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 숭배와 일렉트로닉 노이즈
싸이의 후속곡 <젠틀맨>을 놓고 미디어와 비평가의 반응이 뜨겁다. 유튜브(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3일 만에 최단시간 조회 수 1억 건을 기록하고, 발매 4일 만에 아이튠스(디지털 미디어 플레이어) 세계 1위, 전세계 29개국 다운로드 1위를 차지하는 등 <젠틀맨>이 쏟아내는 갖가지 기록은 미디어의 속보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젠틀맨>은 한동안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메인 이슈로 사라진 적이 없었고, <젠틀맨>이 만들어낸 기록과 사건에 대한 보도는 전작 <강남스타일>보다 훨씬 더 집중되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협에 따른 극도로 긴장된 남북관계도 <젠틀맨>의 위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과잉된 <젠틀맨> 기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남북관계의 긴장감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언론의 일방적 보도와는 달리, 비평계에서는 싸이의 <젠틀맨>이 누리는 미디어 효과가 정상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프레시안>에 게재된 동아대 정희준 교수의 글은 '싸이의 '포르노 한류', 자랑스럽습니까'라는 예의 자극적인 기사 제목 덕분에 더 자극적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글의 요지는 "<젠틀맨>에 대한 언론과 국민의 과도한 애국적 관심이, 이 뮤직비디오에서 발견되는 여성 비하적 행위와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성적 장면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래 'B급 문화'를 표방하고 나선 싸이의 뮤직비디오를 놓고 저질을 운운하는 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거나, "<젠틀맨> 뮤직비디오의 장면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들의 저속함에 대한 반어적 풍자를 담고 있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반대로 "이번 뮤직비디오는 <강남스타일>과 비교할 때, 창작력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선정적이어서 보기 민망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싸이는 <젠틀맨>을 <강남스타일>의 후속곡으로 내놓고 다시 왕성한 국제적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고, 언론은 매일 싸이의 글로벌 프로모션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다. 싸이가 LA 다저스 류현진의 선발 출전 경기장에 가서 <젠틀맨>에 맞춰 '시건방춤'을 추고, 라커룸에 들어가 LA 다저스 선수들과 사진촬영하는 장면을 속보로 보도한다. 지난주 빌보드 차트 2위에 랭크된 <젠틀맨>이 26위로 내려앉은 소식도 빠짐없이 보도 리스트의 반열에 오른다.
싸이는 여전히 움직이는 뉴스메이커고, 그를 보도하고 기사를 쏟아내는 미디어 역시 활기차다. 그와 관련된 선정성, 애국주의 이슈도 변함없다. 그런데 싸이의 음악과 뮤직비디오와 관련된 수많은 이슈가 이토록 많이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음악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다는 것이 놀랍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음악이 놀라운 문화현상과는 상반되게 특별히 분석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싸이 현상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싸이라는 인간과 문화현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으로서 전세계에 주목받는 뮤지션으로 단숨에 등극하고, 한국어 가사가 흥행에 큰 장애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말춤'과 '시건방춤', 여자를 놀리는 엽기적 행위가 음악보다 중요해진 상황은 싸이 음악에 대한 분석이 그다지 중요한 작업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싸이의 음악, 혹은 그의 음악에서 추구하는 사운드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성격을 미치며, 그것이 어떤 특이성을 갖는지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 분석은 단지 전문 음악비평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싸이의 음악을 듣는 많은 대중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무엇보다도 싸이의 음악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싸이의 음악을 분석하는 핵심 토픽으로 '일렉트로닉 노이즈'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무엇이며, 이 개념은 싸이 음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오늘 이 이야기를 해보자.
음악 숭배와 일렉트로닉 노이즈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바그너는 위험한가>라는 책에서, 필리프 라쿠라바르트의 바그너 비평서 <무지카 픽타>를 언급하면서 음악이 오늘날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라쿠라바르트가 말한 우상 숭배에서 음악 숭배로의 이행이 대중예술 시대의 일반적 특징이고, 음악 숭배의 최초 출발이 바그너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잠깐 음악의 위력에 대한 바디우의 언급을 인용해보자.
