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와 왜곡의 역사를 딛고…
진실을 찾아 떠나는 실크로드 여행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파울 빌헬름 리히트호펜이 저서 <중국>을 발간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정작 그 내부를 문명의 관점에서 깊이 들여다보면, 실크로드는 기원전부터 고대 페르시아권과 중국 문명 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교류의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 하면 흔히 지금의 이란만 떠올리는데, 고대 페르시아권은 현재의 이란부터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한다. 1935년 팔레비 왕조의 레쟈샤 국왕은 국가명을 페르시아에서 아리안을 의미하는 이란으로 개칭하는데, 아리안이 주축을 이루는 인접 지역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이란은 아리안의 축약형인 셈이다. 고대 페르시아권은 ‘이란 세계’로도 명명될 수 있는데, 중국인들은 ‘서방 국가’로 부르기도 했으며, ‘서역’으로 지칭되는 지역이다. 중국의 영문명 China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면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내용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진(秦)나라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시행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면서 진(Chin)의 이름이 서방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고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그 기원은 다르다. 친(Chin)이라는 명칭은 하나의 페르시아어 이름으로 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서 ‘사이니’(Sayini)로 불렸으며, 다섯 아리안 지역 중 하나로 등장한다. 사이니는 조금씩 신(Sin)과 친으로 출현했으며, 대(大)페르시아(Great Persia)의 동부주로 불렸다. 이란인들은 중국 본토를 마친(Machin) 혹은 대중국(Chin-e-Bozorg)으로 불렀으며, 오늘날 중국이라는 명칭은 마친을 언급하는 것이다. 사이니 혹은 신(Sin)은 태양의 명칭 중의 하나였으며, 친(Chin)은 세계에서 가장 동쪽인 지역, 태양의 기원으로 간주되었다.
최근 신라와 페르시아와의 관계가 <쿠쉬나메>(쿠쉬의 서(書))라는 페르시아어 문헌을 통해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친과 마친 사이에는 무역로의 ‘왕의 길’이 존재했다. 이 길을 통해 상인 간에 무역 거래를 했고, 마친-에-아발(Machin-e-Avval·제1의 중국: 한국)과 마친-에-도봄(Machin-e-Dovom·제2의 중국: 일본) 사이에는 육로와 해로가 존재했다고 한다. 우선 위 문단에서 언급한 내용과 연결해서 볼 때, 고대 친은 대페르시아의 동부 주를 가리키고 지금의 중국은 마친이다. 또한 ‘마친-에-도봄’으로 불리던 지역이 ‘왁왁’(Wak-Wak)이라 지칭되던 일본이며, ‘마친-에-아발’로 불리던 지역이 한국이다. 당시 무슬림 학자들은 신라를 중국의 영토 안에 포함시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지금까지 친과 마친의 용어와 개념에 대해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즉 친이 중국의 중원 지역이고, 마친이 중국의 변방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그것이다. 이는 ‘친’이라는 용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기원을 확실하게 밝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실크로드와 고구려 무용총 벽화
이런 그릇된 인식은 용어와 개념을 정의하는 차원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 고대 한국과 고대 페르시아권의 중앙아시아 지역 간에 왜곡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프라시압의 벽화와 무용총의 고구려 벽화를 통해 살펴본다. 중동 이슬람 지역에서 아랍과 페르시아권에 대한 구분이 분명해야 하듯이, 중앙아시아에서는 투르크와 타지크에 관해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타지크인은 아리안족으로서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을 가리키는데, ‘타직’이란 용어는 투르그인들을 통해 투란인들에게 붙은 명칭이다. ‘투란’이란 용어에 대해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투란을 사카(스키타이)족으로 보고 있다. 사카 아리안족의 출현에 대해서는 전승과 설화가 남아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대 대체로 이란계 민족이 거주했다. 6세기 중반까지 투르크족은 알타이 산맥 남부 지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10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역사와 문화의 중심 지역인 마바르안나흐르(트랜스옥시아나)와 코라산의 일부마저 투르크계 민족에게 내주었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은 페르시아 문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10세기 이후 수세기 동안 투르크와 투르크만의 살죽 왕조는 타지크인들의 문화를 약화시키거나 격리시킬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 투르크 정부일지라도 마바르안나흐르의 전통 문화와 언어는 페르시아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아무(지훈)강을 사이에 두고 수니파 우즈베키스탄 민족과 시아파 사파비 왕조의 성립은 이란인 간의 분열의 서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경주에서 중세 스페인의 안달루스 지역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대체로 페르시아학(Persian Studies)과 그 문명의 영향이 지대하지만 지금까지 아랍, 투르크학과 그 문명의 관점 위주로 파악된 측면이 크다. 