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이 본 ‘헌법 9조’와 영구평화
“1.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밖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 헌법 9조
일본에는 세계적으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헌법 조항이 있다. 그 유래가 어찌됐든 그렇다. 그것은 바로 헌법 9조의 평화주의 조항이다. 이 조항은 전쟁의 영구 포기, 전력 보유 금지, 교전권 부인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그 자체로 너무도 파격적이기에 가라타니 고진은 여기에 일본의 군사적 부활을 억제한다는 목적 말고도 다른 것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 칸트 이래의 영구평화 이념 말이다. 가라타니는 헌법 초안 작성자가 자국 헌법에 써넣고 싶었던 것을 일본 헌법에 써넣은 것이라고 진술하기에 이른다.(1)
일본 헌법 9조에서 영구평화라는 칸트적 이념을 발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정말 초안 작성자가 그것을 거기에 써넣은 것도 같다. ‘문명적인’ 유럽의 패전국에 그런 것이 강제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거세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인은 한 번도 거세된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던 가라타니도 “실은 명백한 ‘거세’가 한 번 있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이고, 그 결과로서의 전후 헌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2)
‘거세’라는 말에 걸린 것은 생각보다 크다. 남자라면 왜 아니겠는가? 헌법 9조는 미 점령군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으로 일본인은 거세됐다고 말하며, ‘어른스럽게=남자답게’ 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법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3)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예리하게 지적하듯 “정신분석적으로 말한다면, ‘남자다움’이야말로 ‘거세’의 산물이다”.(4) 이렇듯 가라타니는 거세의 웅변술(=궤변)로 정상국가론을 펼치는 이들을 거세의 진리를 통해 반박한다. 이렇게 철학자는 소피스트를 반박한다.
하지만 철학자로서 가라타니의 탁월한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지금부터다. 점점 더 많은 일본인들이 1990년대 이후로 굴욕을 확인하려는 곳에서 그는 오히려 자부심의 가능성과 기회를 본다. 그리하여 그는 헌법 9조를 “일본인이 역사적으로 가진 유일한 보편적 원리”라고 지칭한다.(5) 가히 절묘한 역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점령군이 강제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은 영구평화라는 칸트적 이념을 헌법 조항으로 포함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나라다.
어쩌면 이런 역발상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정상국가론의 힘과 맞설 수 있는 묘책으로 고안된 것일지 모른다. 일본인으로서 전쟁 책임을 강조하게 되면 자국에서 자학사관이라는 비판에 곧바로 노출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가라타니는 거세의 의미를 더욱 엄밀하게 사용하는 동시에 일본인의 자부심에 회생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죄책감과 양심에만 호소하려 하지 않으며 긍정적 이성에도 호소하려 한다.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의 이웃인 우리는 일본 헌법 9조와 관련된 가라타니의 구상이 지닌 보편성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국적과 무관하게 한 철학자가 ‘보편적’이라는 말을 꺼내든 것은 결국 자국 국민에게만 호소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가라타니는 그 구상의 골자를 저서 <세계공화국으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패권국가를 바라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칸트의 세계공화국 이념을 계승한 것이다. 그 구상의 핵심은 각국이 점차 군사적 주권을 유엔에 방기, 양도하는 것이다.(6)
가라타니에 따르면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 존재한다. 그렇기에 국가 내부에서 국가를 부정한다고 해서 국가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는 물리력에 의존하는 일국혁명의 운명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런 혁명에서 늘 외부의 또 다른 물리력이 개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근에 그는 군사적 주권의 방기나 양도를 명확히 ‘증여’로 사유하고 있는데, 이때 그는 폭력의 힘에 증여의 힘을 맞세우고 있는 것이다. “일국에서 유엔에 군사적 주권을 ‘증여’하는 혁명이 일어난다고 하자. 이것은 ‘일국혁명’이다. 하지만 그것은 간섭을 받거나 고립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떤 무력도 ‘증여의 힘’에 대항할 수 없다. 그것은 많은 국가의 지원을 얻어 유엔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일국혁명’이 ‘세계동시혁명’을 만들어낸다.”(7)
군사적 주권의 증여를 기반으로 유엔을 세계공화국의 싹으로 키우려는 생각이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헌법 9조로 말하자면 “일본인은 그런 헌법이 발포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8) 또한 “소련을 이상화하는 사회주의자도 헌법 9조처럼 터무니없는 것을 생각했을 리가 없다. 그보다 일본에 ‘적군’(赤軍)을 만들려고 했다”.(9)
만약 우리가 가라타니의 세계공화국 구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려 한다면, 하지만 동시에 일관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면, 일본 헌법 9조 역시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군사적 주권의 방기를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 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하려 한다면, 더 이상 일본인의 양심과 죄책감에 호소하는 길만 찾을 것이 아니라, 헌법 9조의 보편성과 ‘터무니없음’을 이성적으로 수용하고 학문적으로 재조명하는 길도 모색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끝으로 헌법이 아닌 자위대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일본은 모든 전투력의 방기를 주장하는 헌법의 존재와는 별도로 사실상 거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가라타니는 이 애매한 상태의 지속이 위험하다고 본다. 즉 헌법상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가 법률상 존재한다면, 헌법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게 되며 헌법보다 우월한 힘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헌법 9조를 ‘원리’로서 재확정하기 위해 자위대를 ‘자위’에 한정된 것으로 헌법상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헌법의 원리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10)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할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때 그는 결국 헌법 9조의 문제와는 별도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군사력을 유엔에 증여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생각을 진척시키지 않은 셈이다. 일본 헌법 9조는 군사적 주권이 방기됐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그것이 유엔에 증여됐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군사력이 출몰할 때, 방기와 증여의 등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둘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실천일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의 실천은 가라타니 말대로 ‘데모’ 말고는 없을지 모른다. 얼마 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헌법에 손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헌법 9조의 인류 보편적인 함축에 빛을 비춰 이에 지지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또한 우리 스스로를 돕는 길이라면.
가라타니 고진은 누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의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1960~70년대에 ‘일본의 사르트르’라 불린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 이후 일본 사상계를 대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의 젊은 인문학자들에게도 ‘인문학계의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불리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진은 1978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재해석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노동운동이 현대에는 소비자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자본의 횡포에 소비자가 불매운동 등으로 맞섬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세계평화를 위한 일본의 대안으로 재해석한 그의 <세계 공화국으로>는 칸트의 <영구평화론>(1795)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은유로서의 건축> <트랜스크리틱>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 <언어와 비극> <근대문학의 종언> <정치를 말하다> <세계사의 구조> <철학의 기원> 등 다수가 있다. 1941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가라타니 요시오이다.
글·이성민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도서출판b 기획위원. 저서로 <사랑과 연합>, 역서로 슬라보이 지제크의 <까다로운 주체>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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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라타니 고진, <문자와 국가>,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1.
(2)~(5) (1)과 동일.
(6)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7.
(7)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2.
(8)~(10) (1)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