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꿈, 유로화 개혁

2013-08-06     프레데리크 로르동

   
 
키프로스의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대통령은 “우리는 이미 유로존을 떠났다”고 인정했다.
키프로스의 화폐는 이미 독일이나 그리스와는 그 가치를 비교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유로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것일까?
통제 불가능한 혼란 대신,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유로화 탈피 논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좌파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유로화 개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긴축재정 속의 유로화가 아니라, 진보적이고 사회적이며 혁신적으로 변화할 거라 믿고 있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 유럽통화동맹이 제도적으로 고착화된 가운데 일말의 정치적 지렛대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불가능한 상황은 더 견고한 논의에 기인하는데, 이를 삼단논법으로 설명하겠다.

△대전제: 오늘날의 유로는 금융시장의 요구를 충족하고, 유럽 경제정책에 대한 금융시장 지배력을 체계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유럽 건설의 산물이다.(1) △소전제: 의미 있는 유로 개혁은 사실상 금융시장 세력을 해체하고 공공정책 결정 무대에서 국제 투자자들을 퇴출시키는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1) 금융시장 세력들에게서 지배력을 빼앗을 유로 개혁을 금융시장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절대 없다. (2)

이런 개혁이 조금이나마 정치적 일관성을 보이거나 이행되는 순간 첨예한 투기와 심각한 금융시장 위기로 인해, 대안적인 유럽 통화 건설 개혁은 제도화를 이뤄낼 일말의 시간적 여유조차 갖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 즉시 해결책으로 불거질 사안은 국내 통화로의 회귀일 것이다. 유로 개혁 실행이 심각하게 고려되는 순간, 여전히 유로 개혁을 믿고 있는 좌파에게 남은 선택은 무한정 무기력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그들이 회피하고 싶어 하는 국내 통화로의 회귀일 것이다.

여기서 ‘좌파’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좌파적 사상과 명목상의 무기력한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당은 일단 배제하겠다. 만족스러워서였건, 혹은 침묵했던 간에 지난 20여 년간 유럽 통합에 무관심하다가 유로의 모순을 깨닫고 유로가 무로 돌아갈까 당황한 대중도 여기서 배제된다.
오랫동안 지속됐던 평온한 지적 동면(冬眠)을 한순간에 만회할 수는 없다. 한밤중의 감미로운 단잠에서 깨어나, 적잖은 당황과 준비 부족 속에서 유로 살리기를 위한 최후의 비책 찾기 경쟁이 개시된 것이다. 실상 유럽통합주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빈약한 해결책은 허상일 뿐이다.

유로본드, ‘경제적 정부’ 혹은 ‘민주주의의 도약’이라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식의 환희의 합창은 한번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허울좋은 해결책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수긍의 문제일 수도 있다. 바로 유럽연합건설의 특수성이 정치적 갈취에 기인한 엄청난 행위였음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여기서 갈취당한 것은 무엇일까 ? 다름 아닌 국민의 주권 갈취를 의미한다. 마침 열렬한 유럽통합주의자들이기도 한 우파 내 좌파성향 세력들은 주권이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것으로 식별되는데, 이들은 주권이란 말을 즉각 ‘주권주의’로 몰아붙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들 “좌파세력”들은 국민주권의 주권이 결국은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단어임을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이들은 머릿 속에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일까? 본의아니게 이를 인정을 한 셈이 되는데, 결국 주권에 대한 거부는 유럽 내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부정과 진배없다. ‘국가로의 자발적인 회귀’를 외치는 주장은 결국 국민주권의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음이다. 프랑스 내 국민전선 지지율이 25%에 달한 사건이 큰 파장을 가져왔건만, 혹시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가 주권 해체와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을 의미하는 주권이 아닌, 자결권을 갖는 국민의 역량으로서의 주권 말이다.

