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 인류애의 아코디언

2013-08-08     베르나르 우르

인도주의적이거나 자비롭거나 연대감을 드러내는 솔선수범 행위가 확산됨에 따라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연대감, 원조, 자비, 인도주의적 긴급 구조 중에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인도주의’라고 말할까? 타인의 불행에 대한 무관심을 끊임없이 질타하는 도덕적이고 총체적인 거대한 포맷 작업이 전개되면서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논쟁은 윤리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은 염려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연대 활동의 내용은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선 연대 활동과 그에 동반되는 논쟁을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 강조할 수 있다. 우리 눈앞에 형성되는 ‘연대 시장’은 일반적으로 국가가 손을 떼는 상황에서 펼쳐진다. 물론 자국의 독재적 상황 때문에 인도주의적 기획 대상이 된 국가들은 예외다.

20세기의 복지국가는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 20세기에 빈곤이란 것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연대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복지를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역으로 인도주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희생자들의 사회적 조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희생자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위험,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위험에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비상사태를 알리는 상징적 위험인 기아(饑餓)로 인한 죽음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 비상사태가 타당하든 잘못된 것이든 간에 그렇다. 프랑스에서 ‘레스토 뒤 쾨르’(Resto du Coeur·무료급식 시민단체)는 공적 식품구호기관보다 훨씬 더 미디어에 많이 등장한다. 개인적 자비심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적 식품구호기관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공적 활동에 필요한 보완물로서 민간 주도의 사회부조단체는, 만약 그 사회부조단체가 국가를 대체하는 단체나 국가의 대안책으로 여론에 등장하지 않는 한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틀 내에서 해석된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내부 폭발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공격으로 국가의 사회주의적 모습이 제거되자, 오늘날은 위험관리를 점점 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국가 정책의 중요 목표가 되고 있다. ‘건강의무 협약’에 따라 가정에서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들의 관리뿐만 아니라 주변의 불행에 마음의 동요를 느낀 자비로운 기부자들의 관리도 포함된다. 예전에 이런 일을 책임졌던 국가가 무력해진 것 같다. 국가가 이런 일을 시민단체와 특화된 비정부기구(NGO)들에 하청을 맡겨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가 그나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시절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은밀하게 숨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국가가 은밀하게 뒷걸음치면서 자기 이웃에 대한 관심, 즉 ‘돌봄’(1)을 각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역할을 여성에게 연결시킨다. 여성은 관심을 갖고 치료를 하고 따뜻하게 환대하는 상징이 되어 도덕적으로 숭고한 인물로 만들어진다. 이것은 양성 사이의 불평등을 은폐한다.

기만적인 프로파간다
 
이 현상은 위험 지역에서 경찰을 대신하는 민병대와 그 형식이 유사하다. 만약 정부의 주요 정책이 모든 종류의 위험을 관리하는 것으로 축소된다면, 민간단체가 정부를 대신하고 개인의 도덕적 양심에 끊임없이 호소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형상과 상징으로서의 국가가 도덕적 책임자 지위를 잃어버리고 있다. 우월성을 빼앗긴 국가가 여러 당사자 중 하나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에 대해 사람들은 관료주의라고, 부패했다고, 인기 전술을 쓴다고 비난한다. 예전에 도덕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국가가 이제는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특히 국가가 그 선구자였던 정의의 가치를 경멸한다고 간주된다. 여러 가지 스캔들 외에도 냉전으로 인해 생겨난 수십 년간의 기만적 프로파간다 때문에 국가의 권위가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 국제통화기금(IMF)·유럽위원회·세계은행에 의해 대표되는, 다시 말해 국가들이 포기한 권력을 갖게 된 국제기구들에 의해 대표되는 다자가 참여하는 권력이 출현한다. 기술자들로 넘치는 이런 기구들이 ‘지구적 차원의 통치권’을 행사한다. 세계화란 것이 우선적으로 실업과 배제를 생산해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이기 때문에, 고삐가 풀린 시장경제의 폭력을 교화할 필요가 생긴다. 이때 인도주의 이데올로기가 국경도 한계도 무시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인권 활동’은 점점 더 많아지고 개별화되고 눈에 띄는 빈곤 그룹과 계층 쪽으로 끊임없이 향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그룹과 계층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킬 구체적인 힘을 갖지 않음에도 그렇다.

시장이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직업도 재산도 없지만 각자가 많은 권리를 가진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모든 남성과 여성은 도덕적 가치 앞에서 평등하다. 그리하여 21세기의 탈정치적 세계가 형성됐다. 현기증 나게 퇴보해 사회적 정의가 없는 탈정치적 세계에서 지구의 점령자들은 자신이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는 거대한 도덕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반추하며 위안을 느낀다. 이런 진실과 정직이란 자질들의 이름하에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중부 유럽에서 걱정스러운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를 들어 파키스탄처럼 수많은 이슬람주의 개혁운동이 구상하는 도덕 개혁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보다는 훨씬 더 빈번하게 분노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의 목표와 필요성은, 똑같은 자산을 공유할 수 없지만 똑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세계적 시민사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투명성, 연대감, 타인에 대한 배려 혹은 보살핌, 자비, 인도주의적 긴급구호조치, 원조, 호의, 간단히 말해 도덕적 ‘선’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사회라는 잠재적 실체가 시장의 폭력, 수탈, 야만적 경쟁을 일상화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급여 삭감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바로 도덕적 일이 될 텐데, 그 이유는 그것이 연대감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동자가 어쩔 수 없이 급여 삭감을 강요당할 것이다. 회사에 대한 걱정과(서로 걱정하는 일은 드물다) 책임감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계층을 위한 것도 아니면서 사회를 게걸스럽게 잡아먹는 회사에 대한 연대감을 강요하는 협박을 받아들인다.

