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는 쿠웨이트 무국적자들

2013-06-07     알랭 그레슈

다른 걸프만 연안 석유생산국과 마찬가지로 쿠웨이트도 고용주 마음대로 부려먹는 외국인 노동자 덕분에 살고 있다. 그러나 권리를 박탈당한 시민 '비둔'은 이 작은 수장국에서만 볼 수 있다.

도로는 단순한 길이지만 때론 두 세계를 가르는 선이 되기도 한다. 뒤처지는 쪽에는 시멘트 블록이나 함석지붕을 얹고 입구에는 천을 늘어뜨려 대문을 대신하는 집들이 늘어서 있고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 바닥에 드러나 있다. 많은 것이 임시방편으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느낌을 준다. 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도착하면 호화스럽지는 않더라도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고층 빌라들이 늘어서 있다.

잘사는 쪽에는 공무원, 교사, 의사 가족들이 쿠웨이트 국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며 정부 지원을 받아 자신의 집을 구입했다. 반대편에는 1990년을 기점으로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전직 공무원, 경찰, 군인의 가족들이 권리를 박탈당한 채 공공병원과 학교도 이용할 수 없게 된 이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지금 묵는 집도 임대라서 매달 정부에 임대료를 납부한다.

우리는 지금 쿠웨이트 시티에서 25km 떨어진 타이마에 있다. 1970년대 말 '부유트 차비야'라는 서민주택을 지어 '국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비둔'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모여 살게 하려고 세운 도시다. 대부분 베두인 출신인 이들은 행정 절차에 익숙지 않아 1961년 독립 당시 국적위원회에 등록하지 못해 무국적자로 전락했다. 튀니지의 진 엘아비딘 벤 알리와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후 쿠웨이트에서 처음으로 폭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소외된 이들 수백 명이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수장의 초상화를 들고 자신들도 쿠웨이트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넓은 공터에 자리를 잡고 그곳을 '미단 알후리야'(자유의 광장)라고 불렀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마을 진입을 막고 강경하게 진압하며 주민들을 속속 잡아들였다. 일부 언론매체는 시위자를 비난했고 수많은 쿠웨이트인도 그들을 모욕했다.

"경제력에 이끌려 들어온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권운동가 마하 바지는 친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경계를 뚫고 마을로 들어가 폭동을 이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지 전했다. 그녀에게는 '평등'이라는 기본 원칙이 중요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부유한 석유매장국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 지옥으로 떨어졌으니 기분이 어떻겠느냐. 독립 이후 1985년까지 그들은 모든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정부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군대와 경찰에 대거 진출해 전체 인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약 70%였다."

하지만 1985년부터 그들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강경해졌다. 그들을 다른 나라(이라크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동포라고 몰아세우며 진짜 신분을 숨긴 채 복지국가의 혜택을 누리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다 1990∼91년 이라크 점령 때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팔레스타인인들처럼 그들이 적과 계약을 맺었다고 의심했다. 그들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혜택을 박탈당한 채 군대, 행정부, 공직에서 쫓겨났다. 혼인신고서나 이혼신고서의 발급도 거부당했다. 그들에게 '진정한 국적'을 밝히라고 압력을 가하며 망명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25만∼30만 명으로 추산된 그들의 수는 공식적으로 10만5천 명으로 줄었다.

차별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적었다. 비둔을 외세의 앞잡이나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고, 그들이 시아파일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일 경우 발생하게 될 경제적 비용을 우려했다. 그들의 상황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논문을 작성한 클레르 보그랑은 '푸른 피'(알디마 알자르카)라고 불리는 신식 대가족이 1960∼85년 쿠웨이트의 황금기를 일궈낸 '건국 공신'으로 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금의 위기는 "아무 연고도 없는 땅으로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국가의 넉넉한 자금 상황에 이끌린 비둔이 대거 유입된 탓"(1)으로 보고 있다.

국민도 이민자도 아닌

그렇지만 시위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고, 국제인권보호기구에서도 그들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특히 그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점은 지배계층의 마음까지 움직여서 2000년대 초반 수장의 딸은 청소년 교육을 위한 특별기금 설립 허가를 받아냈다. 이 기금 덕분에 현재 7~18살 어린이와 청소년 1만3천 명이 장학금을 받고 있다.

공권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 특히 아랍개방대학(AOU·Arab Open University) 쿠웨이트 지부 등을 다니며 고등교육을 받은 신세대 비둔도 등장했다. 한 학생운동가는 "우리는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침묵의 벽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입장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교육권이라는 인간적 목표를 위한 캠페인을 조직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분야에서 이런 움직임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했다. 비둔 3만7천 명이 사르드 운동을 하는 이라크 시아파 급진주의자라고 여긴 하원의원처럼 그들을 외세의 앞잡이로 여기는 사람(2)도 있고, 내국민도 이민자도 아닌 그들의 지위로 인해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비둔의 노동력을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비둔은 변호사 사무실, 상점, 보안업계는 물론 학교와 민영병원에서도 일하고 있다. 그들은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지만 급여도 적고 휴가도 갈 수 없다. 유럽의 불법 이민자와 비슷한 처지다. 단지 쿠웨이트에는 사회적 계급보다 더 하위인 계층이 존재하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아시아와 아랍 이민자 수십만 명이 여기에 속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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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전문기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있다.

(1) Claire Beaugrand, <Stateless in the Gulf: Migration, Nationality and Society in Kuwait>, 런던, IBTauris에서 출간 예정.
(2) www.bedoonright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