예산 및 통화부문에 대한 국가의 경제정책이 협약에 규정된 기계적인 행동규범에 의해 좌우되도록 결정함으로써, 헌법상 절차를 통해 국가 경제정책을 무력화시킨 유럽에게, 국민주권에 남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2005년 유럽헌법조약 투표의 찬성자들은 반대파들의 핵심논거가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조약, 1997년의 암스테르담조약, 2001년 니스조약에서 사실상 획득된 내용인 유럽헌법조약 제3장에 기인함을 모르는 양 가장했다. 그 내용은,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상황의 재편성 가능성과 역행가능성이 항구적으로 존재하느냐의 여부인데, 공공정책결정권이 국가로부터 탈취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재확인하고 있다.

조약이 일단 규범화되면 더 이상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그에 대한 어떤 논의를 할 여지조차 사라진다. 통화정책, 예산수단들의 운용, 공공부채수준, 적자해소를 위한 재정확보 등 이 모든 근본적인 지렛대들이 조약안에 굳어져버린 것이다. 인플레이션수준에 대한 결정권이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관할에 놓여 전면 차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하는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재정적자수준이 사전에 결정되어 있고 경상수지 상한선이 책정된 상황에서 어떻게 예산정책을 논의할 수 있을까? 국가들이 금융시장에서만 오직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부채를 없앴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 부재하기에, 혹은 질문들이 헌법상의 현상황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통합주의라는 발명품대회에 출품된 보잘것 없는 발상들은 핵심문제들을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회당이 20년간 내세워 온 공허한 제안인, 유로존 내 ‘경제적 정부’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통치의 대상이 되는 소재들이 통치권에서 박탈되어 조약이란 이름 하에 굳어져 버린 상황에서 더이상 통치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데 말이다.

겉보기에는 금융부문 고도화라는 큰 약진을 이룬다고 하지만, ‘기술적’ 메카니즘이라는 유럽전략과 연계된 유로본드는 고안자들이 기대한 특성이라고는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다. 금융시장에서 차관도입시 최저금리율을 적용받고 있는 독일은 가난한 남유럽국가들과 함께 조약에 날인할 경우 짊어져야 할 비용을 잘 알고 있다.

유럽진보라는 이상을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독일이 그 비용을 감당하겠다 할 경우, 재정 상호부조에 대한 대가로 다른 국가들에게 보다 강도 높은 가혹한 국내경제정책 간섭 및 감독을 요구할 것임은 자명하다. 재정적 상호부조의 관계가 성립되는 순간, 유럽연합 조약들을 통해 그간 독일이 국내정책들을 강제해 온 방식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다.

유럽통합과정에서 빚어진 정치적 모순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기는커녕, 유로본드는 전례 없는 정치적 모순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독일이 유럽집행위원회 강화라는 매개수단을 통해 철저하고 강력한 감시권과 부진한 국가에 대한 신탁통치권 요구 없이, 부채의 상호부조 체제를 수용해 회원국의 부채 미상환 시 이를 대신 상환하겠다는 의무를 받아들일 것이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조약에 의거한 통제책 강화와 트로이카(역자주: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의 영향력 확대가 유로본드가 가져올 결과이며, 이는 결국 현 유럽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맹목적인 집착

이 사안과 관련해 주권의 전반적인 몰수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바로 독일이다. 경제적, 특히 통화와 관련한 공동체적 상호부조를 위해 수용가능한 해결책이라 보고 있으며, 재정위기에 처한 국가들의 주권행사는 더욱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주권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활발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는 독일로, 독일의 주권이 바로 유럽연합의 경제 및 화폐제도에 그대로 이전된 것이다.

독일의 이같은 입장을 비판하는 공포어린 외침들이 계속 터져나오고 있으나, 혼돈된 모습만을 보이고 있어 종국에는 비판의 대상보다는 비판을 한 주체에 대해 더욱 말이 많은 상황이다. 진심이라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요란하게 우정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부정하려는 일종의 역행적 형태의 인종차별주의처럼, 일체의 분석을 거부한 채 독일에 대한 즉각적인 예찬을 내세우는 이들이야 말로 독일때문에 가장 골치아픈 이들일 수도 있다.

