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무 살 때 기억나오?

늙어가는 지구

2013-06-07     마리아마 엔도이

다른 아프리카 나라에서처럼 세네갈도 나이는 금기에 속한다. 세네갈에서는 결코 사람들끼리 나이를 물어보는 법이 없다. 그냥 겉보기에 나이 든 사람은 노인이라고 인식할 뿐이다. 노인은 흔히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자녀에게 공경을 받는다. 하지만 도시화가 되면서 이런 관계 역시 변화하고 있다. 2012년 이부아르상(프랑스어 작품을 쓴 아프리카 작가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받은 세네갈 출신 작가 마리야마 엔도이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단편소설을 한 편 보내왔다.

우리 고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80대 노부부, 마코두와 데귀엔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 데귀엔, 우리 20살 시절 기억나오?

- 아휴, 여보… 목소리 좀 낮춰요. 손주들 듣겠어요. 애들 앞에서 뜬금없이 젊은 시절 얘기를 꺼내다니, 점잖지 못하게!

- 뭐, 못할 이유라도 있소? 사실 당신 20살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 저 애들보다 훨씬 더 예뻤지. 몸은 또 얼마나 튼튼했는지. 굳이 하인을 따로 두지 않아도 매일 혼자 거뜬히 집 안을 반짝반짝 청소하고 하루 세 끼 15인분 밥상을 꼬박꼬박 차려내지 않았소?

- 맞아요. 돌아가신 시부모님과 시누이들, 그리고 몇 명의 사촌까지 모두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지요. 아침 8시면 시장에 나가 장을 보곤 했죠. 아버님은 늘 신선한 생선만 찾으셨잖아요. 냉동음식은 아주 질색하셨죠. 그때까지만 해도 티오프(Thiof·농엇과 물고기)(1)는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도 충분히 사 먹을 수 있는 생선이었는데.

- 당시만 해도 말단 공무원을 말단으로 보기는 힘들었지. 양복 쫙 빼입고 번듯한 사무실에서 일하며, 매월 말일이면 꼬박꼬박 꽤 넉넉한 수입을 손에 넣었으니까. 공무원이라면 모두 꼼짝 못하고 우러러봤다니까. 공무원 집 앞은 늘 희생절에 쓸 타바스키 양(2)이나 세례용 양을 빌리거나 얻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지. 모두 진짜 가난하거나 가난한 척하는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요새는 새로운 부유층이 등장했소. 축구선수나 격투기선수, 가수, 또는 스페인·이탈리아·미국 등지에 나갔다 되돌아온 귀국민들이죠. 그들이 요즘은 과거의 관료, 행정관, 혹은 나 같은 저명인사의 운전기사들을 대신하지.

- 맞아요. 예전에 당신이 주지사 운전기사로 재직하던 시절 정복 입은 모습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몰라요! 운전 중에도 늘 모자를 반듯하게 쓰고 있었죠. 국경일 군사 퍼레이드장을 방문한 주지사에게 차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얼마나 기품 넘치던지. 그날 행사장에는 주지사를 기다리는 TV 촬영기사들로 북새통을 이뤘잖아요. 그때 당신이 차도 위에 그려진 흰 선 안에 주지사 차를 반듯하게 주차했죠. 차 밖으로 잽싸게 뛰어나와 차를 한 바퀴 빙 돌아서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혀 주지사를 위해 차문을 열어줬죠.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간 다음, 주차선 안에 깔끔하게 차를 주차했어요. 그때 당신 모습이 얼마나 위풍당당하던지 사람들이 당신을 주지사로 착각할 판이었다니까요!

- 그게 정말이오, 데귀엔?

- 그럼요, 정말이고 말고요! 우리 이웃집 여자는 1년 내내 당신에게 푹 빠져 지낼 정도였어요. 당신이 언제든 원하는 사람에게 달려가 즐겁게 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며 열렬히 사모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야심한 밤에 자기 집을 찾아왔다며 내게 약을 올리기까지 했다니까요. 기억나요?

