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虐), 폭(暴), 적(賊) 그리고 아전(吏)
6월의 '르 디플로' 읽기
박근혜 정부 들어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면서 한국형 갑을관계가 화제가 되었다. 갑을관계란 계약서상의 당사자 관계를 편의상 '갑돌이', '을돌이' 하는 식으로 표현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상대적 지위가 높은 쪽이 갑, 낮은 쪽이 을이 된다. 이것이 사람관계에 사용되면서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를 비유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이런 계약서상의 관계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별별 요지경 백태가 벌어진다. 알량한 지위와 권력으로 온갖 뻘짓을 서슴없이 해대는 갑이 등장하는데 이름하여 '갑질'이다. 값비싼 여행기 비즈니스석에 앉으신 상무님의 '라면 투정', 청와대 대변인의 낯뜨거운'한-미 간 문화 차이', 우유회사 영업사원의 막가파식 '호가호위'….
그런데 갑질을 욕하다가도 막상 자신이 그 지위에 있게 되면 똑같아지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조그마한 지위나 권력을 손에 쥐면 휘두르고 싶어 한다. 자기가 사장도 아니면서 거래처 사람들에게는 거의 회장님 수준이다. 남자들은 흔히 군대라는 곳에서 이것을 많이 경험한다. "꼬우면 일찍 오지 그랬어?"라며 온갖 갑질을 해대는 고참들. "계급이 깡패"라며 하루빨리 고참이 되어 받은 만큼 돌려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졸병들….
이런 인간사는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나보다. <논어>에 보면 공자께서도 이런 소인배들의 갑질을 개탄하신다. 한 제자가 묻자 대표적인 갑질을 네 가지로 정리한 뒤 따끔하게 질타하신 대목까지 있다.
공자의 제자 중에 하루빨리 출세를 해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가 있었다. 이 친구는 기회만 되면 '벼슬하는 법', '벼슬아치 노릇을 잘하는 법'을 묻곤 했는데, 어느 날 공자가 대답해주었다. 얘야, 군자로서 해서는 안 될 네 가지 갑질이 있단다. 무엇입니까? 첫째, 일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엄벌주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자다. 자기만 잘났고 똑똑하여 아랫사람을 깔보고 비인간적으로 취급한다. 이를 '갑의 잔학(虐)'이라 한다. 둘째, 일을 실행함에 있어 무조건 결과만 따지는 자다. 일의 요체를 전수해주지도 않으면서 잘못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자다. 이를 '갑의 횡포(暴)'라고 한다. 셋째, 지시는 늦게 하고 일의 완성을 사납게 독촉하는 자다. 누가 봐도 며칠이 걸릴 일을 오늘 불러다 내일 끝내라고 한다. 못하면 무능한 것이고 다행히 결과가 좋으면 자기의 공이니, 도적이나 다름없다. 이를 '갑의 도둑질(賊)'이라 한다. 넷째,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놓고 온갖 생색을 내는 자다. 공적인 것을 마치 자신이 사사로이 베푸는 것인 양 굴고, 줄 때도 줄 듯 말 듯 상대방의 마음을 시험하여 공(公)으로 사(私)를 확인하려 군다. 그 그릇의 크기가 소소한 소모품 창고지기가 열쇠를 손에 쥐고 으스대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자를 '창고지기(有司)형 갑'이라고 한다. 알았느냐? 이 네 가지가 소인배의 갑질이다.
갑의 잔학, 갑의 횡포, 갑의 도적질 그리고 갑의 완장질. 지금 되새겨도 탁월한 관찰이다. 필자는 강의를 나가는 대학 4학년 수업에서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종강을 대신했다. 부디 이런 리더, 이런 상사, 이런 사장, 이런 갑은 되지 말자. 꼭 경제민주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성숙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보자는 소박한 희망과 상호 격려의 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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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인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editor@ilemonde.com / iwlee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