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와 손잡은 말리 사람들
프랑스시민구호단체(SPF)는 말리의 국제개발협력연대조직 및 지역의 파트너와 더불어 식량 자급자족, 음용수 접근, 여성 문맹 퇴치 같은 수많은 프로젝트를 케예스 지역에서 수행하고 있다.
북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재정복한 이후, 말리에서는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2013년 4월 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된 보고서(1)에서 “인도주의적 상황이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유엔은 말리 내에 29만2천 명의 이주민이 존재하고, 모리타니·부르키나파소·니제르로 피신한 사람이 17만7천 명 있는 것으로 집계했다. 프랑스시민구호단체(SPF)는 공식 보고서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불안정한 위기에 가뭄과 척박한 수확으로 인한 식량위기가 겹치고 있다”고 강조한다. 적어도 말리 사람의 77%가 앞으로 빈곤선상에서 살아갈 것이고, 식량위기로 인해 460만 명이 위협받고 있다.
1980년대부터 말리에 진출한 SPF는 긴급구호원조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필수품이 북부의 이주민 가정에 배분됐고, 수많은 조립 위생시설이 2012년 10월 모프티의 보건센터에 제공됐다. 지난 1월 의료장비가 주민센터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가오 지역의 바라와 부라시(市)의 시장들에게 전달됐다.
SPF는 30년간 활동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다. 프랑스 파리의 생드니에 정착한 ‘트랭가마레나(Tringa-Maréna) 출신 거주민 연합단체’ 그리고 ‘말리의 국제개발협력과 연대’(AMSCID)와 더불어 특히 케예스의 면직산업 지역에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두 단체는 바마코(말리의 수도)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바시루 디아라에 의해 창립됐다.
생드니에서 바마코까지
1968년 무사 트라오레 중위는 말리 독립의 아버지 모디보 케이타 대통령 정부를 전복한다. 그때 디아라는 말리를 떠난다. 아직 20살도 되지 않은 때였다. 프랑스로 망명한 뒤 처음에는 노동자로 일하다가 공산주의 일간지 <뤼마니테>에 들어간다. 지칠 줄 모르는 그는 직장 생활, 법학 공부, 정치·노조·시민 활동을 동시에 해나간다. “나는 투쟁주의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고 그가 털어놓는다.
1981년부터 트라오레 군사독재가 몰락하는 1991년까지 ‘말리애국민주전선’의 사무총장이던 그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말리 야당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민 온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고, 비영리 시민단체에 매달린다. 특히 SPF의 전국위원회에 들어갔다. 알파 우마르 코나레(1992∼2002년 대통령)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호소’를 듣고 말리에 다시 돌아온 디아라는 이미 20년 전부터 권력의 통로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개발과 해외 말리인 담당 기술 자문관인 그는 프랑스와의 이민협정에 대한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말리는 2009년 사르코지 대통령이 주장한 ‘선별 이민’을 거부한 유일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다.
2011년 그는 공화국 대통령 비서실 부실장에 임명됐다. 자신이 맡은 업무 외에도 그는 말리에 1995년 창설돼 SPF의 특권적 파트너가 된 AMSCID를 통해 개발을 위한 ‘전투’를 계속 벌이고 있다. 그는 “국가가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말리에서 SPF와 AMSCID가 이룩한 성과를 평가하려면, 수도 바마코에서 서쪽으로 600km 떨어진 소냉케 지방의 케예스에 위치한 옐리마네 권역(2)에 가야 한다. 머나먼 길이다. 흙과 물, 짚을 섞어 만든 방코(Banco)라는 허술한 가옥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마을들을 지나자, 시멘트로 지어진 몇 개의 주택이 지평선 위에 서 있다. 우리 여정의 첫 번째 숙박지 마레나다. “내가 마레나를 떠났을 때는 밀짚 가옥들밖에 없었다”고 트랭가마레나 시장은 회상한다. 독재 기간에 프랑스 르노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한 상비 캉테는 1998년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1970년대에 이주자 3명이 양철 지붕으로 된 방코 가옥을 지었다. 1980년대에 와서야 시멘트로 된 최초의 주택이 건설됐다.” 말리·세네갈·모리타니·기니의 국경선과 접한 케예스 지역과 옐리마나 권역에는 아주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캉테는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 세대는 가난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현재는 돌아오는 이주민이 개발의 원천이 되었다. 이주민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트랭가마레나 출신자 시민단체와 SPF의 협력을 통해 1984년 산과병원이 설립된다. 이 건물에는 현재 조르주 고디에 공동체 연구센터 분석 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2006년 건설된 이 부지에는 보건진료소·산부인과병원·영양섭취실·약품창고가 들어섰고, 여성 보건 기술자 한 명이 상시 근무하고 있다. 보건진료소 입구에 걸린, 산부인과병원 개원식 때 하얀 부부(Boubou·흑인들이 입는 길고 헐렁한 상의)를 입고 있는, 지금은 고인이 된 SPF 의사 고디에의 빛바랜 사진이 이 병원이 걸어온 먼 여정을 방문객에게 상기시킨다. 그 시절 환자들은 케예스에서 치료받기 위해 80km를 달려가야 했다. 그 낡아빠진 사진에 말리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제 트랭가마레나 여성들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며 출산하고 있다. 매달 20∼30명이 출생하고, 어린이들은 백신을 맞고 있다. “대단치도 않은 행동을 통해 우리는 많은 생명을 구해내고 있다”고 트랭가마레나의 유일한 의사인 에제키엘 카마테 박사가 말했다. 트랭가마레나 코뮌에는 4개 마을이 포함돼 있고, 주민 1만4천 명이 살고 있다. 건기 동안에 그는 하루 평균 10∼15명의 환자를 받고 있다. 그러나 6∼10월의 우기에는 검진 환자가 하루에 40명까지 가파르게 증가한다. 대부분의 환자는 영양실조와 말라리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2년 전부터 영양실조가 특히 어린이, 임산부,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급격히 증가했다.”
