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이면서 가짜인 야누스 노동
스위스 실업자들의 무상 노동 현장 리포트
2013-07-09 모르간 퀴에니
50살의 전직 전기기사 클로드는 1년 넘게 실업 상태다. 그는 얼마 전 이른바 ‘적극적 대책’이라는 과정에 자원했다. 취업 상담사는 그를 한 대학의 ‘임시 고용 프로그램’에 보냈다. 클로드는 그럴싸한 직장에서 적성을 살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하지만 무보수였다. ‘동료’는 ‘힘든 일’을 그에게 모두 떠넘겼다. 그는 착취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봉급을 받는다면 좀더 모양새가 날 것 같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받는 돈은 실업보험에서 나온다. 하지만 고용주 처지에서 볼 때 나는 엄연히 한 명의 추가 인원이다!”
다니엘라는 10살 때 스위스로 이민 왔다. 의무교육을 마쳤지만 졸업장을 받지 못해 몇 년간 공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공장이 문을 닫자 실업자 신세가 됐다. 아직 미래가 창창한 23살인 그녀는 판매원이 되고 싶어 한다. 나와 만났을 때 그녀에겐 두 살배기 아들이 있었고 임신 8개월째였다. 사는 게 녹록지 않아 보였다. “상담사는 집 안에만 웅크리고 있지 말고 뭔가를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상담사는 그녀의 장래 계획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그녀를 실업자만 고용하는 전자 폐기물 재활용 ‘회사’에 배치했다.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아이를 어머니 집에 맡긴 후 공장에 가서 온 종일 텔레비전 해체 작업에 매달린다. 그녀는 이 일이 임신부에게 위험할 수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행여 제재를 당할까 봐 입을 다문다. 실업급여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어 다시 집에 웅크리고 있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조슈아는 하루라도 빨리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물류전문가던 그는 5년 전부터 복지 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에겐 인고의 세월이었다. 처음 상담사가 그에게 뭔가 해보라고 권유할 때만 해도 의욕이 넘쳤다. ‘임시 고용 프로그램’ 일환으로 소개받은 일자리 직함도 예전 직장 다닐 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제는 가상의 고객 이름으로 주문 서류를 작성한다는 것이다.
위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현재 실업자로서, 지역 직업소개소(ORP)에 등록되어 있으며, 임시 고용 프로그램 참여자로 지정되어 있다. 상담사는 ORP에 등록된 실업자로 하여금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적극적 대책’(MMT)을 강제로 따르게 할 수 있다. 교육대책, 특별대책, 고용대책의 세 가지 형태로 운영된다. 임시 고용 프로그램, (청년 실업자를 위한) 동기부여 학기제 프로그램, 가상 기업 연수 프로그램 등을 포함한다.
노동자이면서 실업자인 이중 제약
이 프로그램들은 1990년대 실업보험 차원에서 실업자들을 ‘노동시장에 신속하게 재진입시키고 장기간 머물게 할’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공식적인 표현으로, ‘실제 직업 현장과 유사한’ 활동을 중심으로 3개월 단위로 진행되지만, ‘민간부문과의 경쟁’은 피한다. 또한 실업자들로만 운영되는 ‘회사’, 공공 행정기관, 비영리 단체 등 일종의 ‘2차 노동시장’(1)을 중심으로 실시한다.
‘실업보험에 관한 법률’(LACI)에 따르면, 프로그램 참여 거부 행위는 일정 기간(1.5~3개월까지) 실업급여 지급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결격 사유’로 간주된다. 하지만 누가 우선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지, 자격 요건을 갖추기 위한 최소한의 실업 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정의되어 있지 않다. 2012년 실업급여 수급자의 13.5%가 고용대책 대상이었으며, 4만 명 이상이 임시 고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런데 ‘적극적 대책’ 대상 실업자들은 스위스연방경제국(SECO)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2012년 스위스가 3%대 실업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프로그램의 독특함은 강제성뿐만이 아니다. 부과되는 노동 역시 일반적인 범주로 파악이 불가능하다. 반대 급부로 실업급여가 지급되므로- 과거에 지불한 분담금에 대한 당연한 권리임에도- 무상 노동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금노동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임금 형태로 주어지는 돈이 없을뿐더러, 보통 부수적으로 함께 제공되는 복지 혜택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진짜이면서 가짜인 노동’이다. 위 예를 든 세 사람의 상황을 표현할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자신이 하는 일은 ‘진짜 노동’이다. 위의 지시에 따라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짜 노동’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미의 고용 계약서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소속, 제공해야 할 서비스, 시간만 명시되고 보수에 대한 합의는 빠진 ‘목표 계약’에 서명해야 한다. 퇴직금도 없고, 실업급여 연장 신청도 불가능하다.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노동자이자 실업자로서 이중의 제약을 겪는다. 그들은 출퇴근 시간을 엄수하고 할당 작업량을 채워야 한다. 그래야 프로그램 책임자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에 나서야 하며, 매달 상담사를 만나야 한다. 임시 고용 프로그램 참여 기간 중이라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참여와 구직 활동은 U자관의 양쪽 수위가 연동되는 것과 같은 관계가 아니다.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라 구직 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것에 대한 어떤 보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실업 탈출과 실업의 덫 사이에서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매일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해야 할 뿐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 노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이른바 관할 당국이 참여자의 행적과 태도를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기 때문이다. 참여자가 수행하는 업무는 프로그램 관리자에게 평가받고, 얼마나 성실하게 구직 활동에 임했는지는 상담사에게 평가받는다.
