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월츠, 그에 대한 오독을 경계하며

2013-07-09     은용수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들은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며, 그의 책과 논문을 읽어봤을 것이다. 흔히 월츠를 ‘구조적 현실주의’(Structural Realism) 혹은 ‘신현실주의’(Neorealism) 이론가로만 기억하지만(1), 그의 연구와 가르침 그리고 그것이 주는 교훈은 세월의 시침을 훌쩍 뛰어넘는다. 학문과 실제, 이론과 정책을 넘나들며 송곳 같은 통찰력을 보여준 그이기에 더욱 그렇다.

월츠는 1959년 발간한 <인간, 국가, 전쟁>이라는 저서를 통해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본성’, ‘국가의 성격’, ‘국제 체제의 구조’라는 세 가지 시각으로 분석하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국제정치 이론을 만들려고 했다. 그의 이론은 5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제정치의 복잡한 현상과 사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분석 틀이다. 월츠는 1979년 또 하나의 저서 <국제정치이론>을 통해 국제정치의 무정부적 상태와 그에 따른 국제관계의 불확실성, 배신의 가능성, 물질적 힘의 균형을 강조한 ‘구조적 현실주의’ 이론을 성립한다.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월츠는 현대 국제정치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그의 저서와 뒤이은 논문은 전 세계 대학의 ‘필독서’로 지정되어 읽히고 있다. 영국 국제정치학회 회장을 지낸 켄 부스(Ken Booth) 교수는 “생물학에 다윈(Darwin)이 있다면 국제정치학에는 월츠가 있다”면서 그의 학문적 공헌을 칭송한 바 있다. 

하지만 월츠 연구의 핵심은 활자와 책갈피에 담긴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자로서 그의 ‘삶’은 훨씬 더 깊고 푼푼한 가르침을 준다. 예컨대 월츠는 융합적 지식인이었다. 한국에는 최근에 들어 각광받고 있는 융합 연구 혹은 학제 간 연구를 그는 이미 반세기 전에 실천했다. 그의 책과 논문이 주목받은 것은 단순히 새로운 이론을 창출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이론적 바탕에는 철학과 경제학, 문학과 사회학이 깊게 엉기어 있다.

그는 과학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문학과 작문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습했다. 이것이 국제정치학과 맞물려 글로써 오롯이 나타났기에, 그의 글에는 힘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색된 비유와 예시는 싱싱하고 소담스럽다. 그렇다고 월츠가 다작(多作)한 것은 아니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10편이 채 안 되는 책과 논문을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이다”라는 그의 일갈을 물량주의에 매몰된 한국 학계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과도한 군사력 사용에 부정적 입장

한편, 이보다 더 큰 울림은 월츠의 자기 성찰적 태도다. 그의 별세 소식에 많은 언론사가 하나같이 똑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월츠의 신현실주의는 냉전시대의 붕괴를 내다보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이라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는 것이었다. 도둑처럼 찾아온 냉전의 붕괴를 예측한 국제정치학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차치하자. 여기서 월츠가 다른 이론가와 다른 점은 자기 이론의 한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일반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데 자신의 ‘구조적 현실주의’는 적절하지 않다고 표명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월츠의 자기 반성적 혹은 겸양적 태도야말로 냉전의 붕괴를 내다보지 못했음에도 그가 지금까지 존경받는 이유일 것이다. 또 수십 년을 쏟아 부은 자신의 연구에 대한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교조적으로 자신의 이론과 신념을 끝까지 밀고 가는 학자나 정치인들에게 ‘상극’의 논리가 아닌 ‘상생’의 논리 출발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통렬히 환기시킨다.

걱정스러운 것은 월츠에 대한 우리의 오해나 무지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정치에서는 물리적 힘이 가장 중요하며 오직 국가 간 힘의 차이에 의해 국제관계가 결정된다’는 식으로 그의 이론은 단순화되곤 한다. 이런 일차원적 방정식은 힘(군사력)의 확장이나 균형이라는 정부의 현실 정책, 정책 제안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서울에서 개최된 한-중-일 역학관계에 관한 학술회의에서는 현실주의 국제정치를 고려하며 한-일 사이의 영토 분쟁에 대한 대처법으로 한국이 첨단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또 다른 예로 앨버트 델 로사리오 필리핀 외교부 장관의 발언을 고려해보자. 그는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한다”고 천명했다.(2) 이 역시 현실주의 국제정치를 오직 힘의 논리로만 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창은 월츠와 그의 연구에 대한 오독이다. 월츠는 현실주의자다. 이것의 핵심은 힘 자체가 아닌 그것에 대한 신중함(prudence)이다. 여기서 신중함이란 힘의 과도한 사용에 대한 ‘절제’를 의미한다. 월츠는 이런 논리를 행동으로도 주창했다.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적극 반대 표명

그는 일찍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했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국방비 증액에도 반대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도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동료 현실주의 학자들과 함께 그는 2002년 <뉴욕타임스>(NYT)에 광고를 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왜일까? 전쟁을 통해 투사되는 미국의 과도한 힘(군사력)의 사용이 또 다른 위협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단순히 국제정치에서의 힘의 중요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월츠 연구의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월츠의 제자 로버트 갈루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월츠는 의심할 여지없는 절제주의자(Minimalist)였다.”(3) 그리고 그의 통찰은 전쟁의 짙은 먹장구름이 깔려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엄연한 진행형이다. 중-일, 한-일 간 영토 분쟁과 역사 인식의 대립,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시진핑 체제의 대국 외교, 버락 오바마 정부의 동아시아 중심축 이동 전략(Pivot to Asia), 아베 정부의 극우화, 그리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 우리 앞에 놓인 엄중한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월츠를 오독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2008년 9월, 영국에서 열린 ‘사고의 왕’(The King of Thought)이란 학회에서 한 학생이 월츠에게 묻는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건가요?” 월츠는 답했다. “아니요, 나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당시 내가 직접 들은 그의 대답이, 자꾸만 귀 기울이게 하는 빗소리 같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과 불안은 희망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월츠를 제대로 추억한다면.

글•은용수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국제관계이론 및 외교정책을 전공해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Why and How Should We Go for a Multicausal Analysis in the Study of Foreign Policy?(Meta) theoretical Rationales and Methodological Rules’ ‘Review of International Studies(2012).’ ‘What is ‘vintage’ in IR?’ PS: Political Science and Politics (2013) 등이 있다.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본지 편집위원, 그린피스 해양 캠패이너

(1) 월츠는 본인의 이론이 ‘신현실주의’가 아닌 ‘구조적 현실  주의’로 불리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는 국제정치에서 국  제체제의 구조적 속성(무정부성)을 중시하였는데, ‘구  조적 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Philippines backs rearming of Japan” Financial    Times (December92012), http://www.ft.com/intl/   cms/s/0/250430bc-41ba-11e2-a8c3-00144feabdc0.  html#axzz2Gsss0Cu9.
(3)Robert Gallucci, “Remembering the professor,”    <Foreign Policy>, 2013.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