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의 반항아, 리노 브로카

2013-05-13     베르나르트 아이젠시츠

1970년대 필리핀에서는 독재정권과 순수 오락영화가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영화감독 리노 브로카는 예술적 측면과 정치적 영역에서 좀더 비평적인 관객을 양성하기 바랐다. 이런 야심찬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전복적인 정신과 유행 장르에 대한 지식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이끄는 세계영화재단이 올해 필리핀영화개발위원회와 손잡고 리노 브로카의 대표적 걸작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ynila: sa mgaKuko ng Liwanag)(1975)를 복원한다. 1991년 타계한 시네아스트 리노 브로카가 마침내 오랜 망각의 세월을 딛고 부활한다. 그동안 브로카는 복사본을 맡은 자들의 무성의한 태도로 인해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지내왔다.

필리핀 영화계는 줄곧 대량생산을 고집해왔다(연간 150~200편 제작).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작품의 질이나 영구성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바키아'(Bakya·'하류'라는 뜻으로, 원래는 나무로 만든 필리핀 전통 신발을 지칭함)로 인식되는 관객층을 위해 장르영화, 멜로드라마, 코미디, 청소년 뮤지컬, 애정물, 007류 액션영화 등을 대대적으로 쏟아낼 뿐이었다.(1) 과거 필리핀 영화는 높은 세금 부담과 할리우드·중국·인도 수입 영화의 공세, 오로지 미국산 영화에만 폭력과 섹스 장면을 허용하는 군사정권의 엄격한 검열 등에 시달렸다. 그런 환경에서 1970년대 전까지 필리핀 영화가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재집권 시기에 이르면서 필리핀 영화계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갈망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시대적으로나 미학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브로카는 새로운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1939년 태어난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필리핀 국교인 가톨릭교에 대한 반감으로 모르몬교로 개종한 뒤 나병촌에서 2년 동안 선교 활동을 벌였다. 또한 실험적인 연극연출가로 활동하며, 필리핀 현대 작가는 물론 테네시 윌리엄스나 아서 밀러 등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기도 했다. 그가 처음 영화를 찍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이었다. 1965년 집권한 마르코스(1917~89)가 베니그노 아키노(1932~83)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 시기였다. 마르코스는 재집권하자마자 곧바로 아키노를 감옥에 보냈다. 이후 아키노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오던 길에 공항에서 암살범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다.

같은 시기에 셀소 아드 카스티요(1970년 첫 영화를 찍음), 이스마엘 베르날(1971년 첫 영화를 찍음), 마리오 오하라(브로카 감독의 시나리오작가이자 배우로 1975년 데뷔), 마이크 드 레온(<마닐라>의 제작자이자 촬영감독으로 1976년 첫 영화를 연출),(2) 로리스 기옌, 마릴루 디아즈 아바야 같은 신예감독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그들은 필리핀의 어두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필리핀의 오스카상'에 해당하는 파마스(FAMAS)상을 받으며 유명 감독의 반열에 오른 브로카 감독도 금기시하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가령 1971년작 <금도금>(Tubog sa Ginto)에서는 동성애 문제에 천착했다.

필리핀 뉴시네마의 기수

미국 영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브로카는 결코 누벨바그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는 장르영화와 원하는 작품을 번갈아가며 쉴 새 없이 만들어댔다(그는 한 해 5~6편을 찍었다.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중간에 2년을 쉬었지만 금세 다시 복귀했다. 계엄령은 9년간 지속됐다). 그것은 나름의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현세대에 속하는 두 시네아스트가 말하듯,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류 필리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류 필리핀 관객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라야 마틴)이었다. "그는 교육자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민중을 교육했다."(라브 디아즈)(3) 브로카는 1974년 이렇게 썼다. "현재 '하류'에 머물러 있는 우리 영화를 예술성을 겸비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한발 한발 조금씩 변화를 모색하며 만족할 만한 수준의 관객을 창출하는 길뿐이다. '영화산업의 발전'은 결코 타협을 통해 얻어서는 안 되고, 타협을 통해 얻을 수도 없다. 오히려 줄기차게 투쟁해야 한다. 우리 영화 고유의 전통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것에 절대 속박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 곁에 있는 소재를 열심히 탐구해야 한다. 필리핀 관객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4)

브로카의 영화 제작 방식이나 작품 세계는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특히 유능하고 실험정신이 강한 협력자들과 팀을 이뤄 작업하는 스타일이나, 자신이 직접 발굴한 아마추어 연기자를 가르쳐 스타 배우와 함께 영화에 기용하는 방식, 사회상을 추적하는 데 열중하는 모습 등이 파스빈더와 비슷하다. 가령 브로카는 작품 <마닐라>, <인시앙>(1976), <재규어>(1979)에서 마닐라 빈민가의 모습을 추적했다.

브로카의 작품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모티브로 한다. "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위해 마닐라로 온 뒤 빈민가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잡거 생활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사람들은 성관계를 가지기 위해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라고 시켰다. 잡거 생활은 매춘의 온상이 되었다."(5) 브로카는 이런 말도 했다. "빈민가는 저항이 아닌, 불신과 물욕, 순응주의를 살찌우는 자양분과 같았다. 빈민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도덕적 장벽이 무너지고,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됐다."(6) 가령 <재규어>에서는 사람들이 밥 먹듯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영화 줄거리는 일반 대중이 거부감을 느낄 만큼 잔혹하다. 그럼에도 감독은 마닐라 빈민가로 재현되는 '지옥으로의 하강'이라는 익숙한 줄기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령 <재규어>, <마닐라>, <마초 댄서>(1988)는 시골에서 상경한 한 청년이 일자리를 찾다 타락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가 하면 <인시앙>, <보나>(1980), <안젤라 마르카도>(1983)는 여성의 복수를 주제로 다룬다. 브로카의 작품은 모두 성적 지배와 착취라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모든 주인공이 나름의 이유를 지닌 평등한 존재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착취자는 카메라 앵글 밖에 남는 것이다.