모든 종류의 규칙 위반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기에 프로그램은 항상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참여자들은 마치 ‘수험생’이 된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프로그램 관리자가 자신을 ‘구호 대상자’, ‘문외한’, ‘아동’ 취급한다며 분노한다. 물류 분야에서 일한 조슈아가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한 여성이 우리에게 도미노 게임을 시켰다. 숫자를 읽을 줄 아는지 보기 위해서다. 심지어 가상의 숫자를 불러주면서 주문서를 작성해보라고 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이른바 ‘회사’에는 “지식을 보유한 관리자가 있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배워야 하는 우리들이 있다. 뭔가를 배우는 것은 물론 환영이다. 하지만 무엇을 배우란 말인가?”
실제로 고용된 것이 아닌데도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마치 실제 ‘직장에서처럼’ 일하도록 강요받는다. “목표를 정하라”, “실제로 피고용자인 것처럼 행동하라”, “최선을 다해서 일하라” 등 요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 요구들을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어린아이를 유료 보육원에 맡겨놓고 온 종일 가상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싱글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위 세 사람은 이웃에게 자신이 일하러 다닌다고 말할 수 있는 데에 만족한다. 하지만 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일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이 기간을 경험한다. 어떤 이들은 마침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속으로 냉소한다. ‘덫에 갇혔다’고 느끼며 절망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이들은 ‘적극적 대책’의 가상적 성격 때문에 다양한 긴장에 시달린다. 수행하는 일에 별 의미를 갖지 못하고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하루라도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구직 의지가 부족하다고 의심 살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더해진다. 직장 경력을 내세우며 아무것도 증명할 게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프로그램 참여 과정에서 이들의 전문성과 경력이 무시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새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침묵
임시 고용 프로그램은 대상자들을 피고용자가 아니라 실업자로 낙인 찍으며 스스로를 부적격자로 느끼도록 만든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회피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때로는 병가를 내고, 때로는 대놓고 싸우면서,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고, 때로는 이익을 얻으면서 자존감을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어떤 이들은 공개적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고발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사실을 털어놓기 꺼린다.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침묵하거나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마치 감옥에서 석방될 날만 기다리는 죄수들처럼 “그 시간을 견디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을 무조건 ‘고역’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2)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단체를 결성하는 데 성공한 일부 참여자들은 이 프로그램의 가상적 차원을 활용해 몇 가지 규칙을 변형해 자신이 하는 일에 고유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일례로, 한 중고 판매점에 배치된 여성들은 책임자가 없는 상황을 이용해 단골 손님의 아이에게 장난감을 제공했다. 이를테면 무보수로 일하는 대가로 베풀 자유를 행사한 것이다!
고용 활성화 정책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모든 형태의 비고용을 낙인 찍고, 노동을 유일하고 필수적인 사회적 관계 형식으로 신성화한다. 물론 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노동은 여전히 중심적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고 아무 조건에서 아무 일이나 해도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심 어린 눈초리 앞에서 자신이 ‘취직 적격자’라는 사실을 이중으로 증명하는 대신,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생계를 이어가고 쓸모 있는 존재로서 인정받기 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노동 할당 정책은 사회적 국가의 대표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통합과 연대를 강화하기는커녕 가장 취약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신분을 세분화해 그들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조장한다.
글•장 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발칸 통신>(Le Courrier des Balkans) 사이트 편집장. http://balkan.scourriers.info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Loïc Trégourès, ‘Croatie: le Hajduk Split fête cent ans de football et d'histoire’, <발칸 통신>, 2011년 2월 18일자.
(2) Diane Masson, ‘Coraite. Dernière ligne droite vers l'Union européenne’, <Grande Europe> 14호, La Documentation française, 파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