예찬도 증오도 아닌 딱 그 중간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볼 때만이, 서로 상이한 국가들이 강도있는 통합을 이룰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특질, 역사적 유산, 양립성과 비양립성을 객관적으로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봤을 때, 독일은 통화에 대한 집단적인 믿음을 만들어 냈고, 그러한 믿음때문에 통화문제가 너무나 중요해져, 이 사안과 관련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독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비춰지는 것이다. 독일이 유로존에 합류한 것도 유럽통화 내 독일식을 모방한 제도 체계를 강요할 수 있다는 필수불가결한 요건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1931년의 디플레이션과의 연관성이 더 개연성이 있음에도, 독일은 1923년의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나치주의의 전단계였다는 근거없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다. 독일은 그렇게 믿고 있으며,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독일이 그런 역사를 가졌다고, 그런 믿음을 만들어냈다고 아무도 이를 비난할 수 없다. 통화체계 구조에 대한 독일만의 비전을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으며, 그러한 구조와 다른 방식을 거부하는 독일의 태도를 그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독일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독일의 고정관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독일이 자국만의 통화제도를 따르는 것이 매우 합당한 만큼, 독일식의 통화제도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는 것도 합당한 일이다. 특히 독일의 통화제도가 다른 국가들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걸맞지 않고, 경우에 따라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경우 거부는 더욱 합당하다.

일부 회원국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통화의 평가절하이다. 일부는 적자재정 심화 지속이, 일부는 부채 일부를 해소하는 것이, 어떤 국가들에게는 인플레이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 모두가 필요한 것은 해당 사안들이 다시금 민주적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약에 명시된 독일식의 방침은 이를 금지한다.

올랑드대통령과 메르켈총리가 제안한 “민주주의적 도약”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완곡한 표현이다. 유럽의 연방주의화 추진은 그것이 어떤 형태일 것이며 가능한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분석할 노력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만큼 극히 불확실한 지평으로 남아있다. 연방제 지지자들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독일이 지금까지 애써 민주주의적 논의로부터 배제시켰던 모든 사안들을 다시금 민주주의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게끔 독일의 입장을 바꾸는 기적을 누가 이뤄낼 것이냐이다. 그 다음 물어야 할 것은 그러한 사안들에 대한 민주적 논의를 헌법상 금지하는 연방주의가 ‘민주주의적 도약’이라고 믿느냐는 점이다.(2)

철저하게 갖춰진 유럽의 연방제 민주주의가 도래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형태를 취할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유럽행정기관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특권을 부여받은 양원제가 실시되고, 보통선거에 따라 대표가 선출되는 유럽입법기관이 있다고 전제해보자. “위기 타개를 위해 유럽을 변혁하자”는 꿈을 꾸고 있는 이들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다음과 같다.(3) 주권을 가진 유럽의회가 중앙은행을 다시 감독 하에 편입시키고, 회원국가들에 대한 금융지원 및 예산적자 상한선 폐지를 결정하기로 결정한다면 독일이 유럽 내 다수의 결정에 굴복하겠는가? 논지의 일반화를 위해 덧붙이자면 유럽내 다수의 결정에 의해 프랑스에게 사회보장제도 민영화를 요구한다면 프랑스는 이를 거부할 것이다. 독일이 독일식 통화체제를 요구했듯, 만약 프랑스가 유럽에 프랑스식의 사회보장제도를 강요했고, 독일이 그러했듯 프랑스가 이에 대해 최후통첩을 했다면 과연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연방주의 지지자들은 민주주의 제도들이 그 원칙을 항구적으로 준수하고, 소수가 다수결의 원칙을 수용하는 집단의식이 바탕이 될 때만이 생명력 있는 민주주의가 실현됨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정치문화에 익숙치 않은 고위공직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이 핵심을 차지하는 국내 및 유럽연합 관료들은 이러한 원칙들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 부재로 인해 주권원칙에 무지한 제도적 기형아들이 꾸준히 출현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도약’은 이미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들에 무지하고, 여러 국가들이 통합된 여건에서 민주주의 실현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도 무지하다 .

