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로 가려진 거울

2013-08-07     제라르 모르디야


텔레비전의 보편화와 함께 이미지 문명이 도래하고 전자우편과 웹이 급성장하며 문자의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글과 이미지, 두 의사소통의 수단을 경쟁자로만 치부한 나머지 그 쌍둥이적인 성격과 본래의 친밀함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성물 앞에 절할 때 거울 부적에 성물이 비치면 그 이미지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 믿고 모자에 작은 거울을 달고 다녔다. 이 성스러운 이미지가 영원히 자기 곁에 남아 위험과 질병, 악마와 마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리라 확신했다. 당시 이 값싼 거울은 반들반들하게 잘 닦인 납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거울 제작은 금속세공 기술을 익혀 금속과 합금 작업을 하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벌인 사업 영역이었다. 구텐베르크는 작은 거울을 제작해 순례자에게 판매했다. 그러다가 점차 이 관습이 잊히고 사라지자 구텐베르크는 단순한 거울 제작에서 벗어나 내구성이 뛰어나고 복제가 가능한 이동식 인쇄활자 제작에 뛰어들었다.

물론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긴 했지만 흩어져 있던 요소를 통합해 현대적으로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성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성서를 인쇄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비록 인쇄술을 통해 면죄부를 대량생산한 부끄러운 과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30줄로 된 면죄부를 판매하며 천국을 약속했다. 책임자로 임명된 요한 테첼 수도사는 “동전이 헌금함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면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이 해방된다”고 설교했다.(1)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마인츠(구텐베르크의 고향이었다!)의 대주교직을 탐낸 브란덴베르크의 알베르트 추기경(1490~1568)에게 뒷돈을 대기 위해 하느님이 거래되고 있는 현실을 규탄하며 비텐베르크 성의 정문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루터의 학생들은 이 반박문을 베껴 인쇄했다. 금속활자의 단어들이 종교개혁을 이끈 수도사들에게 최초의 무기였던 것이다.

결국 비친 물체의 반영(反影·성스럽거나 통속적 이미지)이 남겨진 금속거울과 인쇄된 금속활자본(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내용)이라는 두 개의 고리는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사슬에 묶여 있는 셈이다. 거울 속에 남겨진 이미지와 인쇄물로 남겨진 단어, 그리고 문학과 이미지(그림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간에)의 관련성은 명확하다. 단어와 이미지가 완벽한 동의어가 돼버린 순간부터 ‘이미지’라는 용어는 그림이나 영상의 측면으로만 제한될 수 없고, 단어도 그 표면적 의미로만 축소될 수 없다. 단어와 이미지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인력에 의해 서로를 끌어당기며 의미를 극도로 압축해놓았다가 매우 미세한 조직체에서 표현의 핵분열과 함께 폭발하면서 작품이 탄생한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글-단어/이미지-반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단어/이미지: 서로 마주 보는 두 거울,
하나의 수정란에서 탄생한 샴쌍둥이.’

‘구텐베르크의 금속수정란.’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인쇄된 성서(읽는 성서)와 ‘문맹자의 성서’로 여겨진 거대한 성상집(보는 성서), 이렇게 두 성서가 하나로 통합됐다.
옛날에는 가족 중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가족이 집 안에 있는 괘종시계의 시계추와 회중시계의 바늘을 멈추게 했다. “아! 삶의 시계가 방금 멎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다.”(아르튀르 랭보, ‘지옥의 계절’) 그리고 시계가 멈춰 있는 동안 마치 죽은 이가 캔버스에 그려진 듯 거울에 불투명한 천을 덮어놓거나, 대부분은 이럴 경우를 대비해 옷장에 보관해놓은 투명한 망사를 덮었다. 절대로 거울에 죽은 이의 모습이 비치지 않도록 했다. 살아 있는 사람 대신 죽은 이의 모습이 비치면 절대 안 되었다. 소설가 필립 로스는 <카운터라이프>에서 “매일 아침 내가 거울을 볼 때면 모든 가족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누이와 형제를 본다. 처음부터 죽어 있는 모든 이를 본다. 그들은 모두 그곳, 내 더러운 낯짝 속에 있다”고 묘사했다.(2)

고대인들은 신중했다. 거울에 비친 죽은 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두렵다. 베일로 가리지 않으면 죽은 이의 눈이 산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건 위험하고 위협적이다. 촬영 무대에 거울을 여러 개 설치할 때 카메라의 위치를 정하기 위한 규칙이 있는데 그 원리는 간단하다. “네가 나를 보면 나도 너를 본다.” 즉, ‘거울이 카메라를 보면 카메라가 거울에 비친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카메라 기술자는 거울을 배치하고 거울과 마주 보는 것을 피하는 앵글로 카메라 위치를 잡아야 한다.

