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분출구를 찾는 분노
세계의 선거
아랍 젊은이들의 분노의 함성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날 것인가?
2011년 말 아랍인들의 폭동에 대해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848년을 상기시킨다”고 말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적잖은 사람들이 모든 게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젊은이들의 분노는 어떠한 성과도 없이 사그라졌는가?
아랍에서 발생한 폭동이 2011년을 장식했고, 곧바로 미국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이 이어졌으며, 스페인에서 ‘분노한 이들’의 운동이,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운동이 영국 런던, 이스라엘 텔아비브,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발생했다. 논리적으로 2012년은 정쟁과 선거의 해, 독재·소수지배자의 일탈과 공범자들의 자본주의에 대해 이유 있는 분노를 표출한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러시아·프랑스·이집트·멕시코·앙골라·미국·조지아·베네수엘라·한국의 대통령 선출 방식은, 태풍이 불어오는 험난한 시기에 민주주의 대의제도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측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2011년 말 아랍의 폭동에 대해 “아랍 폭동은 1848년을 상기시킨다. 당시 하나의 혁명이 한 국가에서 발생해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고 지적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이집트 젊은이들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미 그들의 운동이 군대에 의해 짓밟히거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1848년 이후 2년이 지났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상당수의 전복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시점에서 보아 실패였다. 그러나 혁명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부분적인 성공이었다.”(1)
2012년에 사망한 홉스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코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몇 가지 상황증거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2011년 10월 튀니지가 지역 봉기의 전초기지라는 지위에 의기양양하며 선거파티를 열었기 때문이다. 튀니지 주민들이 투표소에 갔을 때, 그들은 완벽한 민주주의 방식으로 자기들의 의견을 표현했다. 여러 개의 정당(거의 100개), 비례대표제와 평등투표, 선거유세·정치홍보 비용의 엄격한 통제, 문민 치안 등 민주주의 선거 방식의 주요 원칙을 지키며 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선택은, 진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의 경찰국가 체제가 전복됐을 때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던 보수 이슬람 정당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봉기를 추진한 전위대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법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
홉스봄이 참조했던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한 지 10개월 뒤,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 연설가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공화국 대통령직에 출마했다. 그가 겨우 2만1032표를 얻은 반면, 선거 유세로 뽑힌 질서당 후보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558만7759표를 얻었다. 반동적인 미신과 과거의 신화가 계속해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튀니지의 경우 종교적 전통이, 프랑스는 황제의 명성이 봉기한 사람들의 자그마한 희망을 투표소에서 날려버렸다. 그러나 1969년 1월 어떤 논설 기자가 파리에서 멕시코를 거쳐 사이공까지, 그리고 프라하에서 베를린까지 그 전해의 대차대조표를 뽑아낸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아마 혁명의 물결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40년이 더 지난 뒤인 지금, 1968년이 서에서 동으로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구대륙을 뒤흔들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현재는 실패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으로 볼 수 있을까? 시리아의 민중봉기에 대한 탄압, 리비아의 혼란, 아랍 여러 나라의 전제적이고 개혁 반대주의 시도로 장식된 2012년은 현재 홉스봄이 암시했던 고무적인 대답을 확인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전통적 형태에 대한 학습, 다시 말해 주모자 중 한 명을 짓밟는 것 외의 다른 방법들을 통해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이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학습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좌파가 ‘유효 투표’(당선 가능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라는 위험스러운 시도에 스스로 몸을 맡길 정도로 어떤 기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미리 확신했는데, 이렇게 확신하지 않았다면 좌파는 모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자이지만 ‘나세르주의를 표방하는’ 후보 함딘 삽바히는 결국 1차 투표에서 애석하게 제거됐고, 무슬림형제단의 보수주의 지도자 무함마드 무르시가 2차 투표에서 당선됐다. 연구원인 질베르 아슈카르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지역에서 사회적 폭발과 혁명적 과정을 촉발시켰던, 경이적인 실업률로 명백하게 상징된 기본 문제들이, 종교·당파·지역·부족의 정체성이라는 환영이 창궐한 선거에서 이슈거리가 되지 못했다. 정치 무대를 지배하게 된 세력은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이전 체제의 프로그램과 특별히 차이 나지 않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집권세력은 모두 시장, 민간 영역, 자유무역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다. 역으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구체제의 축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동운동은 선거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았다.”(3)
여기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의 미국 투사들과 비교해보는 것은 매력적이다. 이들의 행동이 부자를 영웅화하고, 특히 납세 문제에서 푸자드주의(편협하게 권리 주장을 하는 태도)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캠페인 주제를 무력화·불법화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이들 역시 선거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가 재선된 다음날 좌파 주간지 <더네이션>은, 오바마를 자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우리가 갖는 공통의 감정은 위안의 감정이다. 민주당이 생각만큼은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권정치의 살아 있는 상징이 11월 6일 유권자들에 의해 철퇴를 맞았다.”(4)
표면상으로 미국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이 똑같은 대통령을 다시 뽑았고, 상원과 하원에 다수 의석을 다시 줘, 행정부와 의회 사이 2년간의 소통 불능을 뚫어주었던 균형을 결국 인정해줬다. 그럼에도 윌러드 밋 롬니가 백악관에 들어섰을 때, 이 사건이 초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해봐야 한다. 그런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공화당이 상·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할 것이고, 몇몇 사건들 역시 공화당이 원했던 대로 진행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확실한 결과가 눈에 드러나지 않자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의 투사들은 이미 흩어져버렸다. 그들이 미국의 최고 부자 ‘1%’의 특권에 반대했음에도, 경이로운 금융투기로 떼돈을 벌었다는 롬니라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롬니는 전임자가 시작한 보건 시스템 개혁을 폐지하고, 자본에 대한 세금을 축소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지원·공공시청각설비·학생장학금 예산의 축소를 결정하지 않았던가?