국내통화 주권으로의 회귀

부수적인 (화폐 통제와 같은)(4) 특별 조치들을 통해 국내통화로의 회귀가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민주주의의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을 상기하면, 유럽 차원에서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단일통화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정치적 통합체 건설을 전제하므로 제외한다. 반면 공동통화는 고려해 볼 만하다. 공동통화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는 전제 하에, 일정한 형태의 유럽통합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단일통화를 대신해 각 회원국을 대표하는 공동통화-예를 들어 프랑화 유로, 페세타화 유로- 가 채택되면, 다시금 긍정적인 평형상태를 찾을 수 있다. 국가별 통화명칭을 지닌 공동유로화는 유로존 외부에서 달러화나 위안화등의 외부화폐로 직접 태환이 불가능하며, 회원국 간 태환도 불가능하다. 공동통화권 내부이건 외부이건과 무관하게 일종의 환전소 역할을 하는 유럽중앙은행만을 통해 태환이 가능하나, 이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력도 없다. 통화정책에 대한 권한은 각국의 중앙은행이 담당하며, 중앙은행에 대한 감독은 각국의 정부권한에 속한다.

유로화에 국한된(5) 유로존 외부 태환은 국제환율시장에서 유동환율에 따라 이루어지며, 유럽의 민간 및 공공부문 주체들을 대표해 유럽중앙은행이 태환업무를 담당한다. 반면 공동통화권 내 회원국가들 간의 태환일 경우, 정책적으로 결정된 고정환율에 따라 유럽중앙은행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6) 당시 통화위기의 주범이었던 유럽간 환전시장에서 자유롭고, 유럽외 환전시장에서도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속성이야말로 공동통화제의 강점이다.

유럽경제들간의 “틀림없는” 공조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지금, 일부 국가들은 현재의 위기때문에 화폐 평가절하가 필요하다. 공동통화는 유럽내 회원국간 태환이 가능하므로 순조롭게 이러한 평가절하를 가능케 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완전한 자유금융시장의 폭주속에서 체계 있는 환율 조정이 불가능함을 우리는 이미 1980,90년대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골치거리를 낳는 환전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럽공동통화지역에 평온이 유지되고, 평가절하는 전적으로 정치적 과정의 문제로 귀결되어, 환율등가를 조정하는 국가간 협상을 따르게 될 것이다.

평가절하 뿐만이 아니다. 1944년 케인즈는 대외수지불균형 국가들이 평가절하를 단행할 수 있고, 높은 흑자를 달성한 국가들에게는 평가절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국제청산동맹(International Clearing Union)을 제안했는데, 유로존 공동통화제도도 그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국가가 흑자수준에 따라 단계적인 평가절상을 따라야 하는데(예를 들어 GDP대비 4%, GDP대비 6% 수준별로 말이다), 독일같은 국가는 이미 오래전 마르크-유로화의 평가절상을 수용해, 유로존의 대내불균형 감소에 기여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흑자 국가들의 불순한 요구가 아닌, 환율조정원칙에 따라 국가간 협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평가절하’란 소리만 들어도 당장 ‘비효율’과 ‘인플레이션’을 외쳐댄다. 신자유주의가 비효율을 논할 위치는 아닌듯하다. 평가절하 또한 신자유주의자들 스스로 장려하던 것이 아니던가! 환율이라는 외적 평가절하 대신에 급여에 큰 부담을 주는 실업률과 급여를 통한 내적 평가절하를 이용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들은 통화등가조정이 아닌, 구조조정을 내세운 것 뿐이다. 만약 독일이 다시금 단독행동을 결정해 유로존에서 탈퇴한다면, 이를 금새 깨닫게 될 것이고, 새로운 더치마르크화의 평가절상 단 이틀만에 지난 10년간 추진한 급여제한이 무가 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환율조정보다 구조조정을 택하는 인플레이션으로 보자면, 위험한 디플레이션의 위협과 통제된 리플레이션을 요하는 상황에 나타난 허깨비일 따름이며, 단지 부채의 실질적인 부담감소를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부채부담 감소효과도 평가절상에 따른 대외부채상승에 가려질 것이다. 달러화 대비 10% 평가절하는 달러화로 명기된 대외부채의 10% 상승을 낳는다.

