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 탈서구화해야

2013-08-08     레옹 쿵구

연대가 상징적 방식으로 이뤄지는 아프리카를 볼 때,
우리는 국제연대를 ‘귀중한 지원’으로 평가할 수도 혹은 ‘문화적 지배수단’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는 1960년대부터 국제연대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특히 서구의 비정부기구(NGO)들이 이끄는 연대 활동은 간섭이 심하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빈곤이나 전염병 퇴치 투쟁 프로그램들의 구상과 시행 과정에서 지역의 현실과 문화가 대부분 무시됐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회 자체가 힘과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면 국제연대 활동을 훨씬 더 적절하게, 결과적으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아프리카연합’ 같은 아프리카 대륙 기구들은 2000년 9월 8일 유엔총회에 의해 채택된 다음과 같은 새천년 선언에 정의된 여러 원칙을 지지하고 있다. “가장 고통받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장 혜택 받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비전은 상부상조와 인류 공동체의 연대를 중시하는 아프리카의 전통적 가치와 일치한다. 코트디부아르의 여성 철학자 타넬라 보니에 의하면, 연대는 알렉시 토크빌이 19세기에 구상한 개인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연대는 지역의 습관과 연관된 특별한 가치와 이타적 행위의 총체다.(1) 이 여성 철학자는 “‘연대’라는 말은 개발 영역의 몇몇 전문가나 다른 영역의 몇몇 초심자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개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직면해 개인들의 노력을 통괄하기 위한 여러 단체가- 더 공식화됐든 덜 공식화됐든 간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이 가족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다시 말해 가족에게 도덕적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양육 과정에서 교육받았다. 부모들의 물질적 부담, 건강 돌보기, 농업의 상부상조, 식량자원 공유 등이 도덕적 빚에 해당한다. 서비스 형태는 공동체의 생활 방식에 의해 규정돼 있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타당성은 사회의 변화나 시대의 흐름에 상관없이 항상 확인됐다. 이것의 타당성은 농촌이든 도시든 간에 현대의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 타당성은 국제연대가 인정하는 자유주의적 경제모델과 거리가 먼 역사적 연속성 속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한다. “다양한 지평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상상하고 구상만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관계에서의 상호성을 잘 모른다. 예를 들어 한편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에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당연히 존재한다. 불균형한 세계적 차원에서의 연대 행위는 소속이나 출신이 어디든 상관없이, 각 개인의 유한성과 허약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똑같은 테이블에 올려놓는 행위다. 연대 행위는 결과적으로 공통의 운명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식별의 개념을 완화해야만 가능하다.”(2) 오늘날 지구적 차원의 지원은 대부분 국가의 과오 때문에 생겨났다. 다시 말해 공권력이 자신의 기본 의무를 완수하지 못할수록 사회가 더욱 조직화돼야 하는 것이다.

연대가 유엔의 거대 구조 속에 점점 더 통합되기 때문에, NGO들이 세계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으로, 지배의 매개물이 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NGO들은 신식민주의의 구현자로 비난받을 수 있다. 우리가 ‘세계의사협회’나 ‘국제장애인협회’ 같은 몇몇 프랑스 NGO를 예로 든다면, 이 중 어떤 NGO도 지역협회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NGO들은 현지의 관행과 가치를 무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유럽위원회 산하에 있는 유럽구호단체(EuropeAid)의 강령은 이런 측면을 고려해 국제 NGO들로 하여금 현지 파트너를 의무적으로 갖게 하고 있다.

