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신도시의 재개발 딱지
빈곤층을 위한 부동산 투기?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페루 리마의 도시계획은 새로운 이주민들의 자생 타운을 점진적으로 통합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전의 도시계획 과정은 새로운 타운의 출현을 촉진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 데 반해, 현재의 도시계획은 투기만 가중하고 있다.
어느 1월의 토요일 저녁,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급조한 주거단지 ‘로스 알라모스’ 2주년 기념행사에 모였다. 다른 나라에선 이런 주거단지를 빈민촌, 빈민굴 혹은 불법 정착촌 정도로 지칭할 것이다. 리마에서는 이를 더 그럴싸한 이름, 푸에블로 호벤(Pueblo Joven), 말 그대도 ‘젊은 도시’라 부른다. 이같은 낙관적인 호칭은 페루 수도의 정신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비공식적이든 불법적이든 아직까지 손바닥만 한 땅의 집단 점유가 가능하고, 이런 점유가 도시화 과정의 한 형태로 인식되는 곳이 페루 수도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젊은 도시들’은 수도에서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구역들 중 한 곳까지 점령했다.
로스 알라모스의 밤 축제가 절정에 달했다. 군중이 클레이 코트 위에 설치된 덜컹거리는 작은 무대 위에 자리잡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살사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한여름의 열기로 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신다. 이튿날 아침 분위기는 달랐다. 푸에블로 호벤은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플래카드와 삼각 깃발들은 굽이진 언덕 바위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선 판자촌을 아직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엔 햇살에 졸고 있는 개 몇 마리 외엔 인기척이 없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니자 이윽고 한 집 문이 열린다. 두 아이를 치마폭에 매단 채 건장한 모습의 레오나르다 부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연다.
“어젯밤 축제 이후, 모두 기진맥진해 자기들이 살고 있는 우아이칸(Huaycán·페루 거대 빈민촌) 저지대에 위치한 C와 D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남편은 도시에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해가 진 뒤에나 돌아온다며 덧붙여 말한다. “나한테 물어봐야 아는 게 별로 없다.” 로스 알라모스에 상시 거주하는 가구는 그녀의 가족을 포함한 세 가구밖에 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불법) 토지 점유는 집단적으로 이뤄졌다. 이같은 집단 토지 점유 덕에 가난한 페루 산악지대 출신 이주민들은 빈한한 살림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었다. 현재 더 나은 삶을 찾아 수도로 올라온 시골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터전을 잡아 정착하고 있다. 레오나르다의 소유지는 리마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우아이칸 계곡 맨 위 경사면에 있다. 이 젊은 부인은 자기 집 현관에서 활력이 넘치는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을 굽어본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 공원, 상점, 학교, PC방, 구이 전문 식당, 공동묘지, 수많은 축구장을 바라본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아이칸은 사막이었다. 그런데 마오이스트 게릴라가 페루 후방을 교란시켰다. 이로 인해 피로 물든 보복 전쟁이 발발하고 페루 경제가 황폐화되자, 농부 수천만 명은 피란처를 찾아 수도로 몰려들었다. 초기엔 빈민촌이 주로 수도 외곽 지역에 들어섰다. 이후 이 황량한 계곡에까지 범위가 점점 확산됐다. 리마시는 난민들을 모른 체하거나 박해하기보다는 공동부지에 살 집을 지으려는 이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개발 프로젝트를 짜기 위해 지질 및 지형 연구가 실시됐다. 이주민들은 시가 지정한 형태의 집을 손수 지어야 한다. 시는 그 대가로 이들에게 물, 전기, 교통을 제공한다. 하룻밤 사이에 신(新)푸에블로 호벤이 탄생했다.
국제회의에서 푸에블로 호벤은 종종 비공식적인 도시개발 모델로 소개됐다. 실제 1960∼80년대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 (푸에블로 호벤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이 정착촌에서 자신들의 생명력과 (상대적인) 사회적 평화, 그리고 이곳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주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 초반 신자유주의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재임 1990~2000)의 주도로, 비공식적인 정착촌의 재개발을 위해, 부동산 소유권등기제가 만물의 척도처럼 도입됐다. 예컨대 연쇄적인 생활 공간의 민영화가 정부와 토지가 없는 국민들 사이에 있어온 파트너십을 대체한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시장경제의 단맛에 끌린 주민들을 소지주로 전환시킬 목적이었다.
