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사는 누가 쓰는가

2013-08-06     피에르 돔


지난 수십 년간 프랑스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알제리 전쟁의 역사 서술을 독점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식민주의자에게 대항한 8년간의 싸움에 직접 참여했던 무자헤딘과 전사들의 체험담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증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알제리의 공식 역사에 드리운 어둠을 밝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주제는 여전히 금기로 남아 있다.

알제리 시내, 식민지 시대 이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빅토르 위고 거리. 디두슈 무라드가(街)(이전 명칭은 미슐레가(街))와 연결되는 넓은 길 양쪽으로 야자수들이 늘어서 있다. 알제에서 가장 매력적인 문화적 쉼터 하나가 이곳에 있다. 바로 칼리마트(아랍어로 ‘말’이라는 뜻) 서점이다. 60대로 보이는 부부가 서점에 들어선다. 아멜이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이한다.

“이번주에는 어떤 신간이 들어왔나요?”
“윌라야 1(제1관구, 오레스), 한 대위의 회고록, 아반 람단에 관한 책 한 권, 민족해방군(ALN) 정보부 장교 출신의 독립전쟁 증언집이 나왔어요.”
“좋아요, 전부 주세요!”
“독립 뒤 알제리에 남은 프랑스인 피에르와 클로딘 숄레 부부가 쓴 책 읽었어요?” 젊은 판매원이 묻는다.
 “아니요, 지난번에 왔을 때 재고가 없었거든요. 오늘 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칼리마트 서점 주인 파티아 솔이 말한다. “하루에도 저런 손님 수십 명이 들러요. 독립전쟁 당시나 독립 직후의 알제리 역사에 관한 책, 아메드 벤 벨라, 우아리 부메디엔이 활약하던 시대의 이야기를 모조리 읽고 싶어 하죠. 매주 이런 주제를 다룬 신간이 나오니 계속 구해 읽는 거죠!”
 
‘독립의 아버지’들을 보는 대립된 관점
 
몇 년 전부터 알제리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과거 독립 활동에 참여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회고록을 내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유명 인사들의 회고록은 대부분 이미 출판됐다.”(1) 그 자신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활동가 출신이며 자신의 삶과 활동상에 대한 두 번째 저서를 준비 중인 역사학자 무함마드 하르비의 설명이다. “요즘엔 새로운 현상이 등장했다. 중간급 활동가나 전투원(Djounoud) 출신들이 쓴 책이 나오고 있다.” 이 책들은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7년 6개월(1954~62)에 걸쳐 알제리 독립을 위해 벌인 전투 중에 독립투사들이 일상 속에서 겪은 크고 작은 사건, 무용담 등이 대부분이다. 온갖 고생, 계략, 체포, 고문 등에 대한 이야기가 퍼즐 조각처럼 펼쳐진다. 결여되거나 왜곡된 조각도 있지만 한데 모아놓으면 알제리인들의 시각으로 독립투쟁을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현대의 주류 역사 서술 속에서 문서 자료는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자 다호 제르발이 지적한다. 그는 30년 전부터 알제리 독립투쟁 활동가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2) “문서고에 분류되고 보관된, 확인 가능한 문서를 기준으로 삼아 기술했으므로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서들의 대부분은 알제리 점령 세력, 즉 식민지 군대의 관료나 장교들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근본적인 불균형을 수정하기 위해서라도 활동가들의 증언이 중요하다.(3)

