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주체, 타자, 욕망…그리고 지적 교류의 장
세계 사르트르연구회 콜로키움 참관기
2013-07-09 변광배
세계 사르트르연구회(GES: Groupe d'études sartriennes)의 2013년도 연례 콜로키움이 6월 21~22일 이틀간에 걸쳐 소르본대학(파리4대학) 소재 귀조(Guizot) 대형 강의실(귀조는 프랑스 교육부장관과 프랑스 한림원 회원을 지낸 바 있는 정치인이자 행정가)에서 개최되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9년에 창설된 이 연구회는 그 이후 매년 6월 마지막 금·토요일에 정기적으로 콜로키움을 개최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태어난 날이 6월 21일(1905년)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콜로키움이 6월 21일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로 정확히 사르트르의 생일을 기념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번 콜로키움에는 프랑스는 물론 미국, 캐나다, 벨기에, 독일, 한국, 일본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60여 명의 사르트르 연구자들이 참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필자와 불문학자 윤정임 선생님이 참가했다. 윤정임 선생님은 바쁜 와중에도 이번 콜로키움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수고를 해주었다.
올해 콜로키움 주제는 ‘전쟁 중의 사르트르:1943년을 중심으로’였다. 1943년을 전후한 시기는 사르트르의 지적 여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먼저 1943년은 사르트르의 전기 사상이 집대성된 <존재와 무>가 출간된 해로 기억된다. 이 저서는 오늘날의 사르트르를 있게끔 한 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간 직후 이 저서는 후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와 작가가 된 들뢰즈와 투르니에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들뢰즈는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스승’으로 호칭했고, <존재와 무>를 대학 제도권 바깥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으로 여겼다. 소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1967)으로 잘 알려진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투르니에는 1943년에 <존재와 무>-정확히 무게가 1kg이었던 이 저서는 그 당시 야채시장에서 과일이나 채소 등의 무게를 재는 분동(分銅)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를 처음 접하면서 “우리는 눈앞에서 하나의 철학이 태어나는 것을 목격하는 전대미문의 행복을 누렸다. 우리는 이불을 두르고, 토끼 가죽으로 발을 감싼 채, 하지만 뜨거운 머리로 새로운 성서인 722쪽짜리 책을 소리 높이 읽으면서 그 전쟁의 겨울, 어둡고 얼어붙었던 겨울을 보냈다”고 <성령의 바람>에서 술회하고 있다. 출간 당시 이와같은 의미를 부여받은 <존재와 무>는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일까? <존재와 무>에 대해 제기되는 이와 같은 질문이 바로 올해 콜로키움 주제가 ‘1943년’으로 정해진 이유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우스꽝스러운 전쟁 수첩>을 들 수 있다. 사르트르는 1939년 9월에 전쟁에 동원된다. 그 이후 사르트르는 기상관측을 하면서 9개월 동안 이른바 ‘우스꽝스러운 전쟁’을 치른다. ‘우스꽝스러운 전쟁’이란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직접적인 교전은 드물었고 기이하게도 조용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이 기간에 하루 평균 12시간씩 메모를 작성하면서 약 2천쪽에 달하는 수첩을 채웠다. ‘전쟁 수첩’이라 불리는 이 수첩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상실되었으나 그중 일부가 발견되어 후일 <우스꽝스러운 전쟁 수첩>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 저서는 사르트르가 후일 자신의 철학과 문학에서 다루게 될 모든 주제의 싹을 담고 있는 일종의 ‘실험실’로 여긴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진 이 책의 의미에 대한 천착, 이것이 이번 콜로키움의 주제가 ‘1943년’으로 정해진 또 하나의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르트르의 이른바 ‘급격한 변신’을 꼽을 수 있다. 사르트르는 1940년 6월 21일 자신의 생일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1941년 3월에 석방될 때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겪는다. 사르트르에게 이 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사르트르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인간에서 상황에 처한 인간에 대한 이해로 관심을 옮기게 되며, 사회와 역사적 지평 위에 선 구체적 인간들 사이의 연대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1941년 3월 이후에 사르트르는 파리로 돌아와 철학을 가르치면서 예전의 생활을 되찾는 한편, 독일군에 저항할 목적으로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드장티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레지스탕스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사르트르는 1943년에 <파리떼>를 상연함으로써 독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저항 의식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1943년을 전후한 시기는 이처럼 사르트르가 독일 점령으로부터의 해방 이후를 염두에 두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심각하게 궁리하던 시기였다. 그런 만큼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이 해는 일종의 ‘전환점’, 혹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특이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르트르 자신은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나 자신의 삶은 전쟁 전과 후로 양분되는데, 전쟁 전의 모습에서 전쟁 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술회했다. 이런 이유로 2013년 콜로키엄 주제가 ‘1943년’으로 정해진 것이다.
