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에 떠도는 <모던 타임스>의 유령

이건희와 헨리 포드의 공통점

2013-07-08     정승일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창업자 이병철 회장 때부터 시작되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노조를 허용 못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고, 이건희 회장도 그 철학을 승계했다. 이재용·이부진씨 역시 이어받을 태세다. 미국에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한 기업이 있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에 나오는 기업으로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대량생산, 즉 ‘포드 시스템’을 본격 도입한 포드자동차이다. 창업자인 헨리 포드는 저렴한 원가로 생산된 T모델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고, 다른 회사에 비해 더 많은 임금을 노동자에게 주면서도 노동조합 설립은 막았다.

“내 시신을 밟기 전에는 노동조합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헨리 포드의 눈에는 노동조합이 빨갱이였다. 1920~30년대이고,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의 물결이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던 때다. 미국도 무풍지대는 아니었고, 파업하는 노동자 대열이 붉은 깃발을 들고 거리시위를 하는 모습이 <모던 타임스>에도 등장한다. 그런 포드자동차에도 1930년대 들어 노동조합이 설립된다. 대공황 와중에 출범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정부가 대기업에 노동조합 설립을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킨 덕분이다. 또한 루스벨트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노인연금과 의료보험, 주택모기지 등 각종 사회복지제도를 입법화했다. 그리고 늘어난 복지 예산을 조달하려고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 

헨리 포드와 록펠러 등 미국 최고 부유층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루스벨트는 빨갱이, 사회주의자’라는 욕설이 부유층의 후원을 받는 신문들에 넘쳐났다. 루스벨트는 일부 식자층이나 읽는 신문이 아닌 라디오에 의존했다. 라디오 연설로 직접 호소하면서 대자본과 부유층에 맞섰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여전히 가장 큰 산별노조인 전미자동차노조(UAW)는 정치적 격돌 속에서 성장했다. 

흔히 이건희 일가의 무노조 철학을 비난한다. 그런 도덕적 비난은 백번 옳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민주주의와 진보를 말하는 세력의 전략적 구상 부재다. 과연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집권 민주당에 루스벨트 정부처럼 삼성그룹과 다른 대기업 전체에 노동조합 설립을  법으로 강제할 구상과 용기, 결단이 있었던가? 또한 더 진보적인 야당에 그 비슷한 꿈이라도 있었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이 삼성그룹의 노동조합 설립은 국가적 과제가 아닌 삼성 종업원들의 과제라고 치부했고, ‘재벌해체’ 또는 ‘재벌개혁’ 정도는 되어야 국가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옳았을까?

문제는 진보의 상상력 부재

현재 삼성그룹에서 유일하게 노동조합이 설립된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는 이건희 일가이다.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 등으로 이어지는 계열사 통치구조에서 핵심적인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것이 에버랜드이다. 만약 에버랜드의 경영권이 이건희 일가가 아닌 다른 세력에게 이전될 경우, 삼성그룹 전체의 경영권이 통째로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에버랜드의 경영권을 통째로 바꾸어보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회사법상 에버랜드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즉 경영권)는 이사회이다. 이 이사회에 독일식 공동결정제가 도입되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즉 에버랜드에서 근무하는 모든 (즉 노동조합원이 아닌 종업원 역시) 부장급 이하 종업원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 ‘종업원 대표 이사’들이 에버랜드의 이사회에 참여한다. 그것도 이사회 멤버의 절반을 그들이 차지한다. 그리고 이사회는 회사법에 따라 대표이사 사장(CEO) 및 여타 경영진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다. 만약 이건희, 이재용 같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부인하는 자가 에버랜드 사장 후보로 나선다면, 당연히 종업원 이사들은 그 후보자에게 비토권을 행사한다.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씨는 눈물을 머금고 무노조 철학을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2006년부터 나는 이미 여러 글을 통해 ‘기업집단법’을 제정하자고 했다. 독일식 ‘콘체른’ 법이든, 프랑스식 ‘로젠블룸’ 법이든 기업집단(재벌그룹)의 존재와 기능을 합법화하자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교수가 나와 같은 의견을 펼치고 있고, 더구나 많은 면에서 나보다 더 상세한 입법적 검토를 하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만약 기업집단법이 제정된다면 에버랜드의 유사 지주회사 역할이 확고하게 인정된다. 이 때 동시에 종업원 공동결정제가 입법화되고 그리하여 에버랜드 이사회에 종업원을 대표하는 이사가 절반 참여한다면, 종업원 이사들이 이건희·이재용·이부진 일가와 더불어 다른 주주 대표이사가 에버랜드의-따라서 삼성그룹 전체의-경영권(기업지배권)을 공동으로 나누어 갖는 획기적인 통치체제가 구축된다. 
  실제로 독일·스위스의 콘체른(기업그룹)이 이런 식으로 운영된다. 예컨대 독일의 다임러 그룹(벤츠자동차·유로파이터 등을 생산) 역시 여러 개 계열사가 있는 대기업 집단인데, 그룹을 통치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그룹 이사회’에는 다임러그룹의 종업원 수십만 명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된 ‘종업원 대표이사’ 절반(스웨덴은 3분의 1)이 참여한다. 