의문의 교통사고 죽음

브로카의 영화는 필리핀에서 흥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닐라>는 미래 수많은 영화감독에게 강력한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훗날 국제 무대에서 필리핀 영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독립영화 감독으로 성장한 브리얀테 멘도사(2009년 <키나테이>로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이다. 라브 디아즈도 브로카의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영화가 그저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감독이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교수님께서 영화 <마닐라>를 보고 감상문을 써내라고 했다. 영화를 본 뒤 친구들과 나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우리는 새벽까지 커피를 마시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영화가 우리 내면의 뭔가를 깨어나게 했다. 마르코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독재정권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 <마닐라>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독재정권 타도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7)

브로카는 투사까지는 아니어도 사회문제에 매우 참여적인 감독이었다. 그는 정치범 출신의 시나리오작가들과 함께 작업했다. 대통령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는 그가 나라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질책했다. 베니그노 아키노의 암살을 계기로 브로카는 반독재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가령 필리핀 내 상영 금지 처분에도 불구하고 몰래 칸영화제에 출품한 작품 <나의 조국>(Bayan ko·1984)에서그는 첫 장면에 극중 인물들의 시위 모습을 담았다. 이 영화는 '착취'라는 문제를 특히 정치 참여와 폭력을 통해 이야기한다. 극중에서 노동계약서에 파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한 인쇄공은 시위에 참여하는 대신 동료와 강도 행각을 벌인다. 이런 교훈극을 추구하는 브레이트식의 정신은 1930년대 워너 브러더스의 사회영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8) 마르코스 정권 말기 브로카는 대규모 교통 파업에 가담한 혐의로 철창 신세를 졌다.

베그니노 아키노 대통령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1986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브로카는 새 정권에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금세 잔존하는 기득세력의 힘을 확인한 그는 칸영화제 출품작 <우리를 위한 싸움>(Ora pro nobis·1989)을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브로카는 이렇게 선언했다. "코라손 아키노는 성녀처럼 존경받고 있다. 하지만 아키노의 측근들은 모두 부패했다. 아키노 본인은 정치권을 잘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정치권에 대한 통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9)

브로카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52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브로카가 남긴 영화는 모두 60여 편에 달했다.

현 15대 필리핀 대통령은 베그니노 아키노 3세다. 베그니노 아키노와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멘도사는 "현 필리핀의 상황이 예전과 달리 상당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영화계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필리핀 영화계는 대형 영화제작사의 경제적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필리핀 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자그마한 섬을 배경으로 촬영한 멘도사의 최근작 <자궁>(Sinapupunan·2012)은 한 중년 부부의 삶을 통해 '바하우'라는 필리핀 소수민족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처음 브로카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저것이 노라라고는 믿을 수 없다. 그냥 현실의 인물을 보는 것 같다. 어느새 우리는 화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만 빠져든다"고 말했다.(10) 새로운 세대에게 상당히 정치성이 짙다고 평가되는 한 시네아스트에게는 사후 최고의 극찬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음악인이자 영화인인 카븐 드 라 크루즈가 말하듯, "브로카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적이 누군지 명확했다. 하지만 오늘날 적은 불분명하다. 어떤 의미에서 내 영화는 너무 반동적이다. 브로카의 이야기는 직설적이지만 내 이야기는 모호하다. 그는 열성적인 이데올로그였다. 오늘날에 좀처럼 보기 드문 감독이었다. 일종의 체념이 스며 있다. 내 영화들은 특별한 해답을 찾으려고만 할 뿐 그다지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리노 브로카의 미학이 아닌 오히려 그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리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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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트 아이젠시츠 Bernard Eisenschitz 영화 역사가. 대표적 저서로 <작업 중인 프리츠 랑>(카이에뒤시네마·파리·2011)이 있다.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Bryan L. Yeatter, <Cinema of the Philippines: A History and Filmography, 1897~2005>, 맥팔랜드, 제퍼슨(노스캐롤라이나), 2007.
(2) Augustin Sotto, 3대륙영화제 카탈로그, 낭트, 1981.
(3) ‘A tribute to Lino Brocka’, 제47회 빈영화제, 빈, 2009.
(4) Lino Brocka, ’Philippine movies: Some problems and prospects‘, <마닐라 리뷰>, 1974년 10월.
(5) Jean-Luc Douin, ‘리노 브로카 인터뷰’, <텔레라마>, 파리, 1978년 11월 8일.
(6) Gilbert Rochu, ‘한 필리핀 영화인의 은밀한 대화’, <리베라시옹>, 파리, 1980년 5월 14일.
(7) Lav Diaz, ‘A tribue to Lino Brocka’ 중에서, op. cit.
(8) Louis Marcorelles, ‘리노 브로카의 <나의 조국>’, <르몽드>, 1984년 12월 22일.
(9) Raphael Bassan, ‘리노 브로카와 성녀 아키노’, <리베라시옹>, 1988년 11월 21일.
(10) 작가와의 인터뷰, 파리, 2012년 11월 30일.
(11) ‘A tribute to Lino Brocka’,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