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푸엔테스, 바로크적인 파괴에 대하여
걸작 자격에 대한 타당한 판단을 내릴 때다. 모든 표현과 해석 시스템을 벗어나는 진실의 효과를 생산하고, 소설 기법만이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경험 일부를 들춰내야 걸작인 것이다. 이것은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가 발전시킨 헤르만 브로흐(오스트리아 출신 소설가)의 명제였다. 한편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끊임없이 이 명제를 다시 사용하며 확장시켰다. 푸엔테스의 역설과 모호함, 항상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폭력의 기저, 뒤엉킨 많은 그의 기억들에서 뭔가 멕시코의 사정을 알아내고 싶다면 역사, 철학, 정치·사회적 담론보다는 <가장 청명한 땅>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 <크리스토프와 달걀> <유리 국경> 같은 그의 소설을 읽는 게 낫다.
푸엔테스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젊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은 작품 경향을 선택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리얼리즘이나 상상 혹은 환상 진영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국가 현실에 안주하거나 국제 개방을 지지해야 했다. 혹은 몇몇 작가(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코르타사르,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요사, 쿠바의 호세 레사마 리마)와 함께 선택을 거부하고 경직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편견이 악착같이 반대하는 것과 화해하려 노력했다. 이것을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붐’이라 일컫었지만, 이는 십중팔구 20세기 후반기 등장한 가장 특별한 소설 기법의 쇄신이었다.
이런 운동을 통해 푸엔테스는 일종의 단합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대개는 이론가로 인식됐다. 이 운동이 학파 모임은 아니지만, 소설가들은 모임을 같이 하는 것 이외엔 저마다 비타협적인 고유의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단합을 추구하는 푸엔테스가 눈에 띈다. 한편 그는 분명 이들 중 가장 열렬한 발자크 추종자이다. 그가 이전 세기의 산물인 표현 코드가 마음에 들어 그 코드에 순응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장 자유분방한 상상 속에서나마 냉혹한 사회의 얼굴을 묘사하고 싶은 야망을 끊임없이 간직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몇몇 걸작을 뽑는다면? 다양한 목소리와 시각을 통해 모순적이고 폭력적인 현대 멕시코의 모든 기원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걸작은 <가장 청명한 땅>과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이다. 그리고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폭소와 공포의 회오리”라 평해 멕시코를 카니발풍의 종말로 몰아넣은 반(反)유토피아의 절정을 그린 <크리스토프와 달걀>은 어떤 사실적인 이야기보다 멕시코의 어두운 면을 잘 드러냈다.
푸엔테스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은? 물론 <우리의 땅>이다. 20세기 한 멕시코인은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괴물 같은 책 속에서 이전의 스페인, 신세계를 꿈꾼 스페인을 그린다. 1975년 소설 <우리의 땅>이 출간되면서 스페인은 갑자기 독재자 프란스시코 프랑코의 악몽에서 깨어나며 진실을 말하는 소설과 직면한다. 이를 테면 스페인의 기원신화와 이 신화의 붕괴에 동시 직면한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 속에서 동시에 여러 장소와 시기를 섭렵한다. 소설 주인공들은 변신하고 환생한다. 줄거리는 종잡을 수 없이 변형된다.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소설이나 신화- <천상의 예언>(La Célestine)이나 <돈 주앙>- 과 뒤엉켰다. 마법과 주술이 횡행했다. 주인공인 군주의 최대 관심사는 정통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순수성(정통성)에 대한 그의 강박은 그를 일종의 죽음의 종교로 이끈다. 반대로 그의 주변에선 현대에 걸맞은 해방의 꿈, 비정통성이 판을 치고, 또한 ‘신세계’(미국)의 발견은 그야말로 쇼크, 교회의 세속령(世俗領)에 대한 이상한 충돌을 빚는다. 이런 사고들이 교차하며 신기하게도 히스패닉 세계에서 억눌리고 인정받지 못하던 다양성이 부활한다. 예컨대 정권 전복을 부추기는 데 안성맞춤인 이 바로크풍의 눈부신 소설은 어떤 역사학자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깊이의 통찰력을 보여준다.(1)
위 작품과 함께 핵심 에세이도 같이 거론해보자. <땅 속에 묻힌 거울>은 전례 없이 라틴아메리카의 전반적인 문화를 다뤘다. 푸엔테스는 <에라스무스의 미소>와 <소설의 지리학>에선 몇몇 현대 유명 작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통해 암암리에 자기만의 소설 기법을 알려준다. 그는 인디언의 세계(‘천하를 호령하던’ 몬테수마의 세계)와 히스패닉의 세계(정복자, 즉 가톨릭의 세계)는 본질이 같은 강성 교리를 서로 공유하며 하나의 진리, 곧 똑같은 폭정을 유지했다고 지적한다.
