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청의 역사

2013-08-06     데이비드 프라이스

▲ <지옥의 기계>, 1937-오스카 도맹구에즈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전자감시 프로그램을 가동해 엄청난 분량의 개인정보를 수집했다는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 이후, 미국에서는 정보기관에 의한 시민의 사생활 침해 문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미 정보기관이 전화 통화와 인터넷 검색 내역을 메타데이터 형태로 저장해왔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바로 미국민의 대다수가 개인 전자통신 감시에 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가 나오고 며칠 후에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국민의 56%는 “전자감시 프로그램 ‘프리즘’을 용인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대테러 활동을 위해서라면 정부가 그 누구의 전자우편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응답한 국민 역시 45%에 달했다. 이런 결과는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그동안 언론매체, 전문가, 정치지도층은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감시는 불가피한 무기라는 선전을 줄기차게 해왔다.

물론 미국 사회가 정부의 사찰 활동에 언제나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기 수주일 전만 해도 일간 <USA투데이>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인 10명 중 1명이 연방수사국(FBI)을 신뢰하지 않는다’(2001년 6월 20일자). 수십 년 동안 법무부가 벌인 조사에서도 미국민은 언제나 국가기관의 전화 감청에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1971~2001년 반대 여론은 무려 70~80%대를 맴돌았다. 하지만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청사가 테러 공격의 타깃이 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이 대터러 전쟁을 선포한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미국민이 국가기관의 시민 사찰에 대해 갖고 있던 해묵은 반감이 누그러졌다.

1877년 세계에는 전화통신선이 단 하나뿐이었다. 보스턴에서 세일럼(매사추세츠주) 사이 778개 전화국이 모두 하나의 회선에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통신기술은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20세기 초 미국인 가운데 전화를 보유한 사람이 1천 명당 1명꼴이었다면 20년 뒤 이 비율은 1%대로 증가했고, 20세기 중반에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로 확대됐다. 급기야 오늘날에는 미국의 전화 수가 인구보다 더 많을 정도다. 20세기 말 광섬유케이블과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전화 감청은 한층 수월해졌다. 별다른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고 통신회사만 살짝 눈감아주면 됐다. 구리선을 따서 통화 내역을 추적하고 싶다면 그저 마이크를 매달 악어집게만 가지고 해당 통신선에 접근하면 그만이었다.

마피아의 밀주 암거래 vs FBI의 전화 도청

최초의 도청 스캔들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국가기관의 감청 행위- 국민이 질색했다- 가 만연하자, 미 의회는 당시 외국 스파이가 미국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도청을 불법으로 선포했다. 종전 뒤 많은 주정부가 이를 본보기로 삼아 지역기관의 사찰 활동을 제한하는 법률을 채택했다.

그럼에도 도청의 관행은 뿌리 뽑히지 않았다. 금주법 시대(1919~33)에 미국의 지역경찰과 연방경찰은 주류 제조자, 유통업자, 소비자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밀매업자들의 통화 내역을 불법 감청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할란 F. 스톤 법무장관은 분개하며 많은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1924년 법무부에서 도청을 전격 금지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재무부와 법무부 산하 수사국(BOI)- FBI의 전신- 은 스톤의 결정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은밀하게 불법 도청을 지속했다.

2년 뒤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서 또다시 불법 감청 논란이 재현됐다. 시애틀에서 연방수사관들이 럼주를 밀매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전직 치안감독관 로이 옴스테드의 전화 통화를 추적했다. 하지만 불법 도청 사실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경찰의 손을 들어주며 옴스테드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 법원 뒷골목에서는 시끄러운 논란이 이어졌다. 가령 프랭크 러드킨 판사는 아무리 범죄의 위험성 때문이라고 해도 경찰의 불법행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아무리 연방수사관이라 해도 타인의 전화 내용을 그 사람의 이익에 반대되는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감청할 권리는 없다. 이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형편없는 술책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행태를 묵인하는 것은 곧 우리 선조가 자신과 후세대를 위해서 자유와 번영이 보장되는 국가를 세우기 위해 기울인 수많은 노력을 무위로 만드는 행위다.”(1)

1928년, 옴스테드는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시애틀 퍼시픽 전화전신회사’ 등 여러 기업들이 그를 지지했다. 기업들은 밀매업자가 감시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일단 중앙전화국에 두 회선이 연결되면 오로지 두 사용자만 그 회선의 유일한 사용자이며 소유자다. 따라서 제3자가 이 회선을 감청하는 경우 이는 사용자는 물론 전화사의 재산권을 동시에 침해하는 처사라고 볼 수 있다.”(2)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서비스사업자나 통신사업자가 고객의 사생활권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졌다. 스노든이 지목한 페이스북·구글·MSN 등의 기업은 그저 정부의 사찰 활동을 몰랐던 것인 양 행세할 뿐이다.

