도 핵무력에 기대어 체제와 명분을 사수하겠다는 북한의 처지가 바뀌지 않는 한 남북한 간, 그리고 북-미 간의 지루한 기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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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부교수. 경남대 국제정치학 박사.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역임. 현재 경실련 통일협회 정책위원장, 통일부 남북협력지구지원단 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