푸엔테스는 이런 폭정에 소설이 만들어낸 세계로 맞선다. 소설 속 관점이 서로 대결하고 서로 반박하며, 언급되지 않던 것이나 억압받던 공인된 진실을 부각시켰다. 그의 세계에선 “어떤 목소리도, 어떤 사람도 진실을 독점하지 않는다. 소설은 주인공들의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언어, 다양한 역사적 시간, 그리고 모든 관계의 토대가 되는 문화의 장소이다.”
히스패닉의 신세계 정복은 피로 물든 파괴였는가? 그렇다. 신세계는 다양성이 풍부한 활기찬 혼합문화의 산물이다. 콜럼버스의 이전 사회는 파괴되었는가? 그렇다. 인디언의 상상력은 정복자의 언어 속에 갇히고, 인디언의 천국은 멕시코 국교에 따라 강요된 가톨릭 성상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실제로 푸엔테스의 많은 소설은 끊임없이 이런 것을 구현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를 만나보았을 때 공식적인 이미지는 절제 있고 공손하며, 수완 좋고, 총명하고, 굉장히 박식하며, 국제적이고, 눈부신 지적 메커니즘을 지녔다. 이외에도 자신도 모르게 슬쩍슬쩍 돌출되는 난해하고, 어둡고, 야성적이며, 비이성적인 면모를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그가 무장 해제한 순간 그의 인디언의 이미지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 지식인들은 때때로 “푸엔테스가 교묘히 자신의 사회민주주의 입지를 고수하며 펠리페 마리케스 곤살레스(스페인 전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프랑스 대통령), 빌 클린턴(미국 전 대통령) 같은 지도자들을 찬양했다”고 비판했다. 최근엔 그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 것을 문제 삼았다. 이런 비판은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푸엔테스를 그런 작가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황당한 일일 것이다. 누가 감히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국민투표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던 작가로 평가절하할 수 있는가? 또 빅토르 위고를 파리 코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로 평가절하할 수 있단 말인가? 푸엔테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와 라틴아메리카 지배를 끊임없이 규탄한 것도 평가해야 한다. 그는 정착된 세계 질서를 수용하며 반(反)전체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하지 않는 작가들과는 달랐다. 그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절교하고(2), 옥타비오 파스와 전설적인 불화를 겪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그러나 푸엔테스의 정치적 공헌은 다른 데 있다. 바로 그의 소설에 있다. 소설이 어떤 이론을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편협한 정치적 세계관에 의해 무시당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인간의 경험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회적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부당성, 권력남용, 불평등에 대해선 양보 없는 비판적 시각을 보낼 것을 주문하고, 원주민을 비롯한 소외된 사람들과 빈민층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문학이 정치인에 필요할 때는 그에겐 없는 목소리를 제공할 때다.” 소설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벙어리에게 발언권을 주고,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제공하는 것이다.” 푸엔테스는 대다수의 멕시코인들과 스페인의 후손, 그리고 인디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화 속에서 스스로를 인디언과 동일시하는 것을 봤다. 그럼에도 자신들과 함께 거주하는 실제 원주민의 운명엔 거의 무관심하다. 가장 흥미로운 정책 문건 중 하나는 아마 푸엔테스가 이 문제에 대해 멕시코 무장 혁명 단체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 마르코스와 나눈 서간체 대화일 것이다.(3) 그 외의 것들은 그의 소설을 읽으면 충분하다. 20세기에 그만큼 국민과 가까웠던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아마 카를로스 푸엔테스에게서 소설의 진정한 투사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에게서 소설은 마치 수호해야 하는 명분 같다. 그는 흥행과 시장이 결합된 독재에 굴복해, 지나치게 비정통적인 세상의 예술 시각을 위해 사람들이 투쟁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주변에 놀라운 연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 네트워크는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진정한 작가들과 연결되어 있다.
일종의 국경 없는 은밀한 장거리 공모, 즉 소설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훨씬 문학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간에 국제적 비밀이 형성되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은 지배적인 세상 시각에 저항하는 데 꼭 필요한 법정’이란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푸엔테스는 진부한 문학계에선 일반적으로 보기 드물게 예외적으로 형제애 자질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글•기 스카르페타 Guy Scarpetta
주요 저서로는 최근 출간된 <이미지 전쟁의 오류>(Le Cercle d’Art, Paris, 2010)등이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6월에 출간된 푸엔테스의 최근 소설 <La Volonté et la Fortune> 참조. 프랑스판 푸엔테스의 거의 모든 작품은 갈리마르(Gallimard) 출판 사에서 출간됨.
(2) Ignacio Ramonet, ‘두 명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르몽드 디플 로마티크>, 2010. 11.
(3) 모음집 < 멕시코를 위한 새로운 시대 >(Gallimard, coll)에서 발췌, 파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