적십자 시스템은 변화하려 한다. 적십자 시스템은 우선적으로 현지의 인적·물적 자원에 의지하고 있다. 각 나라에서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국제적십자협회나 회교권의 적신월사협회가 존재한다. NGO들이 구상하는 프로젝트는 흔히 서구 모델에 따른 단선적인 개발 궤도를 전제하고 있다. 프로젝트는 그것이 실행되는 사회- 대부분 힘없고 재정적 수단이 결핍된 국가들- 를 포맷하기 위해 구상됐다. 게다가 국제적 지원은 NGO들이 자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 위해 해당 국가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들은 해당 사회의 궤적과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가 구상한 권리의 평등과 조속한 민주화를 장려한다. 2000년대에 에이즈 퇴치 투쟁 수단으로 콘돔 사용을 권장하는 상당수 캠페인은, 해당 마을의 관청이나 현지 시민단체들과 더불어 준비되지 못했다. 이 캠페인들은 카메룬에서처럼 농촌 주민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도주의 활동 참여자들은 간병인과 환자 사이에 맺어지는 자국 방식의 관계를 전파함으로써 생체의학 모델을 재생산하고 있다. “민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인도주의적 인간관계는, 기부의 복잡성 및 희생자라는 개념과도 연관돼 있기 때문에 그대로 드러내면 위험하다”고 전 세계의사협회 회장 피에르 미셸레티가 설명한다. 협회 의사들이 긴급한 의료 조치를 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저질렀다. “서구의 대학 문화에 젖은 의료팀들은 환자가 건강과 질병에 대해 갖고 있는 표상과 현지 간병인들을 존중해주지 않으면서 활동한다. 사뮈(SAMU·프랑스의 긴급의료구급대)의 관행과 응급수의학 사이에는 유의해야 할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3)

역으로 NGO들의 활동은 독재체제를 개방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휴먼라이트워치나 국제앰네스티 같은 몇몇 NGO는 사람들이 침묵하는 곳에서, 더 나쁜 경우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곳에서 일한다. 얼마 전부터 ‘기아 퇴치와 개발을 위한 가톨릭위원회’(CCFD)와 국제투명성기구는 정치 엘리트들의 부패와 빈곤 증가를 연계시키고 있다. 이 기구들은 ‘훌륭한 거버넌스’와 민주화를 권고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NGO들은 그들의 다양한 개입 활동을 자극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문제들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정치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NGO들은 대중정치에 관심 갖게 된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간섭으로 여겨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NGO들의 담론은 흔히 권력 소지자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담론이 권력 소지자들의 의무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케냐와 짐바브웨의 지배자들은 서구가 주권국가들에 대해 음모를 꾸민다고 비난한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독재정권 같은 독재체제와 관련된 책략이 조잡한 것은, 국제 인도주의 활동이 서구의 NGO들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NGO들이 가용할 수 있는 재정 수단, NGO들의 활동이 누리는 미디어 전파 보도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 특히 재정기구들이 만든 ‘일정표’와 ‘지도 방침’에 의해 명확하게 현장팀을 관리하는 것과도 관련돼 있다.

연대는 어떤 이들에게는 개입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로, 다른 이들에게는 원조로 변형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현지의 새로운 능력을 고려할 때, 특히 아프리카 시민공동체 조직을 고려할 때 국제적 균형에 더 이상 맞지 않는다. NGO들이 현지 상황을 고려하는 것은 -미셸레티가 주장하는 것처럼(4)- 활동의 합법성과 효율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이제 국제연대의 접근 방식을 비(非)서구화해야 하지 않을까?

 

글·레옹 쿵구 Léon Koungou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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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넬라 보니, ‘연대와 인간의 불안전: 아프리카에서부터 연대를 생각하다’, <디오게네스>, 235∼236호, 파리, 2011년 3·4월호 참조.
(2) 타넬라 보니, ‘연대란 무엇인가?’, www.tanellaboni.net, 2010년 2월 16일.
(3) 피에르 미셸레티, ‘인도주의 활동, 적응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아쉐트, 마라부트(Marabout) 컬렉션, 파리, 2008년 참조.
(4) 필리프 리프만, ‘비정부기구들’, 라데쿠베르트, 르페르(Repères) 컬렉션, 파리, 2009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