행동하기 시작한 여성들
보건센터에서 몇m 떨어진 곳에 저수탑이 보인다. 저수탑 역시 SPF의 도움으로 빛을 보았다. 도수관 프로그램 덕택에 마레나 마을 주민들이 분수전(分水栓)을 통해 음용수에 접근하게 되었고, 128가구가 개별 수도관에 접속해 음용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음용수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1m³의 물 가격이 100세파프랑(CFA·약 0.15유로)인 데 비해 우물물을 이용하던 시절에는 200CFA이었다”고 말하며 시장이 미소짓는다.
인프라 건설 외에도, SPF와 AMSCID는 여성 소그룹들을 위해 거대한 농작물협동과 채소 재배 활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AMSCID의 주동 인물이며 상설 직원인 프랑시스 당벨레는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바마코로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주로 남게 되는 사람, 즉 여성들을 돕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불행하게도 아무 쓸모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는데, 사실 여성은 우리 경제·사회 시스템의 근간이다. 다시 말해 개발은 여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디아라가 덧붙였다.
2005년 AMSCID는 디아코네 마을에 최초의 채소 재배 지역을 만든다. 경험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다음해에 AMSCID는 20개 여성 그룹에 대해 유사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프랑스대사관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다. 채소를 재배하는 여성들은 매번 농기구, 종자, 비료, 살충제를 제공받았다. SPF는 파트너의 방식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그 프로젝트에 재정을 지원한다. 당벨레는 “목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다”고 강조했다.
곧바로 다른 그룹들이 만들어지고 AMSCID에 지원을 요청했다. 또 다른 18개 그룹을 위한 프로젝트가 이번에는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아 2008년에 시작됐다. 당벨레는 “채소 재배가 이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전개된 유일한 활동”이라고 분석했다. 모두 합쳐 42개 그룹이 이 프로젝트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필요한 기술을 교육받은 3500∼4천 명의 여성이 현재 하나의 토지구획을 사용하고 있다.
마레나에서는 100여 명의 여성이 채소 재배 지역을 공유하고 있다. 여성 10여 명이 우물 주위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아사 가리 부인은 자신의 토지 구획에서 샐러드, 당근, 사탕무, 토마토, 오크라를 재배한다. 등에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삶이 변화됐다. 나는 내가 재배하는 채소를 먹어본 적이 없다. 이런 채소를 찾으려면 케예스까지 가야 했다. 마레나 여성들의 생산물 대부분은 자가소비에 사용되지만, 몇몇 여성은 일부를 팔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이 여성들이 생산한 시금치를 이웃 마을 여성들이 아주 좋아해서 그 시금치를 쿠스쿠스(으깬 밀로 만든 북아프리카 음식) 소스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더 북쪽의 당발라 여성들은 이와는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우리는 대부분 양파를 재배한다. 양파가 보존하기 쉽기 때문이다. 현재 양파는 kg당 600CFA(약 0.9유로)에 팔리는데 여름에는 가격이 750CFA까지, 심지어 1천CFA(약 1.5유로)까지 오른다.” 그룹의 회장인 아사 트라오레 여사의 설명이다. 한철 농사에 여성 한 명이 50∼100kg의 양파를 수확할 수 있다. “얻은 수익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마코에서 허리에 두르는 간단한 옷, 신발, 비누 혹은 튀김요리에 필요한 밀가루 등의 물품을 사와 마을에서 되판다”고 회장이 일러준다. “채소 재배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풍족하게 먹고, 남편의 부담을 많이 줄여줄 수 있다”고 회장 옆에 있는 여성이 덧붙인다.