대법원은 5 대 4로 옴스테드의 유죄를 확정했다.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이같은 판결에 격렬히 반대했다. “범죄는 전염성을 지니는 법이다. 정부가 무법자처럼 행동한다면 시민들도 정부를 따라 법을 유린할 테고 결국 온 세상이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범죄 척결을 위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다시 말해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응당 대법원은 이런 위험천만한 법 해석을 결단코 저지해야만 한다.”(3)

1940년대에 이르자 불법 사찰에 대한 미국민의 인식이 바뀌었다. 먼저 전시 상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전화가 더 이상 사법관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비호를 받던 사회지도층의 전유물이 아니란 사실도 작용했다. 이제는 서민층도 전화를 널리 사용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정부 당국은 또다시 도청 합법화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참전을 앞둔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미 의회에 전화 도청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요청했다. 제임스 플라이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의 반대에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밀리에 ‘반체제’ 인사나 간첩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사찰할 수 있도록 법무부에 허락했다.

하지만 반체제란 광범위한 개념이었고, 후버는 새로 부여받은 특권을 그저 나치를 조사하는 데만 사용하지 않았다. 후버를 보좌한 윌리엄 설리번은 훗날 전쟁 기간 중에 FBI가 영장 없이 주기적으로 도청을 자행했다고 털어놓았다. “국가의 미래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부의 승인은 불필요한 절차에 불과했다. 하지만 종전 뒤에도 수년에 걸쳐 FBI는 법무장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대화 내용을 감청했다.” 한마디로 미국 도청의 역사는 점진적 탈선으로 점철된 것이다. FBI 수사관들은 나치당 지지자 색출에 국한됐던  본래 임무를 조금씩 이탈해 결국 시민운동가, 노동운동가, 사회사업가, 진보주의 기독교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 등을 마구잡이로 사찰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이후 반공주의자 조지프 매카시 상원위원의 마녀사냥이 판을 치는 가운데, FBI는 법원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냉전의 공포를 빌미 삼아 불법 도청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FBI는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기소된 주디스 크플론의 상소 재판에서, 자신들이 불법 감청한 피고와 변호사의 통화 내역을 공개했다. 결국 상고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1972년 후버가 사망한 뒤 수년 동안 FBI와 중앙정보국(CIA)이 미국민의 사생활을 불법으로 침해한 사실이 줄줄이 폭로됐다. 1975년 처치·파이크 특별조사위원회(4)는 정부가 완전히 합법적인 정치 활동에 참여 중인 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찰을 벌인 사실을 낱낱이 밝혀냈다. 이 사건은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됐고 국민은 분개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미 의회는 조사를 포기했다.

1978년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상원 정보분과위원회 청문회에서 전직 CIA 통신기술자 데이비드 워터스가 국가안보국(NSA)이 국내외적으로 수천 건의 통화 내역을 감청하거나 녹음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워터스의 증언에 미 국민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런 조치에도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1978년 10월 제임스 카터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목적으로 한 은밀한 제도적 장치인 해외정보감시법(FISA)을 선포했다. 한마디로 정보기관이라는 작은 세계가 도청 합법화를 위해 벌인 수년간의 투쟁 끝에 쟁취한 승리였다. 해외정보감시법에 따라 허용된 도청 건수는 해가 갈수록 꾸준히 증가했다. 반면 도청 요청이 기각된 건수는 1979~2006년 총 2만2990건의 도청 요청 가운데 5건에 불과할 정도로 너무나 가소로웠다.