산악지대를 누비던 전투원들의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1962년 독립 알제리의 권력을 장악한 이들은 국내 무장투쟁에 참여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부메디엔처럼 모로코나 튀니지 국경지대 부대에서 활동하거나, 벤 벨라처럼 프랑스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알제리 독립투쟁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40년간 이들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활동가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역사가들은 이 책들을 통해 진정한 사실을 발굴할 수 있을까? “그중 일부를 자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있다.” 신세대 알제리 전문가 라파엘 브랑슈가 설명한다. “하지만 항상 신중함을 기하기 위해 다른 자료와 비교·검증한다.” 오레스의 영웅, 아미루슈 아이트 하무다 대령의 비서였던 하무 아미루슈는 회고록에 FLN과 알제리민족운동(MNA)의 메살리파(4) 사이에 벌어진 유혈 분쟁- 오랫동안 비밀에 싸여 있었다-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모두 알고 있듯이, 이 투쟁은 미실라 인근의 베니 일만(멜루자) 지역에서 남녀노소가 뒤섞인 300명 이상의 주민이 학살당하는 유혈이 낭자한 병적 상황으로 치달았다.”(5) 이것을 사실의 발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역사학자들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다른 예도 있다. 아반 람단의 죽음과 관련한 책이 상당수 출판됐지만 정확한 정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6) 카빌리 출신으로 FLN의 정치 지도자로서 1956년 8월 수만 총회를 주도한 아반 람단은 1957년 모로코에서 살해됐다. 지난 40년간 그를 ‘프랑스군의 총탄에 산화한’ 순교자(Chahid)로 추앙한 알제리인들은 이제 그가 동료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FLN 활동가 출신 칼파 마메리는 <아반 람단, 독립의 아버지>(Thala Editons·2009) 개정판에서, 아반 람단의 암살을 주동한 인물이 동료인 크림 벨카셈, 압델하피드 부수프, 라크다르 벤 토발이라는 설이 사실이라는 ‘강한 추측 혹은 결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추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알제리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된 주제에 대한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극적으로 반전된 분위기에서 예전에는 민감한 주제였던 것이 지금은 오히려 인기를 끌고 있다. “매년 아반 람단에 대한 새 책이 출판된다. 일단 나오면 성공은 보장돼 있다.” 티지우주의 아후이드(베르베르어로 ‘묘목’이라는 뜻) 서점 주인 타하르 다흐마르의 말이다.(7) 이처럼 무더기로 회고록이 출판되면서 알제리의 공식적인 역사 속에 존재하던 금기가 조금씩 사라지거나 힘을 잃게 되었다. 가령 1954년 무장투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교과서에조차 실리지 못했던 알제리 독립의 아버지 메살리 하지에 대한 책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다.(8) 프랑스 정보부가 FLN의 내부 분열을 목적으로 전개한 일명 ‘블뢰이트 작전’으로 활동가 수백 명이 배신자로 의심받아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한 책들도 나왔다.(9) 윌라야 4(알제 지방) 지역 사령관 시 살라가 1960년 6월 드골과 별도의 협상을 시도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출판됐다. 그 ‘배신자’는 FLN에 체포됐고 동료들에 의해 처형됐다.(10) 1962년 벌어진 FLN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투쟁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이 이야기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역사학자 질 망스롱은 “이런 책들은 특정 인물을 옹호하거나 특정 윌라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민족적 성격을 강조하는 무익한 논쟁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가령 카빌리에서는 람단에 대한 인기가 대단하다. 1959년 3월 전사한 윌라야 3(카빌리) 사령관 아미루슈 대령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티지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중 하나를 경영하는 오마르 셰이크에 따르면, 그는 블뢰이트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음에도 카빌리에서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부수프와 부메디엔 휘하의 알제리 국경 부대 음모설을 파고든 사이드 사아디의 책 <아미루슈, 하나의 삶, 두 죽음, 하나의 유언>이 2010년 3월 출판됐을 때는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이 저자들의 주장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 사회학자이자 카스바출판사 편집장인 무스타파 마디는 “블뢰이트 사건의 진상을 모조리 밝힌 책을 내놓을 용기가 없다”고 고백했다. “2005년 누군가 원고를 들고 왔지만 출판을 거절했다. ‘아무개가 아무개를 고문했다’ 식으로 여기저기 실명이 거론된 글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프랑스군의 총탄에 산화한 순교자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이 실은 그가 알제리 쪽의 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상상해보아라! 알리 카피(11) 같은 이들조차 구체적인 실명을 거론하는 것을 피하는 마당이다.”

금기시되는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과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회고록이 쏟아져나오는 동안 알제리 역사가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조심스러운 발언만을 내놓는다. 대학에서도 이런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려는 학생은 없다. 독립 직후의 유혈 분쟁에 관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박사 논문을 최초로 쓴 알제리 학생은 파리7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다.(12) 알제대학에서 ‘무난한’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한 학생은 주변 학생들이 듣는지 확인한 뒤 작은 목소리로 귀띔해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주제는 대학에서 금기시된다. 무자헤딘이 프랑스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한 마을 전체를 몰살한 사건 등이 좋은 예다. 조사도 재판도 없었다. 만약 내가 이런 주제를 언급하면 곧바로 반역자로 취급받을 것이다!”
 
