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상국가론'의 배경과 실상

2013-08-07     남기정

지난 7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대승했다.
반면 자민당에 대항할 민주당은 참패해 다른 꼬마 야당들과 비슷한 소수 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일본 정치에서 일강다약(一强多弱) 구조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써 다음 국정선거가 예정된 2016년까지 아베 총리는 안정된 정치적 기반을 배경으로 3년의 장기 집권이 가능해졌다.

이번 선거는 참의원 선거치고는 그 어느 때보다 주변 국가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그것은 일본이 선거 후에 과연 헌법을 개정해서 국방군을 보유하는 국가로 거듭날지 여부에 대한 관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난해 말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정원 480명 중 294석을 얻어 과반수를 차지했으며, 헌법 개정에 적극적인 일본유신회와 다함께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개헌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의석을 훌쩍 넘겨버린 터였다. 이어 참의원에서도 개헌파가 정원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면 아베 총리는 본격적으로 개헌에 착수할 것이라는 관측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있었다. 자민당 1강 구도 속에서 이미 선거 전부터 자민당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 승리의 크기였다.
 
선거전 초반에는 자민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었다. 자민당에 대한 기대가 아베노믹스의 성공에 대한 염원임을 잘 알고 있던 아베 총리는 선거전 초반 경제문제에 집중해서 선거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아베 총리는 개헌 문제를 언급했고, 이와 때를 같이해서 자민당에 대한 지지가 미미하나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자민당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하면서 자민당의 ‘압승’에서 ‘대승’ 예상으로 승리의 크기가 조정되었다. 결국 자민당은 단독 과반을 가능하게 할 71석에서 6석이 모자란 65석을 차지했고, 공명당과 함께 연립 여당의 과반에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일본유신회와 다함께당의 의석수를 합쳐도 3분의 2 의석에 미치지 못함에 따라 참의원에서의 개헌 발의는 어렵게 되었다.

일본 국민은 이번 참의원 선거를 통해 일본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되어온 중참의원에서의 여야 역전 현상을 종식시키고 여당에 안정적 정국 운영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해준 대신,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아직 허락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낮은 투표율에서나마 일본 국민의 균형감각이 기가 막히게 발휘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자민당이 주장하는 제9조의 평화조항 개정에 반대하고 있으며, 자민당 내에서도 개헌 속도에 대해 신중한 의원들이 있어서 아베 총리가 참의원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개헌 정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  은 빗나가게 되었다.

평화헌법 위에 선 ‘기지국가’ 일본

그렇다고 아베 총리가 개헌이라는 과제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은 헌법 개정이 필요 없는 집단적 자위권의 보유를 위해 움직일 것이며, 다음으로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법의 정비에 나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신념의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다. 국가의 군대, 즉 국방군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평화헌법하에서 전개되어온 전후 일본의 국가 자체가 근대국가의 상식에서 볼 때 불완전한 것이며, 영토성과 폭력성을 핵심 속성으로 지니는 근대국가의 맨살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는 최근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 국민이 이를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전후국가, 그것을 일단 ‘기지국가’로 명명해두자.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후로부터의 탈각’이 일본 국민에게 먹혀들어가는 것은 ‘평화국가’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에 퍼지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이 ‘평화국가’였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일본의 좌와 우를 떠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의 이상을 존중하고 ‘평화국가’의 길을 걸어왔기에 일본의 성공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냉전기의 일본에 관해서 말하자면 옳아 보인다. 반면 탈냉전 이후 일본의 국제적 위상 저하를 ‘평화국가’ 외교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는 일본인들은 ‘평화국가’의 부정적 유산에 주목한다.