살기도 전에 이미 버려진 도시
이 시기에 또는 이후에 건설된 ‘젊은 도시들’의 주민들은 여전히- 간혹 수십 년째- 민영화된 서비스 업체들에 물이나 전기 공급 약속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갈수록 빈번하게 신푸에블로 호벤이 들어설 수 있는 토지는 수익을 노리는 리마 중심가 주민들의 부동산 투기 작전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집세 인상으로 새로운 이주민들은 여태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단칸집 세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여성이 레오나르다 집 앞을 지난다. 그녀의 청바지 벨트에 스마트폰이 꽂혀 있다. 그녀가 침식된 언덕 위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 엄마는 우아이칸의 역사적인 창업자다. 그녀는 2008년 코야낙(원주민 그룹)으로부터 저 땅을 모두 매입했다.” 그녀의 어머니만 횡재를 본 것은 아니었다. 리마 주변의 유력 지역 인사들은 이주민들이 원하는 토지를 불법 점유한 뒤, 지속적으로 그곳에 정착하려는 사람을 상대로 돈을 우려냈다. 이전에 계곡 아래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임시 오두막을 계곡 아래에 지을 때까지, 돈 주고 이곳(계곡 위쪽) 땅 몇 뙈기를 얻어 텐트를 치고 몇 달 동안 보냈다. 이후 이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레오나르다 가족처럼 새로운 가족이 또 도착한다. 부동산소득이 거의 없는 페루에서 많은 저소득층이 손바닥만 한 땅을 사고팔아 한 달 생활비에 보태어 쓰고 있다.
레오나르다는 말한다. “우리가 기껏 원하는 것은 약간의 채소를 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작은 땅이다.” 1년 전 그녀와 가족은 이곳에서 900km 떨어진 에콰도르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수도로 왔다. 그러나 그녀와 같은 신세의 사람들이 돈 한 푼 안 내고 집단적으로 땅을 차지하던 시대는 끝났다. 레오나르다와 남편은 도시 외곽 언덕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4년간 소득에 상당하는 약 2800달러를 우아이칸 저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에 지급해야 했다.
레오나르다가 울분을 터뜨린다. “수돗물도, 도로도, 하수구도 없다. 전기는 있지만 불법인데다 아주 비싸다.” 그녀 뒤쪽으로 보이는 언덕엔 선명한 색으로 도색된 초라한 빈집들이 마치 사막에 흩어진 한 줌의 색종이처럼 반짝인다. 많은 건축물들이 4개의 황토벽만 쌓고 아직 지붕을 이지 않은 채 미완성으로 방치돼 있다. 예컨대 골판지, 방수포, 구겨진 양철로 지은 비공식적인 새로운 지역이 종종 탄생한다. 이런 것은, 보편적으로, 추후 이런 지역들이 살 만한 동네로 변하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우아이칸 고지대는 과거에 건설된 푸에블로 호벤과 다르다. 이 지역은 거주하기 전에 이미 버린 마을이 됐다. 레오나르다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이웃의 부재다.
수도의 전철 안, 메마른 언덕 한복판에 설치된 물탱크 위, 리막강 가장자리 땅의 감정을 맡은 조사관들의 작업복 등 거의 모든 곳에 ‘모두를 위한 도시’란 리마 슬로건이 나붙어 있다. 페루 국민의 3분의 1은 리마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수도 주민 중 3분의 1은 남의 땅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세기 동안 도시는 농산업과 이른바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로 지칭되는 페루의 좌익 게릴라 조직과 그에 대한 진압으로 인한 폭력 때문에 자기 땅에서 쫓겨난 수백만 소농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팽창했다. 1940∼93년 리마 인구는 20배 증가했다.(1) 새로운 이민자의 물결이 일 때마다, 이들을 수용할 공간 부족 문제도 덩달아 커졌다. 그래서 새로 유입된 사람들은 도시 주변에 스스로 집을 짓고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했다. 리마 중심가 녹색 고원에 둥지를 틀 수 없는 사람들은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안데스산맥의 틈새 지형, 즉 산벼랑이나 외진 황무지 혹은 가파른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때 리마는 국가가 이농민들과 전례 없는 파트너십을 맺어야 할 정도로 인구 증가의 압박을 경험했다. 이로 인해 수도 외곽이 싹 재편됐다. 1971년 200가구가 리마 근처 인구밀집 지역인 팜플로나시의 사유지를 점령하기 위해 뭉쳤다. 디데이(D-day)에 결국 9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팜플로나시에 몰려들었다. 잠정적인 폭동이 감지되자, 당국은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후안 벨라스코알바라도(1968~75) 장군은 우선 ‘침입자들’의 식량 배급을 차단했다. 이어 호송버스로 이들을 불모지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빌라엘살바도르’란 자치도시의 원형이 될 토대(이농민)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추호도 몰랐다.