자크 사피르가 설명했듯(7), 프랑스부채의 85%가 프랑스국내법에 따른 계약 하에 발생한 것이므로, 공동통화 채택시, 유로프랑화로 명기되므로 평가절하에 따른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리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물론 공동통화제도의 문제는 평가절하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는 사안이며, 특히 평가절하가 현 상황에 필수적인 자유를 어느 정도 가져다는 주겠지만, 보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현재의 유로문제를 타개하는 것은 거시경제의 문제라기 보다는 ‘국민 주권’이라 부르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순응하는 문제이다.

마지막 남은 운명

초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국민주권 실현조건들이 여전히 먼 미래의 문제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이를 “유럽 차원의 목표”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물론 유럽식의 목표를 전적으로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경제분야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유럽차원의 목표가 철저하게 추구되어야 하는데, 즉 ‘국가로의 자발적 후퇴’라는 비난에 맞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경제분야 목표로 보자면, 누구와 함께 이를 추구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17개, 28개국이라는 다수의 국가들이 모여 버리면 이는 마치 처음부터 성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사회모델이나 환경적 우려와 같은 사안에 대해 동일하거나 비슷한 신념을 갖고 있고, 경제정책에 대한 기본원칙을 사전에 합의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보이는 국가들간의 객관적인 양립가능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응집력은 소수의 국가들 사이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응집력이 공조와 관련한 지표들에 따라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나, 마스트리히트조약에서 비롯된 지표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공동통화와 접목된 큰 시장을 형성하게 될 시, 비슷한 수준의 사회생산모델과 유사한 비용구조를 지닌 국가경제들만이 이 시장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즉, 다른 회원국들의 평균임금 혹은 최소임금 수준대비, 평균 혹은 최소임금이 75% 이상(혹은 향후 지정된 수준)에 속하는 국가들만이 신 유럽경제통화체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통합에 대한 전면적인 개조는 보편적인 구조조정과 금융통화원칙에 대한 망상, ‘왜곡 없는’ 경쟁이 가져온 악영향에 종지부를 찍는 기회가 될 것이다. 경쟁은 구조적, 환경적, 사회적 왜곡현상에 완벽하게 순응해, 이러한 왜곡을 사실상 최대한 난폭하게 만들어 버린다.

처음의 삼단논법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현 유로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유로로의 전환이라는 발상은 허상에 불과하다. 유로가 진보적이라면, 현재 권력을 누리고 있는 금융시장이 유로가 현상태에 이르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대안은 바로 다음과 같다. 신통치 않은 발상들 덕에 부수적인 수정이 가해진 자유주의적 유로가 결정적으로 침체되거나, 혹은 금융시장의 승리가 뻔하지만, 금융시장과의 전면충돌을 통해 모든 것이 해체되어, 유로가 소멸되고, 금융시장이 배제된 새로운 유럽시장 재건으로 향하는 것이다.