어쨌든 좌우를 막론하고 일본인에게 전후 일본은 ‘평화국가’인 것이다. 한편이 ‘평화국가’를 계승되어야 할 자산으로 보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이 그것을 부정되어야 할 유산으로 보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듭 말하지만 일본인에게 전후국가는 ‘평화국가’로 존재해왔다. 과연 이러한 인식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2011년에 개봉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전후 일본의 성공에 한국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전쟁 기간 일본은 미군의 점령하에서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여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주요 미군기지는 전진 출격기지, 후방 보급기지가 되어 있었고, 전 국토가 전쟁 물자의 생산기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날 즈음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독립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했지만, 한반도에서의 지속적인 전쟁상태, 즉 휴전을 고려하여 미군에 기지를 제공한 채 독립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실시된 여론조사를 좇아가보면, 재군비에 동조하는 여론이 증가하기 시작해서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앞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전전의 우익과 구 군인들이 정치의 전면에 복귀했고, 재군비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2년과 1953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재군비 진영은 일본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 국민은 한국전쟁 기간에 실시된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대신 재군비에는 저항하면서 경제성장에 매진하려는 요시다 시게루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지국가’ 일본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가축의 안녕, 허위의 번영’

이와 같이 전후 동아시아에는 미소 간에 전개되는 지구적 냉전체제하에 한국전쟁 휴전체제라고 하는 지역 수준의 준전시체제가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은 ‘기지국가’가 되어 동아시아 휴전체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1963년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속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일본의 현실을 녹여 배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중일전쟁과 미일전쟁을 거치는 동안 총동원체제를 갖추고 ‘고도국방국가’가 되어 있던 일본은 전후 평화헌법하에서 ‘평화국가’로 재기를 다짐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지국가’가 되어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계승되어야 할 자산이거나 부정되어야 할 유산으로 자리잡은 평화국가의 실상은 기지국가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정상국가’화 논의가 대두된 1990년대는 지구적 수준에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이면에서 동아시아의 휴전체제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일본의 개헌 논의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과 마주 대하는 의미를 지닌다. 최근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주제가 ‘홍련의 화살’에 나오는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기지국가 일본의 평화와 경제적 성공이란 기껏 ‘가축의 안녕’이자 ‘허위의 번영’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지국가’는 역사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평화국가’처럼 초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며, 한국전쟁 휴전체제에 조응해서 존재하는 한시적 비상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그 해체를 시도하는 힘은 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이며, 더 근원적인 곳에서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일본의 혁신 진보가 ‘평화국가’의 이상에 매달려 ‘기지국가’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반면, 보수 우익이 주장하는 정상국가화가 한국전쟁 휴전체제의 해체보다는 그 강화를 의도하는 가운데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지국가의 정상국가화는 동아시아 휴전체제의 해체와 한 쌍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이 될 터인데, 일본의 보수 우익은 미일동맹의 강화를 통한 휴전체제의 온존 강화와 정상국가화라는 모순된 역사 과정을 동시에 이루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휴전체제 종식을 위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일본의 헌법 개정 논의가 3년의 유예기간을 갖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원전 갈등과 동아시아 평화

한편 기지국가는 원전국가이기도 하다. 기지국가가 전후 일본 국가의 안보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원전국가는 경제적 표현이다. 일본은 2011년 3월 시점에서 54기의 원전을 보유하여 미국·프랑스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원전국가였는데, 국토면적을 원전 수로 나눈 단위면적으로는 세계 제2위, 인구밀도당 원전 수는 세계 1위의 원전국가였다. 그런데 국민의 생활과 기업의 생산에서 원전의 존재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원전국가 일본의 위기가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감지되고 있다.