지도상으로, 빌라엘살바도르는 병원처럼 우중충하고 눈에 확 띈다. 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직각으로 교차되는 직사각형으로 구획 정리돼 있어, 이곳을 돌아다니며 구부러진 길을 만날 일이 없다. 벨라스코 정부는 도시계획을 세워 이주민에게 작업을 시켰다. 리마에 도착한 이후(2) 대부분 실업자였던 주민들은 도로를 낼 땅을 수평으로 고르는 일에서부터 수도관을 설치할 도랑을 파는 일까지, 즉 인프라를 무보수로 직접 건설했다. 1975년 빌라엘살바도르의 주민 수는 이미 13만 명에 달했고, 이 중 대부분은 사막으로 이주한 뒤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돗물과 전기를 공급받았다.(3)
빌라엘살바도르의 전 이주민이자 현 시장의 주택문제 자문위원인 다니엘 라미레즈 코르조는 말한다. “정부와 국민은 이주민들이 신도시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면 국가는 이들에게 서비스(물과 전기 등)를 제공하거나 최소한 서로 타협점을 찾기로 합의했다.” 리마 역사상 가장 번창한 비공식 도시의 준공식이 거행된 뒤, 이 도시는 우아이칸 저지대를 비롯한 다른 공동체의 모델이 됐다. 지난 20년 동안 빌라엘살바도르의 건설을 지켜봐온 그와 같은 처지에 있던 수백만의 비공식 도시들은 모래사막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
이 황금시대에 수도로 몰려든 경제난민들은 마치 리마 팽창의 파트너로 간주됐다. 이들이 세계 각지의 도시 건축가들이 찾는 이 이주 집단의 놀라운 번영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는 정책을 강화해 사적 업적을 공적 업적으로 치부했다. 약 20년 전, 현재 인권침해로 옥중에 있는 당시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가장 급진적인 토지 사유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동원된 도구는 비공식 재산의 공식화 기구 ‘코포프리’(Cofopri)였다. 세계은행에서 자금을 지원받고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다’라고 주장했다)의 신자유주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은 코포프리는 푸에블로 호벤의 거주민들에게 부동산소유권 발급을 계획하고 있다.
“누가 몇 푼 안 되는 빚을 위해 집을 내놓겠는가?"
소토는 저서 <자본의 신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들 재산의 가치는 굉장하다. 그것은 1945년부터 세계에서 받은 대외 원조 총규모의 40배에 달한다. 하지만 이런 재산은 정상적으로 표시되지 않는다. 이들의 소유 재산을 명확히 명기한 서류가 없어 이 재산이 곧바로 자본으로 전환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재산은 서로가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을 벗어나면 팔거나 빚 담보로 쓸 수도 없고, 투자 때 현물로 쓸 수도 없다.”(4) 따라서 (페루 정부는) 불법 거주자에게 부동산소유권만 부여하면 그가 받은 부동산소유권으로 대출을 받고, 이로 인해 생기는 자본주의의 단맛을 톡톡히 보게 될 것이라 여겼다. 또한 부동산소유권은 공동체에서 더 큰 혜택을 누릴 수 있게 그의 존재도 향상시켜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후지모리 정권 때는 주택 부족의 해결책으로 건설보다는 오히려 부동산소유권 부여에 초점을 맞췄다. 거기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력을 다해 주민들에게 부동산소유권을 부여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재산의 가치가 너무도 터무니없는 것(소유권당 60달러에 불과함)이어서 국가가 저들에게 벽돌과 회반죽을 공급하는 것보다 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부동산소유권 부여가 이중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태까진 불필요해 시도하지 않았던 재분배 대책, 즉 새로운 주택 건설에 대한 점진적 과세나 보조금 지급이 가능해져 부자들의 이익을 지켜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국가는 코포프리의 마술 지팡이가 그간 가난한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재산- 거주하고 있는 땅- 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했던 재산권을 누릴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작은 사유재산권을 통해 행복을 되찾아주겠다고 시행한 이런 강제 조치에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코포프리로부터 사유재산권을 인정받은 초기 공동체 중 한 곳인 ‘비르헨 데 과달루페’(Virgen de Guadalupe) 공동체의 회장 카시오는 반문한다. “뭐하러 얼마 안 되는 빚을 얻기 위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의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그는 보석 가공업자로, 아마추어 음악인으로 그리고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는 집에 배관 설치와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위성 채널을 갖춘 텔레비전을 들여놓을 정도로 돈도 충분히 비축했다. 그가 이런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저축한 시간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시간보단 더 걸렸지만, 집은 개선하기 위한 이런 인고의 노력이 공동체를 조금씩 발전시켰다.
