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 모든 것을 털어놓다

2013-05-13     목수정

스테판 에셀이 세상을 떠나던 날, 구부정한 한 노인이 자신이 직접 복사한 듯한 스테판 에셀의 사진을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길가의 공중전화 부스와 가로수에 붙이고 다녔다. 사진 위에는 'Merci'(감사합니다)라고 써 있었다. 그것은 2011년부터 시작된, 스테판 에셀이란 이 시대의 전설을 함께 만들어가던 사람들이 이제 막 우리 곁을 떠나간 그를 향해 진정으로 건네고 싶은 한마디였다. 같은 시간 바스티유 광장에는 소리 없이 모여든 사람들이 촛불을 밝히며 그가 우리 안에 지펴준 '정의'와 '자유'를 향한 불꽃을 공유했다. 눈물은 흐르지 않지만, 불꽃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더 크게 번져갔다.

95년에 이르는 충만한 삶을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불사르던 스테판 에셀. 그의 말, 그의 행동, 온화함과 장난스러움이 깃든 그의 미소는 동시대인이 함께 누린 따뜻한 선물이었다. 4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얇은 책 <분노하라>가 가져다준 폭풍 같은 열광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창을 활짝 열게 했고, 세상에 희열 가득한 얼굴로 분노를 선동하는 90대 청년을 선사했다.

100살을 일기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인류학자)가, 87살을 일기로 마거릿 대처(전 영국 총리)가 삶을 마감했다.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최근까지의 죽은 듯한 생존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야생의 삶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인류에게, 단지 끊어지지 않고 연장될 뿐인 생명은 죽은 듯한 노년의 긴 세월을 부여한다. 많은 노인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며, 고독과 무기력으로 몸과 마음이 함께 부식돼간다. 세상을 향해 타오르던 열정은 정의를 함께 실현할 동지의 배반과 세상을 뒤덮는 부조리, 아무리 저항해도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괴물의 건재를 통해 사그라진다. 그때 간신히 바랄 수 있는 건 손주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평화를 누리는 것뿐. 그렇다면 1세기 가까이 살아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새롭게 분노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환희와 열광을 주고받는 이 행복한 사나이의 삶은 과연 무엇으로 빚어진 것이란 말인가? '분노 신드롬' 때부터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스테판 에셀이었다. 90살이 넘는 나이에 쉼 없이 쓰고 강연하고, 인권을 수호하는 모든 집회와 행사에 참여하며, 아내를 향해 여전히 장난스럽고 은밀한 공모의 눈길을 반짝이던 그. 세상의 모든 소중한 가치를 짓밟던 나치에 그와 당시 젊은 세대들이 저항했듯이, 우리도 지구촌 전체에 군림하며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는 자본의 독재에 똑같이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감동적이지만 새롭거나 놀라운 말은 아니었다. 진정 놀라운 사실은, 70년이란 세월을 사이에 두고도 인간의 존엄을 가격하는 그 시대의 괴물을 직시하고 저항할 줄 아는 이 놀라운 사내의 삶이었다.

스테판 에셀이 죽기 1년 전 출간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문학동네)는 마지막 순간까지 충만한 젊음과 열정으로 1세기를 완주할 수 있었던 이 놀라운 삶의 주인공이, 자신의 비결을 풀어놓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95살까지 100% 살아 있는 삶을 누리는 비법에 대한 실용서이며, 동시에 다가올 시대에 지구라는 바퀴를 함께 굴리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손에 남기는 우리 시대 현인(賢人)의 긴 유언이다.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그는 당대 저명한 지식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최고 명문학교 파리고등사범을 졸업한다. 20대 초반 '레지스탕스 전사'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달고, 외교관이 되어 유엔에 근무한다. 외교관으로, 프랑스 대사로 순탄한 삶을 살다가, 자유인이 된 후에는 인권운동가로 제2의 인생을 누리고, 인생 말년에는 전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이것은 오로지 밝은 길로만 이어지는 영광으로 가득한 인생이었던가?