"음악은 우상이 되었고, 우상 숭배가 떠나간 곳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으며, 따지고보면 바그너가 이에 대해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보위, 랩 등이 출현한 것은 바그너의 자취를 따라서이다! 음악의 테러리즘적 기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바그너 탓으로 돌려진 셈이다. 이 방향을 가리키는 많은 표지들이 언급될 수 있을 텐데, 가령 음악이 이미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발상이 있다. 사실 사람들이 지니는 관습적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 살고 있고 이미지들이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점해왔다. 그러나 라쿠라바르트의 생각은 다른데,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의 정신을 규율에 따라 조직하는 데 실은 음악이 이미지보다 더욱 근본적이라는 것이다."(<바그너는 위험한가>, 알랭 바디우, 김성호 역, 북인더갭, 18~19쪽, 2012)
우상 숭배에서 음악 숭배로의 이행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첫 지표가 바그너라는 주장은 흥미롭다. 그리고 음악 숭배가 이미지 숭배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 역시 흥미롭다. 그렇다면 바그너가 왜 오늘날 음악 숭배의 근대적 원조이고, 음악 숭배가 왜 이미지 숭배보다 더 근본적일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바디우가 바그너 음악의 성격을 네 가지 역할로 설명하는 내용 중, '기술공학의 역할'과 '통일의 역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바그너 음악은 음악의 범위를 확대하고 미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기술공학적 역할을 강조했다. 바그너는 기술력으로서의 음악을 개척한 선구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적 기술은 "효과의 창출로서, 이는 음악적 기술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것을 요구하는, 예술적 배치의 내적 규범"(33쪽)인 것이다. 말하자면, 음악이 기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 대중음악에서 보면 이런 음악의 기술적 역량은 컴퓨터 기술과, 신시사이저 기술의 보급으로 훨씬 다양한 사운드 효과를 생산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통일의 역할로서, 특히 오페라에서 무한선율이라는 과다한 음악이 말의 효과를 없애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헤겔의 변중법 원리와 유사하다. "이 음악은 자신의 다양한 요소들을 빨아들여 하나의 무차별한 가락 안에 녹여버린다."(39쪽) 즉 강한 사운드 효과가 음악 내의 다양한 요소를 동일하게 만들고 전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바그너 음악에서 발견되는 이런 기술공학의 역할과 통일의 역할은 모든 멜로디와 리듬을 강하고 빠른 전자적 비트 안으로 수렴시키는 싸이류의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의 역할과 유사하다.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의 일렉트로닉한 요소는 모든 감각을 수렴하는 하나의 거대한 소음으로 존재한다. 이른바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음악의 기술적 양식과 반복적 비트의 사운드 구성, 그리고 유희적 수단이 만들어낸 우리 시대 대중음악의 지배적 스타일이 되었다.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음악 장르로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동일시되지 않지만, 기술적 수단을 공유하고 있다. 전자복제 시대에 전자적 기술은 일렉트로닉이란 음악 장르의 구성 요소에서 모든 음악을 지배하는 자원으로 확대되었다. 전자적 기술은 일렉트로닉 음악뿐만이 아니라 힙합, R&B, 발라드 팝, 심지어 트로트까지 개입한다. 음악의 전자적 기술은 이제 수단에서 목적으로, 형식에서 내용으로 전도되고 있다. 전자적 기술은 음악을 생산하는 방식뿐 아니라 수용하는 방식도 변화시켜 음악의 재생산을 지배한다. MP3, 스트리밍, 유튜브, 아이튠스 등 전세계의 음악 수용에서 보편적 형식이 돼버린 전자적 기술의 수용은 단지 수용자의 편의성·효용성만이 아닌 문화적 취향과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음악의 생산과 재생산, 창작과 수용의 과정 전체에 개입하는 하나의 문화 구성체, 문화적 코드로 정의할 수 있다.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사운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와 텍스트를 모두 포함한다. 21세기 디지털 문화를 지배하는 거대 오이디푸스적 양식이 바로 일렉트로닉 노이즈이다.
