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옛 터, 먼지 날리는 벌판에는 옥수수만이…

2013-07-10     이상엽


2012년 중국 지안의 한 개천가에서 고구려 시대 비석이 하나 발견됐다.
중국학자들은 1년간의 연구 끝에 이것이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을 위해 그의 아들 19대 광개토왕이 세운 고구려 최고의 비석이라고 발표했다. 한국학계도 떠들썩했다. “비문이 조작된 것 같다”는 동북공정 음모론부터 “문체로 보아 장수왕이 세운 것”이라는 견해까지 오랜만에 고대사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고대사의 재발견과 동북

꽤 오래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고대사와 관련한 실크로드나 차마고도 등을 취재해온 터라 나로서는 ‘고구려비’ 역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재였다. 하지만 10년 전 선양에서 단둥까지 동북 지역을 돌아다닌 소감은 ‘참으로 별 것 없는 풍경’이었다. 사진 찍는 자에게 시각적인 새로움이 없다면 깊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방인의 눈으로 그마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래서 한동안 이 지역은 내가 공부하고 훗날 돌아봐야 할 공간이기도 했다. 고구려비는 그런 의미에서 내 동북 여행의 촉매 역할을 했다.

가봐야 할 빌미를 준 것이다. 오래전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 답사에 태극기 들고 대거 여행객들이 몰려가서 중국 정부를 자극해 동북공정을 촉발시킨 데 비하면 요즘은 이곳으로 여행 가는 한국인이 별로 없다. 그것이 좋다. 내 여행의 원칙이 있다면 사람이 몰려드는 곳은 절대 가지 않는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은 늘 진실이었고, 허다한 사람들이 본 풍경은 이미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히 한국인에게는 ‘만주 땅’이라 불리는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그리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다. 그저 우리 심상에 고대로부터 인연이 있다고 믿는 역사적 공간일 뿐이다.

고대사의 재발견과 근대 국민국가의 역사에는 꽤 먼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문헌 중에서 이 지역을 언급한 것은 1445년 간행된 <용비어천가>로, 금나라 황제의 성에 비가 서 있고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고 썼다. 이는 고려 공민왕 때 압록강을 넘어 지안을 통과한 이성계가 본 것이다. 그 비는 광개토왕비였고, 2개의 무덤은 장군총과 태왕릉이었다. 그곳이 바로 500년 가까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었다는 것을 당시 아무도 몰랐다. 조선조 내내 그랬다. 17세기에는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지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청조 말에 느슨한 틈을 타 19세기 말부터 다시 사람이 살면서 지안의 광개토왕비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문헌에 나오는 고구려이며, 지안이 고구려 국내성이었다.


동북의 세 가지 한국인

본격적인 동북 여행은 랴오닝성 환런이다. 고구려를 개국한 고주몽이 처음으로 세웠다는 홀승골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이 있는 곳이다. 그곳부터 찾았다. 고주몽의 허묘라고 알려진 거대한 장군묘가 서 있는 미창구 지역. 이곳은 조선인들이 일찍부터 자리 잡은 곳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언제쯤일까? 청나라가 명을 제압한 1644년 입관 후 청조의 발생지를 보호하고 귀족의 경제적 영토이던 곳의 침탈을 막기 위해 1677년 취해진 정책이 봉금령이다. 이때부터 만주 지역은 장장 200년 동안 인적이 끊겼다. 이곳 환런의 미창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작고한 조선족 출신 소설가 류연산 선생은 그의 저서 <고구려 가는 길>에서 한 일화를 전한다. 환인 땅에 처음으로 이주해온 사람은 이기춘이었다. 그는 평북 신의주 사람으로 1856년 오리전자에 이사 왔다. 처음 이사 올 때 동북 땅은 거친 황무지였다. 비바람 막을 곳도 없었고, 입에 풀칠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호미로 나무 뿌리를 뽑고 풀을 베고 논을 풀었다. 동북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한 곳이 환인의 미창지구 상전자, 하전자였다. 1875년 일이다. 나는 이곳에 여전히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지 찾아봤다. 다행히 목을 축이러 들른 소매점 주인 여자가 조선족이었다. 하도 말씨가 자연스러워 물어보니 서울에서 5년 동안 일했단다. 가게 앞에서는 군복 차림의 농민 최씨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말이 어눌했다. “내레 소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붑니다. 그나마도 우리 마을에는 조선족 학교도 없어졌디요.” 아마 평안도 말씨의 최씨는 아주 오래전 이 땅에 정착한 조선인의 자손일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흔히 이 지역에 오면 조선족을 쉽게 만나리라 생각한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은 200만 명으로 꽤 유력한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지만 길림성 일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한 옛날과 달리 지금은 모두 중국 내 대도시로 산개하고 말았다. 이농현상이 심화된 것도 있고, 한국으로 이주노동이 가능해진 것도 한몫한 탓이다. 그 때문인지 요즘 이 지역에서 조선말을 쓰는 다른 두 부류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북한에서 넘어온 이들이다. 환런을 떠나 지안 버스터미널 근처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한 30분쯤 지났을까? 방으로 찾아온 이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중국 공안이었다. 전부터 이 지역에서 고구려 관련 유적을 찍다가 공안에게 발각되어 추방됐다는 주변 동료 사진가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은 터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그냥 관광하러 온 것이다.” “기자는 아닌가?” “사진 찍으러 왔다.” “한국인인데, 그럼 뭘 찍을 건가?” “그냥 고구려 유적 볼 거다.” “그렇다면 압록강에 나가서 북한은 찍지 마라. 문제 생긴다.” “알았다.”