‘애국법’이 초래한 폐해들

처음에 군인이나 연구원만 사용하던 인터넷이 점차 대중에 개방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됐다. 1986년 ‘전자통신프라이버시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통신선으로 전달되는 전자우편을 감청하는 행위는 합법으로 통했다. 하지만 전자통신프라이버시법이 통과되면서 마침내 전자통신에 대해서도 전화 통화에 준하는 법적 보호 장치가 마련됐다. 1994년 많은 미국민이 ‘디지털 전화법’(Digital Telephony Act·국내에는 ‘법집행을 위한 통신지원법’(CALEA)이란 명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음 -역자)에 반발했다. 법원이 승인한 도청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업자에게 감청장비 설치를 의무화한 법이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과 전자사생활보호센터(EPIC)는 법안 저지 운동을 벌였다. 신문사마다 자유를 침해하는 이 법률을 규탄하는 투고가 전국에서 날아들었다. 하지만 1927년 옴스테드 항소 사건이 일어난 때와는 여러모로 시대가 변했다. 이번에 통신사업자는 ‘디지털 전화법’을 온몸으로 지지했다. 결국 법안은 통과됐다. 로널드 레이건, 아버지 조지 부시, 윌리엄 클린턴 행정부가 이어지면서 정권은 국민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더 많은 감청과 기업의 개인정보 수집을 허용했다. 이제는 법무부마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새로운 사건이 줄줄이 터졌다. NSA가 국제전화를 감청하고 컴퓨터로 비밀번호를 분석한 사실이 탄로 났다. 직무상의 전자우편이 우편이나 전화 통화와 똑같은 보호의 대상인지를 둘러싸고도 줄소송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법관은 인터넷의 구동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전자우편 교환에 대해서도 전화 통화와 똑같은 비밀 보호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사법 당국이 전자우편 역시 전자식으로 된 편지봉투라는 사실을 이해만 했더라도 미국의 상황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옴스테드 사건에서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전화와 우편을 이렇게 비교했다. “밀봉된 편지와 개인의 전화 통신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이런 논리로 전자우편을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졌다.

2011년 10월 26일 ‘애국법’(Patriot Act)이 통과되면서 연방국가의 전화 감청을 제한하던 사법적 장벽(처치 특별위원회가 제도화했다)이 무너졌다. 애국법은 정보기관의 미국 시민에 대한 사찰을 제한한 장애물을 철폐했고, 정보원이 미국 시민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게 허용했으며, 사이버상의 활동과 전자우편을 대대적으로 감청할 수 있게 허용했다. 2003년 국토안전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가 창설되면서 미국 정부는 중앙집권적 정보기관을 갖추었다. 덕분에 과거 후버는 꿈도 꾸지 못했을 놀라운 수준의 개인 감시 수단을 통해 조직적으로 사찰 활동이 전개됐다.

한 세기 동안 정부의 불법 사찰에 격렬히 반대해온 미국 사회는 어느덧 기밀유지 권리를 포기하는 법을 익히고 말았다. 결국 많은 국민이 과거의 역사는 잊은 채, 시민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에 대한 갈망 이전에 테러에 대한 공포와 ‘무고한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철석같은 믿음을 앞세우기에 이르렀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다이아몬드가 말한 ‘조직된 망각의 사막’(Desert of Organized Forgetting)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글·데이비드 프라이스 David Price
미국 생마르탱드라세대학(워싱턴 DC) 인류학 교수. 주요 저서로 <무기가 된 인류학 : 군사주의국가에 복무하는 사회학>(Weaponizing Anthropology : Social Sicence in Service of the Militarized State·AK press·오클랜드(미국)·2001)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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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nority opinion on the appeal of the Olmstead defendants’, 미 상소법원 9차공판, 샌프란시스코, 1927년 5월 9일, www.fjc.gov.
(2) ‘Amicus curiae brief of telephone companies submitted to the Supreme Court in Olmstead v. United States‘, 미 상소법원, 워싱턴 DC, www.fjc.gov, 1928.
(3) ‘Dissenting opinion of Justice Louis D. Brandeis in Olmstead v. United States’, 미 대법원, www.fjc.gov, 1928.
(4) 전자는 리처드 닉슨에 반대한 민주당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의 이름을 딴 위원회로,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CIA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됐다. 후자는 같은 민주당 소속 오티스 파이크 하원 의원의 이름을 따서 같은 목적으로 만든 하원 위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