전자적 사운드의 과잉은 이미 1990년대부터 대중음악의 의미심장한 현상으로 등장했고, 이것이 댄스음악, 아이돌 음악과 연계되면서 이른바 '사운드 공해'로 이행했다. 전자적 사운드의 초석이 되는 전자 샘플링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음악의 구성요소인 비트·리듬·멜로디를 붕괴시키고, 음악적 취향의 정서와 감각을 표준화시켰다. 전자적 사운드는 음과 음의 감각을 미분·분자화하기보다는 0과 1로 적분·몰화시킨다.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말 그대로 사운드를 소음으로 변환시켜, 날카롭고 전체화하는 신경증을 양산한다. <강남스타일>의 사운드는 일렉트로닉 노이즈의 마초적 신경증을 자극한다. 말춤과 시건방춤, 그리고 그것을 집단적으로 따라하는 스펙터클은 일렉트로닉 노이즈의 시각적 풍경이다. 일렉트로닉 노이즈의 사이렌 효과, 즉 감각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표준화하는 전자적 비트의 파시즘이 오늘날 문화적 전체주의의 마취 효과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흥미롭다.
싸이의 음악에서 감지되는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대중의 보편 감각을 흥분시키고, 집단적 무의식을 호출한다. 그것은 다른 음악의 미학적 차이를 거세하려는 거대 오이디푸스적 존재로 등장한다.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에 대한 대중 심리는 일렉트로닉 노이즈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런 점에서 "이와 같은 '강남산(産) 세뇌제'가 '히트 수출 상품'이 됐다는 것 자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가 도달한 어떤 막다른 골목"이며, "여성을 상대로 해서 사회적 위상 확보 욕망부터 성욕까지 다 채워보려는 것은 남성우월주의적 사회의 가장 평범한 남성의 가장 평범한 욕구"라고 말하는 박노자의 원색적 비난만으로는 일렉트로닉 노이즈 실체에 잘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재현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근본적인 대중의 지배적 욕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만으로 모든 대중의 원초적 욕망을 설명할 수 없다.
싸이 숭배의 원리
우리가 싸이 음악의 지배적 효과를 언급할 때, 놓치는 점은 그의 노래 가사나 뮤직비디오의 영상에서 재현되는 내용이 어떤 음악적 형식으로 대중에게 소비되는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다. 근본적인 것은 가사나 영상이 아니라, 그 음악을 집단적으로 선호하는 숭배의 미학적 원리이다. 모든 멜로디와 리듬을 무력화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샘플링 비트로의 원초적 숭배가 오늘날 싸이를 숭배하는 대중의 심리이다.
모든 것을 전체화하고 거대 오이디푸스화하는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전자적 공간이 가능케 한 미시적·민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긍정적 효과,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전자적 스타일이 개성과 자유의 불시착 지점이 되는 곳, 말춤과 시건방춤의 자극적 감성이 진보의 스타일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그곳에서 일렉트로닉 노이즈의 숙주가 자라난다. 일렉트로닉 노이즈는 너무 친숙하고 일상적이어서 저항을 거세시킨다. 소음과 공해의 노이즈가 표준적 취향과 스타일이 되는 그 지점에서 싸이는 비로소 자신의 마초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 싸이 숭배의 원리는 간단한다. 대중은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의 글로벌 성공에 고무되어 애국주의를 숭배한 것이 아니다. 대중은 선정적 요소의 원리를 생산하는 일렉트로닉 노이즈를 숭배한 것이며, 애국주의는 재생산 효과에 불과하다. 싸이류의 일레트로닉 노이즈를 숭배하는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그것이 대중의 욕망이기에 그 지배적 경향을 뒤집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언제나 이미 2개의 회로를 남겨두고 있다. 그것은 비트를 넘어서는 멜로디로의 복원, 전체화하는 전자적 기술을 넘어서는 감각의 분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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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동연 문화이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영문학 박사. 저서로 <대중음악의 이해>(2012), <문화자본의 시대>(2010), <서태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99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