8살 때 부모가 헤어지고, 좋아하는 남자와 프랑스로 이주하는 어머니를 따라 낯선 나라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으나 독일군에게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가까스로 탈출한다.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 작성에 참여하나, 그 선언은 어디서도 법률의 효력을 갖지 못한다. 실패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끝없는 중재를 거듭해야 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에서 칠십이 돼서야 벗어난다. 불법체류자·이민자들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의 만행에 저항해 싸운다. 그러나 그의 투쟁이 확고한 승리를 거둔 기억은 별로 없다. 35년 동안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사랑해, 아내가 죽고 나서야 그녀와 재혼하지만 그때 나이는 이미 칠십.

그가 고백한 인생은 보는 각도에 따라 행운의 연속일 수도, 지독한 불운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테판 에셀은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모든 사건을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닥칠 땐 분노의 힘으로 그것을 뛰어넘었다. 분노는 그것을 딛고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용수철처럼 그를 부추겼다. 사방이 오직 절망이란 벽으로 막혀 있을 땐 어머니와 함께 읽던 시(詩)를 떠올리며 그 담장을 넘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면에 반드시 존재할 삶의 고귀함을 시는 떠올리게 해주었다. 긴 외교관 생활 속에서 매너리즘에 갇히거나 형식에 질식당하지 않고, 영감이 넘치는 자유인의 영혼으로 그를 이끌어준 것은 바로 시였다.

참여하는 삶. 작가 아버지를 둔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부러워하진 않았다. 그는 능동적으로 세상의 바퀴를 굴리는 주체가 되고 싶었다. 세상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갈 때,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바퀴를 굴리기 위해 뛰어드는 것뿐이었다. 그는 "내 노력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 명백한 순간에도 노력의 타당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쌓아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오랜 질문에 대한 해답을 그에게서 찾았다. 그는 유엔 근무도 안정적이며 폼나는 일자리이기보다 인류가 다시는 야만의 시절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함께 도달해야 할 지향점을 결정하는 참여의 행위였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만인은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갖는다"는 지금은 평범하게 들리는 이 문구는 결국, 아직 지구촌 그 어떤 사회도 달성하지 못한, 그러나 그 어떤 사회도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이상적인 지향점을 구현한다. 프랑스 대사의 직분을 벗어던지고 드디어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는 날개를 활짝 펴고 인권운동가로서 행복한 삶을 누렸다. 프랑스가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대변하면서.

영원한 투사의 행복한 일생

그는 경탄을 경탄하고, 사랑을 사랑했다. 사람에게서 가장 경탄할 만한 점을 먼저 발견하고, 그것을 찬미하는 습관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본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서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를 통해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며 친구가 되었다. 사랑을 사랑하고, 사랑의 모험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태도 또한 그의 어머니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자신이 가진 좋은 점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왔다고 한다. 아버지의 절친을 사랑한 어머니였지만, 아버지 또한 아내의 새로운 사랑을 인정하고 아내와 자식들이 파리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기에, 에셀은 질투하지 않는 사랑법을 체득했다. 사랑의 모든 지평을 이해하려면, 일생에 한 번은 동성애를 경험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도 새겨듣고 실천에 옮겼다.

분노할 줄 아는 가슴, 세상의 바퀴를 굴리는 데 기꺼이 다가서는 참여 의지, 영감을 충전시키는 시, 인간의 신비를 탐험하고 환희가 솟는 샘을 찾게 해주는 사랑. 이 모든 것은 단 한순간도 어떤 하나를 위해 유보된 적이 없는, 영원히 젊은 스테판 에셀의 삶의 자양분이었다. 행복한 투사는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영혼과 육신과 정신이 하나의 일관된 바퀴 속에서 함께 굴러갈 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영원한 투사의 행복한 삶을 마감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한 과업임을 스테판 에셀은 우리에게 입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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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수정 작가이자 번역가, 칼럼니스트. 파리8대학에서 문화정책을 공부했다. 국립발레단 기획팀장,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역임. 지은 책으로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성의 사랑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문화는 정치다>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