중앙아시아와 고대 한국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아프라시압의 벽화이다. 투르크와 타지크 간에 잘못 알려진 역사는 중앙아시아 연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아프라시압 벽화에서 정점에 이른다. 중앙아시아의 남부 지역,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왕국이 흔히 투르크계 국가(최근 이와 관련하여 많이 수정되고 있다)로 알려져 있으나, 아프라시압 궁정은 소그드 궁정이며, 아프라시압 벽화는 소그드 궁정의 벽화라고 볼 수 있다. 소그드인들은 고대 이란계 민족 중의 하나다. 소그드 지역은 콰레즘, 마르브, 발크, 니사, 헤라트, 카불 등과 같이 아리안족이 처음으로 정주한 곳이다. 소그드 궁정에 온 투르크인들은 사신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이 벽화를 통해 소그드인의 화려한 외교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해온 소그드인들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1세기 동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페르시아 고대 문명의 유산과 그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소그드 궁정이 있던 사마르칸트의 고대 벽화는 한국과 고대 소그드 왕조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고대 페르시아의 마지막 세기라고 볼 수 있다. 소그드 비문의 해설과 분석을 토대로 놓고 볼 때, 두 사람의 한국 북부 지역(고구려일 가능성)의 사신이 사마르칸트 왕실의 왕자 혼례의 연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하객들을 그리고 있다. 벽화의 일부가 아프라시압 통치자의 궁정에서 발견되었으며,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는 각국 사신들 중에서 고대 한국의 대사(외교관)를 보여주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이 역사적인 증거는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의 정치적인 인물의 출현을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우리에게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 아래 있던 소그드 궁정을 기준으로, 페르시아 사산 제국의 영토와 한반도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벽화의 그림은 고대 페르시아 문명을 축으로 고대 한국의 북부 지역과 소그드 국가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대 한국인들의 풍부한 문화적 바탕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애쉬커니(파르티아, 중국명 안식, 기원전 247~기원후 224)와 사산(기원후 226~642)조의 요소들이다. 즉 페르시아 고원과 영토 속의 고대 신화, 상징 체계들은 조로아스터 문명을 축으로 해서 고대 한국과의 끊을 수 없는 결합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아프라시압 벽화는 여러 나라의 사신 중에서 한국 사신을 나타내면서, 중앙아시아와 한국의 관계에서 밀착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벽화는 페르시아 애쉬커니와 사산조의 유산을 반영하고, 결과적으로 한국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대 한국은 조로아스터 시대로 명명되는 고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문명의 영토 속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왕조, 애쉬커니 제국의 또 다른 유산을 보자.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보이는 <수렵도>는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고대 왕조였던 애쉬커니 제국의 <수렵도>와 구도가 동일한데, 이는 돈황 벽화에 보이는 그림과 다르지 않다. 돈황 벽화와 고구려의 수렵도 벽화가 다르지 않아 중국인들은 돈황 예술이 고구려 예술에 끼친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런 중국의 설명은 고대 페르시아 종교, 문화, 예술이 고대 중국과 한국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지크(이란)계 이태백과 페르시아 문화
지금부터 거론하는 중국 시인 타지크계 이태백(701~762)의 이야기는 서두에 언급한 쿠쉬나메와 시대적 배경을 같이하고 있으며, 페르시아인들의 당나라 이주와 관련되어 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마지막 황제 야즈드 갸르드 3세는 642년 도주했으며 마르브(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의 도시) 부사(府使)의 명령으로 피살되었다. 야즈드 갸르드 3세의 왕자, 피루즈 3세는 부친이 처형된 후 토카레스탄으로 갔으며, 중국 황제는 662년 그를 페르시아의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후 피루즈는 중국으로 가서 황제의 특별 후견인의 지위를 얻었으며, 677년 장안에 조로아스터(배화)교 사원을 건립했고 그해 세상을 떠났다. 왕자 피루즈와 같이 중국으로 피신한 페르시아 사산조의 고관대작들은 장안에 정착했는데, 정치·문화적으로 당나라 황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금부터 타지크계 이태백에 관해 언급하려 한다.