카시오는 이웃들과 함께 그가 살고 있는 바위 언덕을 정복했다. 그는 곡괭이로 바위 언덕에 길을 내고, 바위를 깰 때 생긴 암석은 집 지을 때 기초공사에 썼다. 그는 공동체에 수도와 하수도를 가설하기 위해 10년 넘게 투쟁했다. 마침내 페루 수도공사(Sedapal)가 항복하고 이를 가설해주자, 그는 이웃 친구들에게 신식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과 관리법을 가르쳤다. 카시오는 영민하고 신중하다. 과거 ‘침입자’들 중 압도적인 다수가 (빚으로) 페루의 소자산가가 되었을 때, 그는 빚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5)
코포프리의 소장 아이스 헤수스 타라바이 야야는 “이건 비즈니스 감각을 갖춘 선량한 시민과 기업가 정신이 결여된 고리타분한 사람들 사이에 상반되는 성향 탓”이라고 말한다. 카시오와 그의 이웃, 그리고 푸에블로 호벤의 주민 대부분은 물론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이주민 공동체는 자신들이 차지하고 번영시킨 땅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수십 년의 세월과 몹시 힘든 여정을 거쳤다. 그러나 코포프리의 지배하에선 주택 소유는 많은 노력을 필요치 않는다. 산 시드로에 위치한 중앙관청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창구 직원의 호출을 기다리면 된다.
형광등 불빛이 비치는 리마 한복판에 위치한 이 관청 대기실에 있던 외출복 차림의 이주민 몇 명이 신경질적으로 자신들의 서류를 열람한다. 부동산소유권을 발급받기 위해 이들은 본인이 주장하는 토지에서 10년간 거주한 거주지증명서와 그곳에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건축가가 발급한 건축허가증을 같이 제출해야 한다. 부동산소유권은 유용해 보인다. 어쨌든 소유권 취득 조건 메커니즘이 도시개발 방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있는 추정에 따르면, 향후 35년 동안 세계의 집 없는 사람들의 수치는 두 배 증가할 수밖에 없다. 두 세대 만에 이들의 수는 현재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서 3분의 1로 증가할 수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광적인 팽창의 먹잇감이 된 대도시 변두리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마는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2년 전 인도는 자국의 과밀 도시인 뉴델리나 뭄바이를 관리하는 데 코포프리 시스템을 적용시킬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절단을 페루에 파견했다. 페루 수도를 휭 둘러봄으로써 모범적인 개발 모델인 ‘젊은 도시들’의 이미지는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같은 도시 성공의 이면에 주민들의 협동·단결과 정부와 주민들 간 파트너십 같은 중추적 역할이 있었다는 것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세계의 인식은 시장경제의 산물인 왜곡된 시각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많은 외국 방문자들은 푸에블로 호벤의 성공을 부동산소유권 이데올로기 덕으로 치부했다.
개발 연구 및 진흥청 연구원 테레사 카브레라는 이렇게 지적한다. “코포프리는 부동산소유권 취득이 용이해지면서 일부 균형이 깨졌다고 자랑한다. 현재 리마 변두리의 토지는 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들은 여태까지 우선시하던 지역 단결 절차에 개의치 않고 부동산을 취득한다. 주택은 더 이상 개선되지 않고 공동체의 삶도 사라졌다.” 토지 집단 점유 시절에 우선시되던 주민 간 연대는 국민 스포츠 반열에 오른 높은 투기 병합에 자리를 내줬다.