국내통화로의 강제적 회귀는 마치 실패처럼 들리기에 정치적으로 침체된 분위기를 가져올 것이고, 이로 인해 유럽활성화를 재개하려는 시도들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조건이 같다는 전제 하에, 유럽활성화 재개 가능성은 유로화를 어떤 방식으로 벗어나느냐에 달려있다고 봐야겠다. 유럽화의 정치적 에너지를 아껴 국내통화를 거치는 시기를 겪는다는 것은 ‘공동통화화’를 택하는 쪽, 즉 공동통화 선포를 통해 시장에 분란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립되는 상황속에 국내통화로의 두서 없는 회귀를 내세우기 보다는, 공동통화가 일정수의 유럽국가들의 굳은 정치적 의지의 소산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국내통화로의 회귀를 피할 수 없다면, 국내통화로 회귀하는 방식에 따라 유럽화 재개가능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어찌됐든, 유로가 반사회적이라며, 결정적인 무관심이 팽배하지 않는 한, 유로는 재기할 것이다. 한치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변화가 불가능한 유로가 치뤄야 하는 대가이다. 과도하게 경직된 유로화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외적 충격이 아닌 한, 지속하거나 붕괴되는 방법 밖에 갖고 있지 않다. 즉, 수정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유럽통합주의자들은 유럽이 지속적인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유럽재정안정기금, 유로안정화기금, 유럽중앙은행의 국가부채 매입(8), 은행동맹 등 몸살을 앓기는 했으나 어쨌든 실질적인 성장은 이룬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발전 중 그 어떤 것도 유로화의 핵심적인 문제를 타개하지 못한다. 독립된 중앙은행, 금융시장에 노출된 경제정책, 광적이다시피한 인플레이션 거부, 적자의 기계적 조정, 적자 해소를 위한 통화공급 거부와 같은 반민주적이고 침체를 가져오는 핵심 문제들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 진보”는 부수적일 뿐, ‘핵심문제’가 끊임 없이 낳고 있는 가장 처참한 결과들을 가능한한 무마해 보기 위함일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않고, 대강 모면만 하려는 태도이기에 유럽은 지속되고 있다. 최소한의 내면적 성찰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운명이 단절뿐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공동통화의 환전메카니즘
스페인기업이 프랑스기업에 계약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 유럽중앙은행이 환전을 담당하는데, 해당기업이 유럽중앙은행의 관할지점이나 유럽중앙은행을 대신해 환전업무를 맡은 일반은행에서 고시된 고정환율에 따라 페세타화유로를 프랑화유로로 환전할 수 있다.
미국기업이 프랑스 내 구매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 먼저 유동환율에 따라 유로대외환전시장에서 달러화를 유로화로 바꾼 후, 환전한 유로를 유럽중앙은행에서 고시된 고정환율에 따라 프랑화유로로 다시 환전하게 된다.
다른 조건들이 동일한 상황에서 만일 프랑화유로가 유로화 대비 5% 평가절하될 시, 사실상 다른 국내유로화들 및 달러화 대비 5% 평가절하되는 것이다. 이 경우, 프랑스기업이 지불을 위해 달러화나 리라화유로를 구매하려 유럽중앙은행에서 환전 시, 해당 프랑화유로에 5%의 추가비용을 더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유로본드
유로본드는 유로존 내 공공부채의 상호부조를 지향한다. 예를 들어 개별적인 국가부채 규모가 회원국들의 GDP 대비 60%에 이를 시, 이에 대해 회원국들이 공동책임을 지는 유럽의 부채로 간주되는 것이다. 어떤 국가에 채무불이행 사태가 발생할 경우, 다른 국가들이 지불보증을 서는 것이다. 이밖에도 GDP대비 60%를 넘는 국가부채에 대해 공동책임을 진다는 안도 있다. 물론 60%를 넘어서는 부채가 공동책임을 지게 될 시, 공동보증의 효과를 가장 크게 볼 수 있을 것인데, 회원국들이 가장 선호하는 안이 될 가능성이 많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Evo Morales
<지나침의 위기: 실패한 세상의 재건>(Fayard·2009)의 저자.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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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rançois Denord, Antoine Schwartz, ‘Dès les années 1950, un parfum d’oligarchie ’(이미 그 태생부터 과두제의 향기가 났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9년 6월호.
(2) Serge Halimi, ‘Fédéralismeà marche forcée’(억지스러운 연방주의),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2년 7월.
(3) Thomas Piketty, ‘Changer l’Europe pour surmonter la crise’(위기 타개를 위한 유럽 바꾸기), Libêration,파리, 2013년 6월 17일자.
(4) 예를 들면, 일부 금융활동을 금지하거나, 할당을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5)프랑화유로, 리라화유로 같은 국가통화들이 유로를 거쳐 달러로 태환되는 것이다.
(6)유럽통화제도(1979년-1993년)는 고정환율제를 적용했으나, 기준환율에 대해 2.25% 정도의 유동성을 두었다. 유럽통화제도가 수차례 위기를 겪은 것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금융시장내 기준환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7)Jacques Sapir, ‘Quand la mauvaise foi remplace l’économie : le PCF et le mythe de l’autre euro’(불순한 동기가 경제를 지배할 때 : 프랑스공산당과 변화된 유로의 허상), RussEurope, 2013년 6월 16일, russeurope.hypotheses.org
(8)0 유럽재정안정기금과유로안정화기금은 부채부담이 과중한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이다. 전면적 통화거래(Outright Monetary Transactions)는 유럽중앙은행의 국채 매입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