2년 전부터 수많은 요청 서류들이 바마코의 당벨레 사무실에 쌓이고 있다. “우리는 우선 진행 중인 사업을 유지하는 데 신경 쓰고 있다. 물 문제 또한 해결해야 한다. 물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충분한 물을 얻으려면 땅을 깊게 파야 한다. 이상적인 아이디어는 각 토지 구획에 두 번째 우물을 파는 것이다. 그러려면 많은 돈이 들 것이다.” 당벨레의 설명이다.
옐리마네세베 마을의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부딪혔다. “열기 때문에 수확이 미미해서 많은 여성들이 낙담하고 있다”고 여덟 아이의 어머니인 쿰바 니아카테가 말한다. 그날 기온은 거의 45℃에 달했다. 옐리마네세베 여성들이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의 돗자리에 앉아 이야기한다. “우리는 4년 전에 채소 재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물 문제에 부딪혔다. 새벽 4시에 온 여성들은 우물에서 물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아침 8시부터는 물이 없었다. 또 다른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면 1km를 걸어야 했다.” 회장의 면전에서 묵주알을 돌리며 기도하는 나이 든 쿰바 여사의 기억이다. AMSCID는 SPF의 지원을 받아 5개의 우물을 더 깊이 파는 작업에 착수했다. 옐리마네세베의 우물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우물들도 더 깊이 파야 할 것이다. “여성들을 돕는 것은 한 가정 전체를, 한 국가 전체를 돕는 것”이라고 마을의 수장인 사디우 니아카테가 치하한다.
또 다른 거대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데, 그것은 바로 채소 재배 여성들의 문맹 퇴치 프로젝트다. 문맹 퇴치 프로그램의 감독관이자 ‘농촌개발활동지원협회’(ADR)의 책임자인 아바 아부바카르 디아라는 “기술교육을 할 때 우리는 여성들이 전달된 강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을 배우고 싶다고 요구한 사람은 바로 여성들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옐리마네 권역 소속 18개 마을 출신 여성 568명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서아프리카 수단어의 일종인 소니케어나 풀풀데어 수업을 듣는 혜택을 받았다. 2011년에 시작된 문맹 퇴치 프로그램은 2년간 지속될 것이다.
“문맹 퇴치는 전투다”
“처음에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첫 번째 비가 내렸을 때 결석 문제에 부딪혔다. 채소를 재배하려면 자신의 농토를 경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부바카르 디아라는 아쉬워했다. 276명의 여성만이 교육을 끝까지 받았다. “그들은 읽는 법과 쓰는 법, 덧셈과 뺄셈 그리고 휴대전화 사용법을 배웠다”고 이 프로그램의 책임자는 말한다. 읽기 학습을 통해 사람들은 할례, 조혼 혹은 어린 소녀들의 학교 교육 같은 주제를 접하게 된다. 디아라는 “여성들에게 문맹을 퇴치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시켜야 한다. 말리에서 학교 교육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옐리마네 권역이다”라고 강조했다. “문맹 퇴치는 하나의 전투다. 여성과 남편 사이에 냉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당벨레는 한숨짓는다. 곧 시작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우수한 학생 248명이 회계와 경영에 입문하게 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미래의 문맹퇴치학교를 이끌고 이 프로젝트의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간 지도자 72명을 육성할 것이다.
“나는 학교에 가본 적이 없지만 요령 있게 대처하고 있어요.” 비네투 쿨리발리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한다. 프랑스로 이주한 말리 남성과 최근 결혼한 이 젊은 여성은, 모리타니에서 몇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옐리마네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 크레미스에 살고 있다. “이 교육과정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덤벼들었어요.” 옆에 앉은 당벨레에게 그녀는 자신이 품고 있는 희망을 숨기지 않는다. “내 남편은 불행하게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요. 남편이 나를 많이 격려해줘요. 만약 자격증을 받게 되면 그때는 내가 다른 여성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싶어요.”
다음날 라캉게무 마을에서 20여 개 그룹이 모이는 카니아가(Kaniaga) 회합이 열린다. 라캉게무 여성들이 노래하면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시원한 물을 대접한다. 그리고 양 한 마리를 잡는다. 각 그룹의 여성 대표들은 커다란 주택의 베란다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뜰에는 여성 10여 명이 거대한 솥 주위에서 바삐 움직인다. 아침을 먹고 나자 회의가 시작된다. 참여한 많은 여성들이 비누의 수공업생산처럼 수입이 나는 다른 활동을 개발하기 바란다.
“이 모임은 배움의 장소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라디 마이가 부인이 평가했다. 읍 그룹 회장인 야카레 포파나 부인은 “모든 카니아가읍(邑) 회원들이 모인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맺고 단합한다”고 단언한다. “우리 스스로 조직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개발시킨다.”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임무를 잘 인식하고 있는 파티마타 디알로 부인이 내린 결론이다.
글·시몽 마로Simon Maro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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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고서 5/2013/220.
(2)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 권역(Cercle)은 식민지 시절에 결정된 행정구획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