빅토르 라울 아쿠나는 자기 집을 갖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을 모방했다. 2005년, 그는 자신이 자란 도시 빌라엘살바도르의 서쪽 외곽에 버려진 도로 한 구간에 정착했다. “많은 소그룹이 이미 이 도로 위에 살고 있었다. 전에 살던 곳이 화재로 전소돼 이곳에 온 자들이었다. 난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2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저들과 합류했다. 우리는 함께 신공동체를 형성하기로 결정하고, 공동체 이름을 전 교황을 기리기 위해 ‘후안 파블로 세군도’라 지었다. 정치 초년생인 아쿠나와 친구들은 토지 점유 관행이 빌라엘살바도르를 점유한 초창기 이후 얼마나 변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우선, 후안 파블로 세군도의 창설자 중 일부는 같은 토지를 여러 번 되팔고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신규 이주민들은 경찰 폭력과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대부분의 토지를 둘로 쪼개 되팔아넘긴 탓에, 공동체가 토지 크기와 소유권 등록 가능성과 연관된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그러나 가장 뜨거운 감자는 빈집 처리다. 푸에블로 호벤의 초기 거주자 중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부동산소유권 요구를 뒷받침해줄 목적으로 거주 불가능한 오두막집을 급조했다. 아쿠나가 최근 매립지 공사의 흔적이 아직 가시지 않은 굳은살이 박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분노했다. “저들은 이미 리마에 멋진 집을 소유하고 있지만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우리에게 모든 보수공사를 시켜놓고 부동산소유권을 비롯한 물과 전기 공급을 조용히 기다린다. 이후 이들은 집을 되팔아치울 테고, 사람들은 저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아쿠나는 공공우물이나 어쩌다 내리는 빗물을 각 집 앞에 배치된 플라스틱 물탱크로 유도하는 노란색과 흰색 깃발로 장식된 빗물받이 홈통처럼, 자신의 공동체가 성공적인 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몇 가지 요소를 방문자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안정적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양질의 삶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모래언덕에 정착한 지 7년이 지난 지금, 그가 유일하게 쓰고 있는 서비스인 전기조차 몰래 끌어온 것이다. 그의 집에는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는다. 길이 너무 가팔라 배달 트럭이 다닐 수 없다. 그는 소망한다. “우리는 부동산소유권 취득을 원한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한테 부족한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게 있다. 코포프리가 부동산소유권만으로는 개발과 관련한 그 어떤 보증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리마 역사상 첫 공공주택 사업 도입
코르조는 지적한다. “사막 한 귀퉁이(작은 집터)가 해결책은 아니다. 물론 종잇조각(부동산소유권)도 해결책은 아니다. 공공서비스를 받을 수 없으면 부동산소유권은 비공식적인 정착촌 주민들을 가난 속에 붙잡아둘 뿐이다.” 지난달, 이 리마시 의원은 수도 역사상 처음으로 부동산소유권 취득 정책의 대안으로 여겨지는 첫 공공주택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는 도시의 덜 외진 곳을 수직 팽창(고층 공공주택 건설)시키는 것이 도시 외곽 과밀 지역에 밀집된 이주민들을 위하는 최고의 대안이라 생각했다. 리마의 여성 시장 수사나 빌라란(좌파)이 후지모리 시대의 유산인 인기영합주의 관행에 종지부 찍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전환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녀는 극빈층에 대한 지원금 일부를 삭감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시의원들을 시의회를 통해 기소함으로써 이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이들의 빌라란 탄핵 캠페인은 국민투표로 이어졌고, 빌라란은 지난 3월 17일 3%의 근소한 차이로 시장 자리를 간신히 지켰다.
우리는 로스 알라모스를 떠나기 전, 섬유 도매시장 가마라가 번창하고 있는 리마 중심가 라빅토리아에서 온 한 가족을 만났다. 레오나르다와 부동산 투기꾼의 딸 외에, 우리가 로스 알라모스 2주년 기념행사 이튿날에 이 황량한 언덕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친구에게 소식을 듣고 돈이 될 만한 땅을 답사하러 왔다고 했다. 약 5년 전부터 수도에서 일하고 있는 가장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의 돈을 벌려면 땅을 매입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다.” 우리는 땡볕을 피하기 위해 한 빈집의 그늘로 이동했다. 방문객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높은 곳에 있는데다 가격도 비싸다. 여긴 아무것도 없다. 난 아들을 위해 땅을 사고 싶다. 그는 당장 이사할 필요는 없다. 이곳까지 수도와 도로가 생기려면 얼마나 걸릴까?” 우리는 그에게 그의 아들이 직접 나서서 공사를 하지 않거나 국가가 알아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대답했다.
글·엘리자베스 러시 Elizabeth Rush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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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aniella Gandolfo, <City at Its Limits: Taboo, Transgression, and Urban Renewal in Lim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2) Gustavo Riofrio, <The Case of Lima, Peru. Understanding Slums: Case Studies for the Global Report>, UN Habitat, Nairobi, 2003.
(3) Peter Schübeler, <Participation and partnership in urban infrastructure management>, 재건 및 개발을 위한 세계은행과 국제은행, 워싱턴, 1996.
(4) Hernando De Soto, <자본의 미스터리>, Flammarion, Paris, 2005.
(5) Antonio Stefano Caria, <Titulos sin desarrollo: los efectos de la titulación de tierras en los nuevos barrios de Lima>, Estudios Urbanos, n° 4, Lima,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