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가는 길

2013-06-07     최재한

1987년 6월,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권위주의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의 전국적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분노하라!"(Indignez-Vous!)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불러온 영원한 레지스탕스인, 프랑스 작가 스테판 에셀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 권력을 향해 내지른 노성(怒聲)이다. 분노할 일에 결코 분노를 단념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존엄성과 행복, 그리고 삶의 기반을 모두 지킬 수 있다. 에셀의 레지스탕스(저항) 정신을 달리 표현하면, '비폭력에 기반한 희망의 분노'다.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린 시공간이 바로 1987년 민주화운동인 셈이다.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외형적인 정치민주화가 달성됐다. 그 후 4반세기 동안 여·야 정권 교체가 10년을 주기로 반복됐다.

여전히 암울한 한국 사회 전망

그러나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가 가진 허약성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적 경험이 잘 보여준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역사적으로 허약한 민주주의 체제나, 나아가 파시즘 같은 일방주의 또는 전체주의 체제 탄생의 전야를 언급할 때 주로 사용하는 대표적 사례다. 따라서 '87년 체제'도 실질적 사회·경제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발전하지 않을 경우, 정치·사회적 상황 변화에 따라 과거의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할 수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은 얼마나 '시대 역행적' 통치 행위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이다. 아마 언론과 표현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를 훼손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냈다. 정부 요직에 진출하기 위한 필수요건이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논문 표절 같은 도덕적 흠결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개발 독재정권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제대로 바통을 넘겨준 것이 바로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관료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지난 2월 25일 박근혜 정부가 공식 출범하면서 '국민 행복'을 국정의 최고 가치로 삼고, 한반도 평화와 지구촌 발전에 기여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국정 비전으로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가 희망의 새 시대를 제시한 이튿날 이 시대 마지막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타계했다. 타계하기 전 그가 한국인들에게 전한 마지막 메시지는 "민주정부가 존재하는 영예로운 국가로 발전하기 바란다"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새 정부가 내정한 고위 공직자 중 국무총리 후보를 비롯해 미래창조과학부·국방부 장관 후보, 공정거래위원장·중소기업청장 후보 등이 비리 의혹으로 줄줄이 낙마했다. 이는 인사 파문을 넘어 '인사 참사'나 '인사 망사(亡事)'라 불릴 정도로 초유의 진기명기다. 그리고 인사 낙마자의 사퇴 배경 또한 만만한 수준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증여세 탈루, 국적 논란에 이어 해외 계좌를 통한 탈루와 성접대 의혹까지 상상을 초월한다. 그 과정에서 박근혜식 '수첩 인사', 즉 대통령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인사와 국정 운영이 벌써부터 문젯거리로 지적된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경직된 남북관계 기조를 이어감으로써, 한반도 긴장은 계속 고조되고 있다. 남북 교류의 마지막 보루였던 개성공단마저 사실상 폐쇄로 이어지면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행복한 통일 시대의 기반 구축'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발생했다. 정부 초기부터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이 어딘지, 그 지향점과 비전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신뢰받지 않을 정부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도 정치적 상황만큼이나 암울하다. 복지국가의 사회적 안전망이 없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회적 타살 행위가 새로운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자살자 수가 1만5906명으로, 매일 4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이 9년째 '자살률 1위'라는 서글픈 불명예 기록을 갖고 있다. 2011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이 31.7명으로, 2000년 13.6명에 비해 2.3배 늘었고, OECD 평균(12.8명)의 2.4배나 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저녁이 없는 치열한 생존 경쟁, 부실한 사회 안전망 등이 사회적 타살의 직접적 원인이다. 게다가 초고령화 사회에 들어서면서 발생한 노인 빈곤 문제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65살 이상 노인빈곤율(소득이 전체 가구 가처분소득 중위 수준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노인의 비율)이 2011년 45.1%에 달한다. 이 수치는 OECD 평균(13.5%)보다 3.3배 높은 수치로 미국(22.4%)이나 일본(22%)과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극심한 노인빈곤율은 노인자살률로 이어져, 2011년 노인 10만 명당 자살자는 평균 79.7명으로 OECD 평균의 약 2.4배다. 일본(17.9명)이나 미국(14.5명)에 비해 4~5배가 된다. 특히 자살 노인의 60%가 단독 생활자로, 의지할 대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이런 비참한 사회·경제 환경에서의 출구 전략이 모색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 출구 전략의 고민은 '바람직한 사회'(Good Society) 구상과 맞물려 있고, 그 중심에는 한국형 사회민주주의를 뿌리내리려는 세력이 위치한다.

20여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 소련·동유럽 현실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가 꼬리를 물고 붕괴되는 도미노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과 사회운동 세력의 상당수는 국가사회주의 노선이 아닌 새로운 노선과 대안을 모색했다. 먼저 민주사회주의 전략을 수립하고 합법적인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진보정당을 창당해 선거혁명을 이룩하자는 흐름이 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창당한 진보정당에는 민중당,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등이 있다.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은 새로운 이념적 대안으로서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했고, 저술과 번역 작업을 진행했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민족민주(NL)와 민중민주(PD)라는 기존 운동권의 두 세력이 통합한 정당이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했고, 2008년 민족민주파의 종북문제 논란으로 갈라선 민중민주 계열이 분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그 후 재합당과 분당이 반복되었으며 현재는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지난해 통합진보당에서 발생한 부정투표와 친북문제는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진보정당과 진보세력을 침체의 바다에 빠뜨렸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 진보의 방향과 관련된 고민과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진보정의당의 경우 7월 제2창당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당의 공식 노선으로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형 사민주의를 향한 시도들

10여 년 전부터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활동하는 많은 단체가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 '자율과 연대'(옛 민주노동당 내 정파 그룹), '사회민주주의연대', '진보신당 사민주의자모임', '사회민주주의정책연구회', '진보정의당내 가자! 사민당'이 있다. 한편 사회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단체도 있는데, 내용상으로는 조세 기반의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 단체로 분류할 수 있다. 그 대표적 단체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다. 그들은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을 주장하면서 정책을 만들고 시민, 학생, 기존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의 정치를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사회민주주의센터'(이하 사민센터)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점차 대중에게 공인·확산되고 있다. 현재 사민센터는 사회민주주의를 공식적으로 내건 단체 중 가장 활발하고 체계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정치 일정에서 진보세력이 한국 사회의 구원투수가 되지 못한 현실은 사민센터에 책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다. 흔히 사회민주주의를 언급할 때 이념과 세력, 그리고 체제를 나눠서 접근해야 한다. 한국의 다양한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활동 중이지만, 어떤 수준과 버전의 사회민주주의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다. 사민센터가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자리잡아, 궁극적으로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주의 모델과 같은 한국형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민센터는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정책을 기획·생산해 내고, 그 결과물을 정치기획본부와 아카데미를 통해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확산시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나아가 사민센터는 사회민주주의 문화공연을 통해 시민과 어우러진 일상 속의 사회민주주의를 이루려는 목표도 갖고 있다. 한국 사회의 대안 세력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 사민센터는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사회민주주의라는 사회 시스템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거대하고 오만방자하며 탐욕적인 정치·경제 권력에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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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최재한 사회민주주의센터 아카데미 원장. 베를린자유대학 박사(사회학). 사회민주주의정책연구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