중국 문학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태백에 관해, 그가 타지크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일부 이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출신조차 불분명한 시인과 중국의 최대 시인.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태백을 이렇게 부른다. 일부 이란 학자들은 이백(자는 태백, 701~762)의 부친이 호라산 지역의 주지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태백은 5살 때 가족과 함께 중국 사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태백은 당시 코라손주의 쇄엽(현재 키르키즈스탄의 토크마크 부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나, 중국 문헌에 따르면 679년 쇄엽은 당군이 점령, 주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 당서(唐書)에 나오는 쇄엽은 Suyab의 음사이며, Suyab은 Suy(수이)+Ab(페르시아어로 ‘물’을 뜻하며, 여기서는 ‘강’을 의미함) 즉 ‘수이강’ 이라는 뜻이다.
당시 코라손 지역은 현재의 이란의 동부 지역인 코라손주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일부 지역까지 포함하며 코라소-네-보조르그(대(大)코라손권)로 불렸다. 코라손 지역은 근대 들어 교류가 활발하지 않지만 이란계 민족인 타지크인들이 대체로 거주하며, 중세 대코라손권은 교류가 자유로웠던 당시 가장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지금의 타지키스탄에 인구 1천만 명의 타지크인이 살고 있으며, 고대 북부에는 소그드인, 남부에는 박트리아인이 거주했다. 1924년 10월 이전의 타지크권은 현재의 타지키스탄 면적의 최소한 3배가 넘는다.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아시아 국경을 획정한 1924년을 기준으로, 영토 분할 문제에서 손실을 가장 많이 본 민족이 타지크인이다.
역사적으로 호인(胡人)은 여러 민족을 지칭하지만, 이태백이 살던 당(唐)대에는 대체로 이란계 민족을 말한다. 고대부터 이란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타지크 민족을 포함해 이란에서 중국 서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거주했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태백의 부친이 이씨 성을 선택한 것과 관련해서 볼 때 안씨, 정씨, 국씨 등과 함께 이씨도 이란(타지크)인 계통의 성씨일 가능성이 있다. 8세기 중국은 이란(타지크)계 호족 출신의 당나라 정권이 세력을 쥐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당의 이씨 황실은 혼혈족이라고 알려져왔으나, 최근 <중국국가지리>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이씨 황실이 호족 정권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중국에 이슬람이 도래하기 이전 중국인들은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서역인을 ‘호인’이라 불렀다. 물론 페르시아 왕조의 중국명에 따라 ‘안식(安息)인’, ‘파사(波斯)인’ 등으로도 불렸다.
페르시아 사산(기원후 226~642) 시대의 이란계 언어는 국어인 파흘라비어 이외에도 소그드어, 콰레즘어, 코탄어와 박트리아(토카리)어 등이 존재했다. 이란계 민족이 기술한 이 언어들로 쓰인 문헌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돈황에서 소그드어로 된 50권 이상의 불교 문헌과 불교 문헌을 비롯해 여러 주제가 포함된 100권의 코탄어 서적이 발견되었다. 사산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과의 관계 정립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사산조 최고의 성군으로 불린 왕조 말기의 코수루 1세는 중국의 공주와 연분을 맺기도 했다. 고대 동양의 대제국을 형성한 페르시아 사산조가 아랍의 침략에 멸망한 사건을 두고, 20세기 이슬람권 최고의 철학자이자 시인 중의 한 사람인 모함마드 이크발(1877~1938)은 페르시아의 패망을 ‘1300년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불렀다.