넘치는 혼동과 엄밀성의 결여
 
회고록의 주제 선택에는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지만 최소한 세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 좋다. 알제리인 사망자 수가 그 하나다. 1962년 공식적으로 사망자 수가 150만 명이라고 발표됐지만, 프랑스 학자들은 4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상당수 알제리 역사학자들도 비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수치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알제리인의 전쟁 참여 비율이다. 지난 50년간 공식적인 역사는 ‘아르키’라고 불리는 배신자들을 제외한 모든 알제리 인민이 프랑스 압제자들에게 대항해 들고일어났다고 기술해왔다. 그런데 이 예외에 속하는 이들의 수는 역사학자 프랑수아그자비에 오트뢰(13)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20만~40만 명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현 알제리 공화국 대통령이 실제 민족해방 전쟁에 참여했는지를 따지는 것 역시 금기사항에 속한다.

어쨌든 이런 증언들 덕분에 드디어 과거의 진실을 밝히려는 알제리인들의 바람이 실현될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서로 모순되는 기억이 교차하면서 혼란을 야기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혹은 아랍어로 나오는 20여 개의 알제리 일간지를 한 번만 훑어봐도 금세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회고록 출판 바람의 여파로 언론지상에도 흥미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알제리 언론은 거의 매일 특정 역사적 관점을 옹호하는 긴 기고문을 싣는다. 그럼 곧장 이 글들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반박문이 그 뒤를 잇는다. 문제는 이 기고문 대부분이 역사학적으로 갖추어야 할 엄밀함(인용, 다양한 출처에서 나온 자료들의 대조)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들에서 제시하는 사실은 오류로 가득한 횡설수설 혹은 주관적 해석 속에 파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알제리 역사가들의 진정한 목소리는 무더기로 쏟아지는 이 증언들 속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리듬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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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외적으로, 윌라야 2(북콘스탄틴) 지역을 이끌었던 라크다르 벤 토발의 회고록은 집필이 완료됐지만 출판되지 않고 있다.
(2) 최근 저서로, Daho Djerbal, <L’Organisation spéciale de la Fédération de France du FLN>(FLN 프랑스연맹의 특별한 조직화), Chihab, Alger, 2012가 있다.
(3) 알제리 쪽 자료는 열람이 금지된 내무부 소장 자료를 포함해도 프랑스 쪽 자료에 비해 훨씬 양이 적다. 일부 프랑스 자료는 여전히 비공개 상태다.
(4) Alain Ruscio, ‘Messali Hadj, père oublié du nationalisme algérien’(알제리 민족운동의 아버지 메살리 하지의 비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참조.
(5) Hamou Amirouche, <Akfadou: Un an avec le colonel Amirouche>(아크파두: 아미루슈 대령과 함께한 1년), Casbah Editions, Alger, p.173, 2009.
(6) Ali Chibani, ‘Le crime inavoué’ de l’histoire de l’indépendance algérienne’(알제리 독립사 이면에 감춰진 범죄), La valise diplomatique, www.monde-diplomatique.fr, 2010년 6월 16일.
(7) 그의 조카 Belaïd Abane의 최근 저서 <Ben Bella-Kafi-Bennabi contre Abane: les raisons occultes de la haine>(아반에 대항한 벤 벨라, 카피, 베나비: 증오의 감춰진 이유들), Kourou, Alger, 2012.
(8) 알제리인이 쓴 최초의 주요 저서로 Ammar Nedjar, <Messali Hadj, le Zaïm calomnié>(메살리 하지, 중상모략당한 지도자), El Hikma, Alger, 2003이 있다. 1982년 프랑스 Le Sycomore 출판사에서 나온 Benjamin Stora의 전기는 1991년 알제의 Rahma출판사에서 재간행됐고, 1998년 Casbah출판사에서 아랍어 번역본이 출판됐다.
(9) 한 예로 Salah Mekacher, <Au PC de la wilaya 3 de 1957∼1962>(1957~1962년, 윌라야 3 사령부에서), Algérie, 2006.
(10) 시 살라 역시 1961년 프랑스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Lakhdar Bouregaa 회고록, <혁명의 암살에 대한 증언>(아랍어), Dar al Hikma, Alger, 2010 참조.
(11) 윌라야 2 사령관 출신으로, <Du militant politique au dirigeant militaire: Mémoires(1946~1962)>(정치 활동가에서 군사 지도자로: 회고록 1946~1962), Casbah, Alger, 2002의 저자다.
(12) Omar Mohand Amer, 2010년 박사 학위 청구 논문. 파리1대학의 Nedjib Sidi Moussa가 메살리파 지도자들의 행보에 대한 더 자세한 연구 결과를 담은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새로운 현상으로, 앵글로색슨계 대학들이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연구 지원을 늘리고 있다.
(13) François-Xavier Hautreux, <La Guerre d’Algérie des harkis: 1954∼1962>(아르키들의 알제리 전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