도착부터 한국말 쓰는 나를 감시한 것이다. 이곳이 압록강을 사이에 둔 국경지대라는 것이 실감 났다. 하지만 왠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악동같은 사진가 체질이 발동한다. 카메라를 들고 압록강변으로 나갔다. 지안시 맞은편은 북한 만포시다. 압록강이 뭔 조화를 부렸는지 지안 쪽은 넓은 평야를 만들었는데 만포 쪽은 산과 절벽이다. 강 중간의 하중도 때문에 사람이 쉽게 건널 수 있지만, 중국 쪽도 북한 쪽도 국경 수비대를 볼 수 없다. 이곳 사람에게 들어보니 “중국 쪽에서 북한으로 건너갈 사람 없고, 북한 쪽에서 건너오는 것도 막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경제적으로 잘나가는 중국인들의 오만이 쓰다.


내게 동북은 무슨 의미인가?
 
동북은 여전히 구리다. 촌스러움과 낙후됨이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빛과 공기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이 어지간해서는 카메라를 자극하지 못한다. 중국 동부 해안의 도시들은 점점 더 잘살고 서부 개발로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도시들도 빛을 발하는 요즘, 동북은 여전히 가난하다. 게다가 북쪽으로 몽골과 러시아, 남쪽으로는 북조선이 국경을 불안하게 한다. 온전하게 중국의 경내로 들어온 지 1세기가 채 안 되는 공간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서 근대 국가 형성기의 국가들이 고대에 지나치게 투영해 읽어낸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민족의식을 투영한 역사 해석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근대의 국민의식을 전제로 제각각 고대 이래 자기 완결적으로 민족사를 걸어온 것처럼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았다”는 일본 와세다대학 이성시 교수(동아시아 역사 전공)의 지적은 이곳 동북에서 완전히 유효하다. 이곳은 고래로 변방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한반도 입장에서도 또는 멀리 일본에서도 이곳은 변방이었고, 그 경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침략과 후퇴를 반복했다. 따라서 평화롭기보다는 끊임없이 유동했다. 부여인, 고구려인, 발해인, 거란인, 선비인, 몽골인, 만주인 등. 그들의 역사는 이제 중국사나 한국사에 편입됐지만, 지안의 고국원에 우뚝 솟은 광개토왕비는 ‘고대인 것은 고대인의 이야기로 읽어달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내년이면 광개토왕비가 건립된 지 1600년이 된다. 올해 시작된 내 동북 여행이 쭉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의 소멸과 묘한 애착이 무척 쓸쓸한 여정을 예고한다.

글/사진•이상엽
다큐멘터리 사진가 겸 르포라이터. 프레시안 기획위원. <레닌이 있는 풍경> <파미르에서 윈난까지> 등을 쓰고, <이상한 숲 DMZ> 등의 개인전을 했다.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늘의 포토’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지금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로 ‘비정규 노동자의 얼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