- 기억날 리 있나!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일이 있었다면 왜 기억나지 않겠소! 어쨌거나 그렇게 옛 추억만 곱씹는 대신 이리 와 등 마사지나 좀 해줘요. 당신도 알다시피 내 쥐꼬리만 한 퇴직연금으로는 내 관절염이나 녹내장, 그리고 당신 당뇨병을 치료하기 힘들다는 거 잘 알지 않소?

- 에구머니나, 당뇨병은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말아요. 그저 혈당이 조금 높은 것뿐이니까.

- 누가 세네갈 여자 아니랄까봐 그렇게 미신을 신봉하는 거요? 내가 당뇨병이라고 말하면 뭐 멀쩡하던 혈당이 갑자기 더 높아지기라도 한단 말이오? 내 모를 줄 알고. 당신 건강한 척하는 거, 그거 점심에 잔소리 듣지 않고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려는 속셈 아니오?

- 아휴, 마코두! 이제 그만 좀 놀리고, 이리 와 돌아누워봐요. 등에 버터나무 진액을 발라야 마사지를 제대로 해줄 수 있죠!

마코두가 아프리카 전통의상인 긴 상의(보보)를 벗고 엎드렸다가는 이내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데귀엔, 당신 정말 팔에 힘 다 준 거요? 내 진정 건강하고 팔팔한 셋째 부인이라도 들여야 하는 거요!

데귀엔은 남편을 한 대 찰싹 때렸다.

- 쥐뿔도 없는 양반이 그냥 잠자코 있어요. 당신 같은 노인네들 숨통 끊어먹는 게 젊은 여자들이란 거 정말 모르는 거예요? 주변을 좀 둘러봐요. 결국 노인네들 연금 타먹는 것은 죄다 젊은 부인들 몫이지 않소. 젊은 여자들은 모두 과부가 되기 원해요. 얼른 늙은 남편 황천길로 내몰고 젊은 애인이랑 그 돈으로 희희낙락 살고 싶어서요. 당신 설마 그 꼴이 되고 싶은 거는 아니겠죠?

-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말라고. 자, 이리 와 마사지나 해줘요. 내 얄팍한 지갑으로는 더 이상 아무도 꾈 수 없다는 거 나도 잘 아니까. 설령 셋째 부인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해도 둘째 부인 때처럼 아마 부부싸움 한번에 금방 집을 뛰쳐나갈 테지. 그나저나 목욕재계에 쓸 물은 덥혔소? 2월인데 아직 날씨가 춥구려.

- 에구, 내 손이 열 개라도 되는 줄 아슈? 마사지 그만 받고 싶은가보지? 에구머니나, 어쨌거나 이제 일어나야겠네요. 아들 발소리가 나요. 어서 웃옷 걸치세요.

- 앗살라무 알레이쿰(Assalmou aleykoum), 부모님 평안하시죠?

- 그럼, 요즘 내가 가진 게 평안이 전부잖니, 사랑하는 아들! 그나저나 네 식구들도 모두 평안하지?

- 혹시 제가 두 분을 방해한 건 아니겠죠?

- 그럴 리가 있니. 점심 배불리 먹고 한숨 자던 참이었단다.

- 오래 머물지는 않을게요. 그저 월급 탄 김에 약소하게나마 부모님에게 용돈 드리려고 잠시 들렀어요. 마음 같아선 좀더 넉넉하게 드리고 싶은데…. 이렇게 저를 유복한 가정에 낳아주셨잖아요. 누이들과 제가 부족함 없이 자라도록 해주시고. 그나저나 최근 시험을 치렀는데 꼭 합격하라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실래요? 합격하면 현금출납원 신세도 이젠 끝이에요. 경영진의 비서가 될 수 있죠. 그렇게만 되면 두 분 성지순례도 보내드리고 많이 호강시켜드릴게요.