이런 모든 시련을 공유하면서 오늘날의 남성과 여성은 서로 더 가까워졌는가? 전(前) 세기에 사람들이 ‘국제적 연대’라고 불렀던 것을 대체한 ‘지구적 차원의 연대’가 암시하는 바가 이런 식의 상호의존성이다. 지구적 차원의 연대는, 표방된 도덕적·재정적·경제적 규범에 일치하는 훌륭한 관리 규범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제시된 일반화된 상호의존 제약을 단언하고 받아들이라고 강조한다.
 
강대국들의 협박
 
유사한 계층에게만, 예를 들어 19∼20세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한 계급의 성원들에게만 호소하는 형제애와는 반대로, 현재의 연대성은 정형화된 동질성을 가진 익명의 결집체와 연관돼 있다. 현재의 연대성은 사방에서 모든 자질이 혼합된 채,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이든 어린이든 호모든 장애인이든 ‘눈에 띄는’ 다양한 소수자이든 간에, 자신들이 시간이나 돈을 기부하라는 명령을 받거나 잠재적 수혜자로 지명될 수 있기에 어느 누구도 현재의 연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연대감은 상당 부분 그 주제와 대상을 상실해버렸다. 모든 사람은 ‘공동의 선’이 되어버린 국경 없는 인도주의 내에서 모든 사람과 연대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인권이 세상에서 가장 잘 공유되는 철학적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현실은 전혀 공유되지 않고 있다. 지구적 차원의 추상적인 규범이 되어버린 국제 연대는 다양한 분쟁에 의해 피폐해진 정치 세계에 말로만 퍼져 있다. 피폐해진 정치 세계에서 강대국은 도덕적 협박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주술적 방식으로 이용된 국제연대는 세계화되고 있고 세계화된 이런 도덕 장치에 공급되는 연료가 아닐까?

국제연대는, 그 개념이 선별적으로 사용되는 모호한 용어이다. 국가수반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그 개념을 뒤흔들 때, 그것은 무장분쟁(코소보·이라크·리비아·시리아)으로 나아가는 공격적인 정치수사학을 부추기게 된다. 무장분쟁은 독재에서는 구원되지만 죽음에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수많은 민간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인도주의 전쟁이 벌어지면 그 뒤에 인도주의적 긴급조처가 이어진다. 역으로 ‘국제연대기구’(OSI)라 불리는 NGO에 의해 사용된 똑같은 수사학은 거창하고 호의적이고 평화적이다. 다시 말해 국제연대는 아코디언과 닮아 있다. 아코디언의 음악은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국제연대는 속이 텅 빈 허구적 희망일 뿐인 경우가 많다. 국제 연대가 성취되려면, 국제연대가 누구에게 호소되고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원조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연대와 구분된다. 원조는 비록 그 자체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모욕적 느낌을 줄 수 있다. 수많은 문헌들이 개발원조를 비난했다. 개발원조는, 지배의 신식민주의적 도구였고 20세기 마지막 30년간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가져오기는커녕 빚과 의존성만 더 늘렸다. ‘프랑사프리크’(Françafrique)라는 용어는 이런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불교에서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거대 종교들은 보시를 내세와 심지어 현세의 공적(功績) 획득 도구라고 주장한다. 원조는 기독교의 개인적 미덕인 동정(同情)이란 가치의 공격적인 정치 형태가 될 것이다. 기독교의 미덕에서 ‘가난한 자들’은 중요한 인물군상(人物群像)이다. 가난한 자들이 신전을 차지하고 하느님 곁에 더 가깝게 다가설 때, 가난한 자들의 존엄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해진다.(“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20장) 가난한 자들이 받는 원조는 기부자에게 도덕적 은혜가 된다. 자선의 혜택을 입은 가난한 자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수없이 해야 하는 만큼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자선이란 것이 가난한 자를 열등한 자리에 밀어넣고 그곳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덧없는 감정들
 
1980년대에 생긴 인도주의적 긴급구호단체는 국제적인 도덕 기구다. 25년간의 인도주의적 긴급구호조치는 도덕 기업이 되어버린 NGO들을 무대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성공 궤도에 올려놓았다. NGO들은 그 뒤 완벽하게 실패해버린 개발 덕택에 발전했다. 긴급구호조치는 그것이 도덕적인 것인 만큼 더 절박하다. 우리가 길거리를 포함한 수많은 곳의 광고에서 되풀이해 그 모든 메시지를 듣고 상기하기 때문이다. 선의라는 인도주의적 물품이 이제 자유롭게 팔리고 있다. 동기(動機)라는 것은 사라지지만, 진열대는 여전히 남게 된다. 이 진열대는 이른 시일 내에 쇼핑상가에서 미용실과 선탠 가게 옆에 자리잡을 것이다. 긴급구호조치는 덧없는 감정 시장에 놓인 인도주의적 메시지의 효율성을 대폭 증가시킨 지렛대다. 긴급구호조치는 우리가 하는 것이나, 하는 것의 결과에 대해 깊게 성찰하지 못하도록 재빨리 이루어진다. 

 연대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서둘러 이뤄내야 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핑계나 꾸며낸 겉치장에 불과할 것이다. 환기된 용어들 때문에 우리는 이데올로기적·도덕적·정치적 영역에 직면하게 되고, 심지어 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경제적 영역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영역들에서 연대는 전지전능한 단어이고 상징이며 표방된 의도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돌본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연대라는 개념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글·베르나르 우르 Bernard Hours
인류학자이자 개발연구소(ZRO) 명예소장. 최근 저서로 <개발, 관리, 세계화: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라르마탱· 파리·2012)가 있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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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블린 피에예, ‘자유, 평등… 돌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