종업원 대표이사가 삼성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그룹 이사회에 합법적으로 이건희 일가와 함께 참여할 경우, 당연히 이건희 일가의 편법적인 재산과 경영권 상속은 원천 봉쇄된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폭로된 것처럼, 이건희 일가의 편법 상속과 편법 경영은 이건희 그룹회장을 보좌해 삼성그룹의 그룹 경영 전체를 총괄하는 전략기획실 또는 구조조정본부의 지휘 아래 일어났다.
  만약 기업집단법이 제정된다면, 전략기획실은 반드시 에버랜드같이 삼성그룹을 사실상 지배하는 특정 회사의 산하 조직으로 위치해야 한다. 에버랜드 이사회는 동시에 그 산하 조직인 전략기획실의 업무를 지휘·감독할 법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다. 만약 기업집단법과 동시에 (또는 연이어서) 종업원 공동결정제가 입법화된다면, 에버랜드 이사회에 참여하는 종업원 대표이사 역시 그룹 경영을 총괄하는 전략기획실의 비밀 업무에 대해 보고받고 지휘·감독할 법적 권한과 의무를 갖게 된다. 따라서 종업원 대표이사가 이건희 일가의 편법과 불법을 눈감아준다면 그 역시 법의 처벌을 받는다. 

이 경우 삼성그룹 및 여타 재벌그룹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감 몰아주기 방식의 편법적 재산 상속 역시 원천 봉쇄된다. 왜냐하면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의 경우, 어느 한 계열사는 손해 보는 데 반해 다른 계열사(재벌 총수 일가가 대주주인 계열사)에서는 그만큼 이익이 발생하고 주가가 상승하는데, 그런 계열사 간 손해-이익의 전체 흐름이 그룹 이사회에 보고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연히 총수 일가만이 아닌 여타 주주, 그리고 특히 종업원 대표이사에게도 그 사실이 보고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또는 계열사 간 상호 지원이 삼성그룹 전체 그리고 그룹의 여러 이해 관계자의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 일가의 특수한 특권적 이익만을 위한 조치로 판명난다면, 일감 몰아주기와 계열사 간 상호 지원은 그룹 이사회에서 거부될 것이다. 이 방식으로 우리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통치구조)를 ‘총수 자본주의’가 아닌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시킬 수 있다.

‘총수 지배 기업그룹’을 ‘이해관계자 지배 기업그룹’으로  

과연 이건희 일가가 그리고 다른 재벌 총수 일가들이 기업집단법을, 더 나아가 공동결정제를 지지하고 나설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총수 일가가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해온 통치 체제를 허물어뜨리는 데 스스로 앞장설 리 없다. 이건희 회장 일가의 이익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기업집단법은 분명 삼성그룹의 그룹 체제 안정화에는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기업집단법은 우량 계열사의 부실 계열사 지원을 합법화하는 등 기업그룹 체제만이 갖는 독특한 시너지 효과를 폭넓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기업집단법의 도입은 삼성그룹의 그룹 체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 

기업집단법은 몰라도 종업원 공동결정제가 무섭다고? 그 마음은 이해된다. 독일·스웨덴·네덜란드와 달리 스위스와 프랑스는 기업집단법은 있어도 종업원 공동결정제는 없다. 따라서 기업 그룹의 그룹 이사회에  종업원 대표이사가 대거 참여하는 불상사(?)는 없다. 서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기업집단법의 입법화는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초당파적 과제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건희 일가와 전경련은 지금처럼 기업집단법에 대해 뜨악해 하는 소극적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건전하고 양식 있는 보수 엘리트의 모습이다. 

그런데 종업원 공동결정제, 그리고 모든 기업에 (산별) 노동조합의 설립을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일은 기업집단법과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맞설 사안이며, 오로지 진보적 정치세력이 집권했을 때만 입법화할 수 있는 과제이다. 서독의 공동결정제와 산별노조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을 점령한 미국·프랑스·영국의 3개 강국 중 영국군 점령 지역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당시 영국에선 처칠의 보수당을 누르고 노동당이 첫 단독 집권한 시기였다.

‘대자본 해체’가 아니라 ‘대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

이건희 일가 등 재벌 총수들은 결코 기업집단법 제정에 스스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종업원 공동결정제와 산별 노조 의무화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할 것이다. 삼성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삼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진보 정치의 상상력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보 정치에 과연 기업집단법과 종업원 공동결정제, 그리고 (산별) 노동조합의 법적 의무화라는 상상력이 있었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이 그들의 머리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경제학은 언제나 대자본(대기업 또는 대기업 집단)으로 집중된 경제력을 해체(재벌 해체)해 아담 스미스가 말한 완전경쟁 시장을 창출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는 대자본으로의 경제력 집중을 전제로 (그것의 해체가 아닌) 그것을 어떻게 사회적·국가적으로 통제할 것인지 상상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삼성그룹의 해체(재벌 해체) 또는 축소(출자총액제한제도·금산분리 등)가 아니라, 삼성그룹의 존속 및 발전을 전제로 종업원 공동결정제(그리고 산별노조의 법적 의무화)를 상상한다. 전통 사회주의 역시 삼성그룹(대자본)의 존속을 전제로 이건희 일가가 보유한 10조 원가량 대주주 주식을 국가가 유·무상 매입(국유화)하는 것을 상상한다. 전자는 수십만 종업원에 의해 공동 통치되는 삼성그룹이고, 후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전 국민에 의해 공동 통치되는 삼성그룹이다. 

삼성그룹에 대한 진보적 비판을 그간 주도해온 것은 변호사 등 법조계 인사들이었는데, 이들의 율사적 관점은 본성상 자유주의의 상상력을 넘어설 수 없다. 이제부터는 삼성그룹이 나아갈 길에 대한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글•정승일
본지 편집위원. 서울대 물리학과를 다녔으며, 1980년대 내내 철학과 정치경제학, 민주화 운동에 몰두했다. 199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와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금융경제연구소,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에 근무했으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Crisis and Restructuring in East Asia>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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