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영화에 비친 일본의 '워킹 푸어'

2009-04-04     오다이라 나미헤이 | 언론인

소설과 영화에 비친 일본의 ‘워킹 푸어’

도쿄는 잇따른 파문에 시달리고 있다. 중의원 선거를 수개월 앞둔 시점에서 오자와 이치로 야당 당수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지난 2월 16일에는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상이 로마에서 열린 선진7개국(G7) 재무장관 회의 기자회견장에 만취한 상태로 나타나 말썽을 일으킨 뒤 결국 사임했다. 제2차 경제 활성화 방안 논의가 한창인 지금 이보다 더한 악재는 없다. 그러는 동안, 일본 사회는 극심한 빈곤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오다이라 나미헤이   언론인·도쿄 거주

2008년 6월 8일. 햇살이 화창하던 오후, 한 20대 남성이 도쿄의 대중문화 중심지인 아키하바라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많은 도쿄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복장을 한 이들을 구경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여느 일요일과 다를 바 없던 그날의 평온함은 청년이 난데없이 칼을 꺼내 17명에게 휘두르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이 가운데 7명이 목숨을 잃었고 10명은 중상을 입었다.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다.1)
전문가들의 해설은 이번에도 똑같다. “일본은 범죄 발생 강대국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려면 치안을 강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 이래 잔혹 범죄의 발생 건수는 계속 줄었고, ‘평화의 항구’라는 일본의 명성은 이에 걸맞아 보인다. 어느 일요일 오후, 삶의 기쁨을 상징하는 거리에서  시민들을 끔찍하게 죽이기로 마음먹은 그 청년은 사실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나 죽이고 싶었습니다.” 체포 직후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타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했다. 
 계약직 근로자였던 이 청년은 사건 발생 몇 주 전부터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실직과 버림받는 데 대한 공포가 드러난 글들을 수차례 올렸다.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일본인들이 현실에서 벗어나려 가상 세계로 도피하고 있다.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이러한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 90% 이상이 스스로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던 일본에서 말이다.2)
 

영화 <도쿄소나타>의 장면


일본식 모델의 해체, 혼돈의 시대로

 

과거 일본 국민은 경제 강대국 대열 합류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단결했다. 이러한 소속감 덕분에 정치와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됐다. 국가·회사·학교·가정은 모두 개인의 좌표 역할을 했으며, 일본인들에게는 그저 이미 닦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했다.
어느 누구도 1990년대의 격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금융 거품이 터진 후 ‘일본식 모델’이 그토록 급격히 해체되리라고는 정부도 기업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는 공교롭게도 공산주의권의 붕괴와 동시에 일어났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경제가 쇠약해지면서 일본의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안정기를 지나 이제 엄청난 규모의 충격을 수반한 혼돈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수위권에 들던 일본 은행들이지만 위기로 인해 그 시스템이 취약해졌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근로자들을 즉각 대거 해고했다.

지정학적 측면을 보면, 냉전기에 미국의 둘도 없는 우방이던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가 아무리 각별해도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영향을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휘청거리는 경제로 인해 허약해진 일본이 이제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다져야 하는 과제까지 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일본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없어 보였다.
이러한 첫 번째 위기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재기하는 듯하던 일본이 또다시 주저앉고 있다. 비록 미국이나 유럽처럼 금융 거품에 휩쓸리지는 않았지만 일본도 타격을 입어 국내총생산이 12.7%나 감소했다. 이러한 급락은 2008년 1월에서 2009년 1월 사이 45.7%나 줄어든 급격한 수출 감소 때문이다.3) “일본의 수출 산업은 세계 경제 호황의 덕을 크게 보았습니다. 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된 지금 가장 큰 고통을 겪는 것도 바로 이 산업입니다.” BNP파리바 도쿄지점의 수석 경제연구원인 고노 류타로의 지적이다.4)

수출 지향적 경제의 상징인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그 첫 번째 피해자다. 지난해 흑자를 기록한 도요타는 2009년 3월 말 종료되는 회계연도에 4500억 엔(34억 유로)에 이르는 적자를 기록했으며 4천 명 이상을 해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동차 업계를 통틀어 2009년 4월 1일자로 2만8천 명가량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전자 부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일본의 실업률은 1월 말 현재 4.1%이며 연말에는 6%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5)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지만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가 당연시되던 일본으로서는 사회의 빈곤화를 인정하기가 더더욱 쉽지 않다.

 

영화 <도쿄소나타>의 장면

희망이 없는 죽은 사회로

희망이 없는 죽은 사회로

 

희망이 없는 죽은 사회로

 

일본은 1997~98년 위기를 해결하려고 실시한 규제 완화 조처들로 인해 현재 난관에 대처하는 능력이 저하됐다. “이 나라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한마디로 죽은 나라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희망의 나라의 엑소더스>6)에 등장하는 중학생의 이러한 말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팽배한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집단 가출 청소년들이 홋카이도에 바깥 세계와는 다른 운영 법칙을 가진 반(半)독립국가를 세우는 이야기를 상상했다.