죽은 이의 집에서 베일로 거울을 가리는 관습은 사라졌지만 반영이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다소 의식적으로 다른 형태로 지속됐다. 우리는 집의 벽에 그림을 걸어놓거나 눈에 띄는 곳에 책을 보관한다. 이 물건들은 베일로 가린 거울과 마찬가지로 불투명하고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림과 글(반영이 없는 거울)은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에 효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방의 벽에 나체화를 걸어놓도록 했는데, 부부가 성교를 하는 동안 신부가 그림 속의 아름다운 나체를 즐기면 어여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거울은 마주 본 상대에게 좌우가 반대된 이미지를 비춰준다. 마치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단어가 인판에 거꾸로 배열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그림이든 글이든 모든 예술의 반영은 언제나 죽음, 삶의 반대와 맞서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책의 이면, 영화의 이면, 그림의 이면 등 삶의 반대를 찾으려 애쓴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굳이 유골을 등장시키지 않아도 성서나 책, 그림, 영화, 사진은 모두에게 덧없는 허무함을 연상시킨다.
가차 없이 회상되는 책이나 그림의 이미지는 우리 자신이 반영됐을 때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방심하는 독자고 관객이다. 우리 앞에 놓인 베일 때문에 볼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퍼즐 맞추기처럼 이미지는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보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죽음의 관점으로 베일 너머로 자기 자신을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일과 반영의 대조에 대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 자문할 수밖에 없다. 그 의미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쓸모 있을지 알기 위해서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베일, 우리를 현혹시키는 반영은 어떤 소용이 있는가. 단어 대 단어, 문자 대 문자로 끊임없이 읽고 읽히는 책에서 비롯된 것이든 소리가 나는 것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촬영된 것이든 그 이미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평생 동안 다 탐험하지 못할 정도로 광활한 어둠을 밝혀내기 위해 가장 간결하고 미세한 단어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 것인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에서 안쪽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멋 부린 속임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관람객과 마주 보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다. 화가나 사진가, 작가가 초상화, 아니 자화상을 제작할 때 그들이 그리거나 촬영하고 쓰는 것은 관람객 혹은 독자의 초상화다. 독자는 자신과 무관한 작품 속에서 자기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려고 무던히 애쓴다. 베일 없이 죽음을 마주 보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의 거울 속에서 애써 자신을 보려 한다.
 이미지- 다시 말하지만 이미지로 여겨지는 단어까지 포함한 모든 이미지- 는 본질적으로 난해한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모습이나 추상화, 생 쉴피스의 석판화, 설형문자나 히브리어, 라틴어가 새겨진 작은 판, 또는 사진작가 워커 에번스의 미국 백인 어린이의 초상화 등 이 각각의 이미지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가 보고 읽는 작품이나 이야기의 속임수 너머에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더욱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여러 번에 걸쳐 유리창 뒤에 캔버스를 노출시켜 관람객이 확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했다. 그리고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바로 비극적인 것이었다. 정치가 생쥐스트는 그것을 ‘오늘날까지 감춰져온 가혹한 진실들’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끔찍하게도 베이컨 안에 있는 그들이었다.

이미지는 눈과 귀뿐만 아니라 피부의 모든 모공을 통해 우리 내부로 침투한다. 우리가 지나는 풍경이나 밤낮으로 존재하는 공간, 그림, 영화, 사진, 텔레비전, 쓰이거나 듣는 단어는 우리에게 이미지를 보내고 가슴을 뛰게 한다. 그래서 구텐베르크의 작은 거울과 금속활자는 우리를 꼼짝 못할 만큼 두렵게 한다. 우리 몸은 꿈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로 이루어진 조직체다. 그래서 우리는 꿈의 살갗을 ‘예술작품’이라 부르며 멀리서 감시하는 동시에 찬양한다.

 

글·제라르 모르디야 Gérard Mordillat
최근 저서로 <흐릿한 붉음> (Rouge dans la brume, Calmann-Lévy, Paris, 2011)이 있다.

번역•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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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일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로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담당했다.
(2) Philip Roth, <La Contrevie>, Gallimard, coll. Folio, Paris, 2004 [1re éd.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