콜로키움 첫날이었던 21일에는 주로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오전과 오후에 걸쳐 5명이 발표를 했으며,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개념들, 가령 ‘주체의 익명성’, ‘비인칭적 주체’, 자기기만’ 등과 같은 개념들과 들뢰즈, 데카르트, 라벨 등과 같은 프랑스 현재와 과거 철학자들, 그리고 미국의 심리철학자 데이비드슨 등이 다룬 개념과의 비교,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존재와 무>에서 개진된 사르트르의 사유가 단지 실존주의, 현상학, 존재론 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들뢰즈에서 멀리는 미국의 심리철학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계 속에서 연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또한 <존재와 무>가 가진 현재의 생명력은 무엇보다도 198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여러 개념, 가령 익명의 주체, 비인칭적 주체, 타자, 신체, 욕망, 자기기만 등과 같은 1943년 당시로는 대담할 정도로 참신한 주제를 사르트르가 선취했다는 점에서 기인하다는 것이 발표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첫날 오후에는 벨기에 사르트르 연구의 ‘대부(代父)’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 페어스트라에텐을 추모하는 원탁토론이 이루어졌다. 사실 전세계 사르트르 연구에서 벨기에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브뤼셀자유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페어스트라에텐의 공적이다. 지금 그의 제자들이 세계 사르트르연구회의 철학 연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다. 특히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연구에서는 벨기에 학자들의 연구는 다른 나라 연구자들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페어스트라에텐은 사르트르로부터 아주 드물게 자기 사상의 ‘계승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던 인물이다. 페어스트라에텐은 특히 사르트르의 사회, 정치철학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표명했으며, 그 자신 역시 벨기에 사회의 부정,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학위논문에서 사르트르의 폭력 문제를 다루면서 페어스트라에텐이 제시한 문제틀을 비판하고 발전시킨 바 있어 원탁토론이 진행되는 내내 남다른 감정에 사로잡혔다.
6월 22일에 속개된 콜로키움에서 발표자들은 주로 사르트르의 문학에 관심을 표명했다. 현재 세계사르트르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미셸 콩타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오전 발표에서는 이 연구회의 핵심 멤버들이자 현재 프랑스 소재 대학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구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사르트르 연구에서 철학이 주로 벨기에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주로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사르트르의 사회, 정치철학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독일에서는 의외로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가 미미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1943년을 전후해 프랑스에서는 전쟁 후를 내다보는 다양한 문학 흐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프랑스 문학장의 중심에서 활발한 활동한 드리유 라 로셸의 경우는 주로 전쟁에서 패배를 맛본 프랑스 국민의 일원으로서의 자기 비하, 자기 증오 등을 주제로 비관적, 자기도취적, 퇴영적 글쓰기로 경사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에 협력하는 자세와 반유대주의 태도를 지닌 것과는 달리, 사르트르는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같은 소재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글쓰기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파리3대학 교수였던 자크 르카름의 주장이었다.
이어서 파리1대학 교수인 미셸 시카르는 전쟁 중에 사르트르가 발표한 글인 <침묵의 공화국>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이 짧은 글에 사르트르의 후기 사상의 거의 모든 주제, 가령 권력, 민주주의, 연대성, 공동체, 서약, 희생, 전체주의 등과 같은 주제들이 이미 맹아의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시카르 교수는 특히 전쟁 중에 독일군의 고문 앞에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던 프랑스인들의 입장을 아감벤의 ‘벌거벗음’이라는 개념과 연결해 논의를 함으로써 사르트르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이어서 현재 세계 사르트르연구회 문학 분야 총무를 맡고 있는 알렉시스 샤보는 <우스꽝스러운 전쟁 수첩>에서 사르트르는 그 당시 프랑스 사회를 지배했던 여러 ‘비진정한’ 철학적 사유, 문학적 실천 등에 맞서 일종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전(內戰)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오후에는 미국 사르트르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존 아일랜드가 사르트르의 여러 극작품을 통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상연된 <파리떼>에서 볼 수 있었던 과격한 폭력 장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르트르의 극작품에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해 주었다.
이번 2013년 세계 사르트르연구회 연례 콜로키움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는 젊은 연구자들의 대거 참석이었다. 현재 박사과정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 연구자들의 발표도 발표려니와 그들의 관심사가 특히 사르트르의 사유를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 비교,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어 사르트르 연구에 대한 앞날을 밝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쉽게 느낀 것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많은 연구자들이 노쇠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페어스트라에텐은 세상을 떠났고, 사르트르 연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는 미셸 리발카의 불참, 사르트르의 친한 친구던 니장의 사위인 올리비에 토드의 불참 역시 그들의 건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울적했음을 밝힌다. 요컨대 2013년 세계 사르트르연구회 연례 콜로키움은 젊은 연구자들에 대한 희망과 퇴장하는 기성 연구자들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한 지적 교류의 장이자 만남의 장이었다.
글•변광배
프랑스 몽펠리에3대학에서 사르트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프랑스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를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르트르와 20세기>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 <장 폴 사르트르-시선과 타자> <존재와 무-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