- 그게 무슨 소리니. 이제 우리는 다리에 힘이 빠져 더는 여행 다닐 기력도 없단다. 게다가 성지순례라면 이미 한번 보내주지 않았니. 그거면 너도 네 할 도리는 다한 셈이다. 우리 여행 보내주느라 네가 많은 걸 희생하고 살지 않았니. 그리고 시험은 마음놓도록 하거라. 네 아버지가 엄마의 첫 남자가 되는 행운을 누리며 16살 된 엄마와 백년가약을 맺었듯, 너도 동료 가운데 반드시 첫 타자가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게다. 네가 손을 뻗는 것마다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야, 인샬라! 혹 신이 준 것을 도로 빼앗아가시지만 않는다면, 이 시험에 단 한 명의 합격자가 나온다면 그건 누구도 아닌 너란 걸 명심하거라.

청년은 고귀한 어머니의 말씀에 큰 위안을 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청년이 아는 한 결코 지옥불에 떨어질 염려가 없는, 자기가 한 맹세는 끝까지 지킬 줄 아는 보기 드문 여인이었다. 다시 부모님이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청년은 방문을 들어설 때만큼이나 잽싸게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데귀엔, 당신은 내게 정말 착한 아들을 낳아줬구려! 게다가 이렇게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 둘이 몸을 누일 집 한 칸에, 소파, 2인 침대, 속이 꽉 찬 문 다섯 개 달린 옷장이며 TV, 냉장고, 냉동고까지.

- 어디 그뿐이에요? 밥 해주는 사람에, 빨래 해주는 사람까지. 게다가 수도세, 전기세도 밀리는 법 없이 꼬박꼬박 내고 있지요. 마샬라('신의 뜻대로'란 뜻)! 우리 절대 아들에게 짐이 되지 맙시다! 그나저나 우리를 괴롭히는 유일한 고민이 한 가지 있긴 하네요. 아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 말이에요. 요즘은 마을이 얼마나 거대한 도시가 돼버렸는지, 애들이 한번 다녀가려 해도 비싼 교통비에 몸까지 피곤하니 말이에요. 며느리가 우리와 함께 살아준다면 돈도 많이 아끼고 좋을 텐데! 하지만 요즘 젊은 여자들은 그저 남편과 아이, 개, 때로는 고양이를 데리고 분가해 아파트에서 따로 살기 바라지요. 물론 그러다가도 무슨 일만 생기면 냉큼 시어머니에게 쪼르륵 달려오지만 말이에요. 애가 몸이 불덩이거나 뭐를 잘못 삼키기라도 하는 날 말이에요.

- 데귀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각자 자기 삶이 있는 거 아니겠소? 절대 며느리가 우리 아들을 빼앗아간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지. 어쨌든 이제 기도 시간이 다 돼가는구려. 침대 밑에 내 샌들 좀 꺼내주겠소? 목욕재계에 쓸 물 덥힐 주전자도 부탁해요. 여기서 회교사원까지 지척이니 내 금세 다녀오리다.

- 에구, 영감. 내 한번 허리를 숙이면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다는 거 잊었수? 그냥 문 앞에 있는 슬리퍼 신고 다녀오세요. 목도리도 단단히 두르고 모자 쓰는 것도 잊지 말고. 바깥 공기가 쌀쌀하답니다.

- 그러리다. "요새는 사계절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까!"

마코두는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게 고개를 수그리며 프랑스어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예전에 주지사가 전화로 본국에 있는 사촌에게 날씨를 물을 때면 수없이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물론 데귀엔은 이 외계어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프랑스어로 말할 때면 짐짓 마음이 흡족해졌다.

데귀엔은 두 팔을 쭉 뻗어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남편의 얼굴 빛깔이 자신보다 두 톤은 더 환해 보였다. 문득 그녀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이런, 아름다움은 절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거울아, 정말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나, 데귀엔이 맞는 거니?"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신에게 감사했다. "사실 내 나이의 노인들은 전부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지. 부디 그들이 이승에서의 삶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편안히 잠들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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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리아마 엔도이 Mariama Ndoye 작가. 최근 저서로는 <고개 숙인 나무>(L'arbre s'est penché, 에뷔르니출판사, 아비장, 2012)가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1) 세네갈에서 가장 유명한 생선.
(2) 세네갈 희생절용 양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