많은 일본 국민이 후쿠시마 제1원전이 수소폭발을 일으켜 연료봉이 용융되어가는 모습에서 원전에 의존해온 전후국가, 즉 원전국가의 용융을 겹쳐 보고 있었다. 이후 금요일마다 총리관저 앞에서 열린 시민들의 집회가 2012년 6월 정점에 이르면서, 원전국가로 상징되는 전후국가가 시민사회의 힘으로 결정적인 변화의 기로에 세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작년 말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탈원전 진영은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고, 전후국가의 변화를 가로막는 핵심적 존재가 전후정치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근대 이래 부식된 일본의 내부 식민지주의와 그 위에 전후 이래 침착된 미일동맹의 이중구조이며, 바로 그것이 ‘기지국가’라 부르는 전후체제였던 것이다. 일본 최초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선거로 기록될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탈원전을 구호로 내세워 넷심의 지원을 얻은 후보가 도쿄도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변화의 기로에서 멀어져가던 일본을 다시 기로 앞에 되돌려 세운 데 의미가 있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후쿠시마의 위치가 전후에 이어진 제국 일본의 ‘내부 식민지’ 문제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와 후쿠시마의 제1원전이 쌍을 이루는 문제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증표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지국가의 해체를 통한 정상국가화의 시도가 원전국가의 온존과 동시에 진행되는 것 또한 일본의 보수 우익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순이다. 반면 기지국가로 존재해온 전후체제에 손대지 않고 원전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 탈원전 진영 또한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탈원전 진영의 근대 비판 담론은, 내부 식민지에 대한 가해자 의식의 재각성을 의도한 것임에도, 실제로는 근대화의 희생자로서 일본인 이미지를 재생산하며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연히도 후쿠시마 사태와 동시에 진행된 센카쿠 및 독도 분쟁을 매개로 근대 비판의 내셔널리즘은 일본인의 피해망상을 자극하여 공격적인 배외주의를 용인하고, 우익이 주도하는 정상국가화 담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야말로 비록 3분의 2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여당 자민당이 단독 과반에 육박하는 대승을 거둔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당장 헌법 개정에 나설 만한 상황은 아니며, 당분간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가시화하는 데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그런 한편 대외정책에서는 아베의 색깔을 강조하려 할 것이다.

유예된 3년, 한·중·일 모두에 기회의 시간 되어야

즉 지구적 수준에서는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지역적 수준에서는 대중 포위망을 구축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위해 한국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계 개선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 또한 원칙의 외교를 굽히지 않고 있어 단기간의 관계 개선은 제한적일 수 있다. 대러 외교에서도 북방영토 문제에 대한 유연한 접근이 힘들기 때문에 외교적 성과를 올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베 총리는 북일관계에서 외교적 폐색 상태를 타파하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납치 일본인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온 아베 총리는 본인만이 북일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자부심 또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 외교로서는 기회이자 딜레마가 될 것이지만, 일본의 정상국가화를 동아시아 수준에서 연착륙시킨다는 의미에서라도 기회로 삼아봄직하다. 북일관계 정상화는 동아시아 휴전체제의 해체에 기여할 것이며, 지역 수준에서 다자외교의 복원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 전개한 논리의 연장에서 볼 때 일본에서 원전국가를 해체하려는 시도에 이웃 국가가 협력하는 것도 동아시아의 휴전체제 해체에 기여할 수 있다. 원자력에 대한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원자력 집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중·일 3국이 협력하는 것은 이들 3국이 회피할 수 없는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복원을 위한 거점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로에서 역사문제에 가로막혀 동아시아 3국의 협력이 지체되고 갈등이 고조되는 현실을 후대의 역사가 어떻게 기록할지에 대해서도 역사의 진보를 믿는 진영에서는 고민해봐야 한다. 나아가 역사문제가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지만, 원자력의 제어되지 않는 이용은 그 지역에 사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기지국가=원전국가’의 해체와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일본의 헌법 개정 논의를 더 이상 제어될 수 없는 임계점에서 폭발하기 전에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체제 속에서 연착륙시키는 것, 이것이 동아시아의 평화 진영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일본에서 평화 진영으로의 정권 교체를 바랄 만큼 동아시아의 현실은 여유롭지 못하다. 헌법 개정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아베 일본의 3년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동아시아의 3년이 될 수 있다.
 

 

글·남기정
도쿄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2000). 고려대 평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일본 도호쿠대학 법학연구과 교수,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등을 거쳐 2009년부터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재직 중이다. 전후 일본의 정치와 외교를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문맥에서 분석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며, 최근에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와 평화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김대중과 한일관계>(공저·2012), <전후 일본, 그리고 낯선 동아시아>(편저·2011) 등의 저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