이태백의 시대를 전후해서 보면, 아랍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이에 따라 이란계 민족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일부 이란 학자들은 7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에 수많은 페르시아(타지크)인들이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역사서에도 이 왕조의 수도에 수천의 페르시아인들이 출현했다는데, 시기적으로 8세기로 언급되어 있다. 이태백이 살던 시대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한 726년 부하라(페르시아 문명의 영향 아래 있던 지역으로, 현재도 다수 주민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왕은 사신을 당의 조정으로 보내 아랍의 공격에 대항해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8세기 아랍의 공격이 지속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일부는 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에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이 다양한 중국 도시로 이주했다고 역사서는 언급하는데, 소수민족 중에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출신의 이란인들이 현저하게 많았다고 한다. 물론 수도 장안에 거주한 페르시아인들은 대부분 사산조 궁정의 고관과 최상류층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주요 인물이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은 수도에 많이 거주했는데, 당나라 황실, 고관과 최상류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인들의 삶의 특성, 관습, 습관, 심지어 사산조 복식 착용까지 당나라 황실과 고관들은 모방했고, 감탄의 수준을 넘어 탄성을 연발했다고 한다. 이후 황실의 범위를 넘어,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의 특성은 서서히 중국 도시의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성행했다. 이런 페르시아인의 영향은 너무 광범위하고 깊게 각인되었으며, 페르시아인들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을 형성했다.
중국에 이슬람이 도래한 후 ‘호’는 서서히 ‘회회(Hoihoi)’로 대체된 것으로 보이는데, 회회는 ‘퍼르시 던’(Farsi Dan· 페르시아어를 알고 있는)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회회어는 페르시아어라고 볼 수 있다. 이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컨대 중세 인도(파키스탄) 아대륙에서 페르시아어는 11세기부터 무갈(1526~1858) 왕조까지 8세기 동안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경우, 이슬람을 중국에 선교한 언어가 페르시아어였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당대의 문화에 페르시아 문화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당대 이후 원대에 페르시아어는 4대 공용어로 쓰였으며, 특히 명대에 이르러 페르시아어는 절정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중앙아시아의 경우,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의 국립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1200년(8~20세기) 동안의 필사본 중에서 80%가 페르시아어(중앙아시아의 타지크어)로 쓰여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반증하고 있다. 중세 동양만 보더라도, 페르시아어는 문명의 언어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온 것이다. 페르시아 본토에서 베이징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어는 그야말로 실크로드 최고의 언어로 군림했다.
중국인들은 회회의 명칭을 민족에 따라 구별하지 않고 무슬림과 관련지어 사용함으로써, 이슬람교를 성립시킨 아랍과 동일한 용어로 대체되어 학문적으로도 엄청난 혼선을 빚고 있다. 우선 페르시아권 지역에 셈족의 외래 종교인 이슬람이 도입된 시기를 기점으로 페르시아의 고유 종교와 이슬람을 구분해야 한다.