금융 거품기에는 모두가 혜택을 입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긴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나머지 이들에겐 불안정한 일자리만 남겨졌을 따름이다. ‘프리터’(freeter·영어 ‘free’(자유)와 독일어 ‘arbeiter’(일)가 합쳐진 신조어)나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직업도 없고 교육이나 훈련도 받지 않는 상태)와 같은 표현이 신문에 등장하면서 소외 현상의 동의어로 자리잡았다.7) 2008년 말 현재 180만 명 이상의 프리터족과 약 64만 명의 니트족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이제 ‘잃어버린 세대’를 이루고 있다(영어 ‘lost generation’을 줄여 ‘로스제네’라고 부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자신의 작품 <도쿄 소나타>에서 와해되는 어느 가정의 장남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세대를 그려 보인다. 미군에 자원 입대한 그는 일본에서 머나먼 중동으로 참전하러 떠난다. 일본 국민이 미군 병사가 되는 부조리한 논리를 끝까지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청년은 적군으로 전향하며 “절대적 행복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런 식으로 거머쥔 것이다. 감독이 주려고 한 교훈이 이것이다. 일본 사회가 거듭나려면 젊은이들이 필요하며 일부 좌표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영화에서 가정으로 대표되는) 일본과 그 외부 세계의 관계를 상징하는 뜻으로 국경을 강조했다.

영화가 보여준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2001~2006) 내각이 이끈 정치가 실패한 후 일어난 사회 전환상이다. 젊은 인터넷 사업가 호리에 다카후미는 신자유주의가 대두된 이 시기를 상징한다. ‘돈만 있으면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그는 1996년부터 ‘라이브도어’(Livedoor)라는 거대한 인터넷 제국 건설에 나섰다. “당신 같은 분이야말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라며 고이즈미 총리가 치켜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2006년 1월, 33세의 최고경영자는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 그의 구속으로 발칵 뒤집힌 도쿄 증시는 폐장 전 20여 분간 업무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는다.
호리에가 추구한 가치관이 일본 젊은이들의 일부를 꿈꾸게 했는지 몰라도, 돈이라는 유일한 권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나머지 젊은이들을 철저히 소외시켰다. 영화 <도쿄 소나타>는 소속 부서의 중국 이전으로 가장이 회사에서 해고되면서 시작된다. 그는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만다.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는 한, 그래서 회사가 기록적 흑자를 달성하는 한, 이러한 사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많지 않다. 시스템에서 배제된 이들조차 자신이 그 일원인 양 행동하는 형국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작품 속에서 해고된 간부도 모범적 샐러리맨의 생활을 지속한다. 그는 실직을 했는데도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언젠가는 시스템 속에서 자기 자리를 회복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세계화가 일본식 모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을 그도 인정해야 한다.

 세계화는 영어로 일명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층)라고 하는 근로자 계층의 양산에도 한몫했다. 이는 이러한 개념이 비단 일본 문화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은 중산층을 의미하는 ‘주류’라는 용어를 통해 자기 모습을 발견하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게도, 심히 불편한 현상을 논할 때에는 외국어로 된 표현의 사용을 선호한다.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2006년 7월 저녁 프라임 시간대에 방영한 다큐멘터리 <워킹푸어, 일해도 풍족하게 되지 못한다>는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던 현상을 이제는 대책 마련이 시급한 집단적 실패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반(反)빈곤네트워크의 간부인 유아사 마코토는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근로자들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사회를 ‘미끄럼틀 사회’라 표현하며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미끄럼틀을 타고 일단 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거슬러 올라올 수 없습니다. 즉, 소외된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재출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가적 단결을 위협하는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발 벗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적 연대와 정체성 필요

그는 2008년 12월 31일부터 2009년 1월 5일까지 새해맞이 파견노동자 마을을 이끌었다. 도쿄 한복판 히비야 공원에 마련된 캠프의 목적은 불황으로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무런 사회보장 혜택도 누리지 못하며 고용주가 마련한 숙소에 상당수가 묵고 있는 이들 근로자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는 처지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이들 중 15만7천 명이 2009년 4월 1일자로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8) 유아사 마코토의 활동은 효력을 발휘했다. 약 1700명의 자원자들이 파견노동자 마을에서 봉사했다. 이곳에 있던 500여 명의 파견노동자들은 법률 자문의 도움으로 보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도 이런 마을들이 마련됐다.

일본이 본궤도로 돌아오려면 이것으로는 역부족임을 물론 유아사도 알고 있다. 좀더 균형 잡히고 누구나 제 위치를 찾아갈 수 있는 다른 경제 모델을 고안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아무런 설명 없이 행동을 취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났다. 2008년 일본 공산당에 신규 등록한 당원은 약 1만4천 명에 이르며 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의 구독자 수도 크게 늘었다.9)
26세 청년 고노 하루키는 사회적 관계를 새로이 규정하고 젊은이들이 노동 세계에 좀더 조직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협회인 포세(Posse)를 이끌고 있다. 그를 통해 일본인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협회에서 분기별로 발간하는 동명 잡지가 창간호에서 다룬 주제 중 하나는 ‘아키하바라 살인사건에 비추어본 정체성과 청년노동자’였다. 편집위원회에서도 이 비극적 사건을 사회 불안의 맥락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 잡지는 많은 부수가 판매되었고 격렬한 논쟁의 단서를 제공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1) <니혼TV> 방영 프로그램, 2008년 6월 9일, 도쿄.
2) 일본 총리실 조사 발표, 1976.
3) <도쿄신문>, 2009년 2월 25일.
4) <아사히신문>, 2009년 2월 26일.
5) <주간 아사히>, 2008년 12월 26일.
6) <문예춘추>, 도쿄, 2001.
7) 오다이라 나미헤이, ‘일본 삶의 애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5월호 참조.
8) <마이니치신문>, 2009년 2월 27일.
9) <아사히신문>, 2009년 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