이슬람권에서 아랍과 페르시아의 용어를 구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서역과 중앙아시아에서 타지크와 투르크의 용어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인문학의 전 분야가 혼동되어 큰 혼란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 타지키스탄 이외의 지역은 타지크인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고대 중앙아시아와 서역은 이란(타지크)계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는데, 10세기 이후 특히 16세기 순니파 우즈베키스탄 민족의 등장으로 중앙아시아와 이란 본토 간에 페르시아인의 분열은 가시화되었으며, 중앙아시아의 고대와 중세의 학문적 영역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고, 학문적 왜곡은 도를 넘었다. 이런 고대와 중세의 학문적 왜곡은 근·현대의 인문학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태백의 논쟁은 이런 민족적 구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중앙아시아와 서역에서 거주한 이란계 민족과 그들의 문명이 고대 중국의 정신문화와 학문을 얼마나 풍요롭게 가꾸었는지 새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일부 이란 학자들의 타지크계 이태백에 관한 언급은 출생을 포함해 그의 사상적 토대를 밝혀내고 많은 궁금증을 풀어내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태백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오랑캐(胡)의 명칭을 자신의 종족을 지칭할 때 사용했을까? 고대 페르시아의 신앙이던 미트라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는 이란 아리안의 사유체계였다. 이런 종교는 페르시아에서 세력을 얻어 본거지를 형성한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서 페르시아 혹은 동방 교회로 불림)와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 그들의 정신세계를 형성해주었기에 오랑캐의 문명과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주해온 페르시아 사산조 백성의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 중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의 추종자들이었다. 당시 장안에만 4개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하나의 마니교 사원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교회가 있었고, 중국의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다.
이백의 시는 도가사상으로만 풀어내고 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가 도가사상에 끼친 영향에 관해 국내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란계 아리안의 근본적인 사유 체계는 미트라교-조로아스터교-불교-수피즘-마니교로 연결되는 신앙 체계이다. 고대 페르시아 종교 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는 계보이며, 이는 페르시아 고유의 범신론적 사상으로 셈족의 일신론인 이슬람이 유입되기 이전, 이란 아리안족의 사유 체계이다. 이 흐름에서 볼 때, 불교 사상은 수피즘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페르시아 수피즘은 페르시아 불교가 잔존된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태백의 도가사상은 잔존된 페르시아 불교사상, 즉 수피즘과 맥락을 공유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당의 도교 역시 페르시아인의 사유 체계인 수피즘과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
이슬람권 국가와 지역에서 흔히 쓰이는 ‘수피(Sufi)’라는 용어는 도인(道人)의 의미이며, 이는 도교에서 말하는 도사(道士)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2세기 서역에 유입되기 시작한 페르시아 불교는 초기 중국 불교의 토대를 형성했다. 조로아스터교가 불교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며, 대승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었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노자의 도가사상에 근본적인 주춧돌을 제공했다. 중국 문명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노자와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만남은 실크로드 속에 피어난 문명 교류의 아름다운 노래이자 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글은 동양에서 페르시아와 중국, 한국과의 오랜 역사 속에서 맺은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각 문명 간에는 상보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며,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페르시아학과 문명이 한국과 중국학에 끼친 영향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 문명이 거대한 페르시아학과 그 문명 속에 놓여 있었으며, 수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 학자가 학문 전체를 조망하고 아우를 수 있는 역량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진실을 찾는 세계학문 위원회’(?)를 제안하고 싶다. 한국에서도 각 지역 전문가들이 모여 진리를 찾는 작업에 힘을 모아야 한다. 학문은 진리 추구이며,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서적을 발간하여 전 세계를 상대로 오류와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도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 발간되는 두꺼운 양장본 안에는 진실이 뒤틀려 왜곡된 채 발간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자세하게 써놓은 수많은 문헌과 학문적 분야에서 핵심적인 사항이 놀라우리만치 절단되어 학문적 계보를 무너뜨리고 있어 학문 간, 지역 간의 연계성을 단절시키고 있다. 학문의 교류와 소통을 위해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세계 인문학의 왜곡과 오류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왔다. 고대에는 페르시아와 인도, 페르시아와 중국, 페르시아와 그리스,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중세 시대 페르시아와 아랍, 페르시아와 스페인 사이에는 수많은 학문적인 왜곡과 오류가 존재한다. 이런 오류와 왜곡은 고대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좀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문적 진실을 향한 관심과 열정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글•신규섭
파키스탄의 카라치대학원에서 페르시아어 석사를 마치고, 펀자브대학 동방학대학에서 페르시아어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란,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관련해서 30여 편의 논문과 글이 있으며, <페르시아 문화>(살림·2004), <신비의 혀(페르시아 소네트)>(나남·2005), <천하루 밤 이야기>(웅진·2007), <세방울의 피>(명지·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