채권자가 유권자의 변덕을 받아들일 만큼
참을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침체와 불경기가 유럽의 여러 나라를 강타했던 그 순간에, 국가 부채 위기로 인해 이 국가들이 어쩔 수 없이 공공비용을 삭감해야 하는 경제경책을 채택한 이후, 이 경제정책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가 초토화됐음에도 결국 이 경제정책을 다시 쓰게 되었다. 2011년 아무런 실익도 없이 엄청난 고통을 받은 여러 나라들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특히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민주주의가 유례없이 후퇴하는 현실을 맛보게 되었다. 이 국가들의 주권은 ‘트로이카’라 불리는 프랑스-독일 대표회의,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을 결합한 민간 협의회에 의해 짓밟혔다. 트로이카가 연이어 그리스 총리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두 명의 전직 은행가 루카스 파파디모스와 마리오 몬티를 사임시킨 뒤 아테네와 로마에서 권력을 차지했다.
자신의 국가는 너무 작아 참여하지도 못하는 두 번의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동안, 프랑스 칸에 소환돼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앙겔라 메르켈과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공개적으로 질책받은 파판드레우는 긴축재정에 대한 국민투표를 포기하고 자신의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채권자가 유권자의 변덕을 받아줄 만큼 인내심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을까? 부패한 국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로마에서 독일 총리는 이탈리아 대통령을 소환해 베를루스코니의 사임을 요구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몬티로 대체됐다. 몬티의 이전 경력은 화려한데, 미국 골드만삭스 은행의 고문을 지냈고, 브뤼셀의 유럽위원회 집행위원으로 일했다. 2011년 말 우리는, <월스트리트저널>처럼, 베를린의 정부 수장이 교묘한 술책을 썼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메르켈의 압력에 의해, 유권자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녀가 선택했던 개혁에 호의적인 지도자들이 유럽의 남부 국가 수장이 되었다. 또한 사르코지와 메르켈은 긴축예산과 공공부채 감축이라는 독일 정책의 방향대로 유로존 전체의 방향을 결정했다.”(5)
결론은 다음과 같다. 2012년은 트로이카에게 박해받은 국가들 중 하나인 그리스에서, 그리고 프랑스-독일 대표회의를 구성하는 두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동시에 선거가 실시될 것이다. 그리스의 경우 좌파 세력이 6월에 경이롭게 성장했지만 정권을 바꿀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나라가 쪼개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반사작용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다.(6) 프랑스에선, 메르켈의 지원을 받았지만 낙선해 퇴임하는 사르코지가 특히 두려워했던 사람은, 예전과 달리 이제 전쟁사령관으로 변해버린 온화한 사회주의자 올랑드였다. 1월 22일 프랑수아 올랑드는 고함을 치며 말했다. “나의 적은 나의 진정한 적은, 이름도 얼굴도 없고, 그가 지배하는 당도 없다. 이 적은 바로 금융세계다.” 2012년 5월부터 올랑드가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금융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 변화들은
투표용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선거는 어디에 쓰이는가? 이겼을 때 실망하기 위해 선거에 전념하는 것은 아니다. 2012년 선거 결과가 뒤집어졌다면, 워싱턴이나 파리보다 훨씬 더 심하게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수도)에서 국가의 절반인 진보주의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또 나머지 절반을 열광시켰을 것이다. 투표가 상황을 뒤흔드는 데 충분하리라는 희망은 실망스러운(그래서 투쟁 의식을 약화시키는)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많은 정부가 자신들의 ‘진정한 적들’과 과감히 맞서기를 거부하고 그런 현실에 부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많은 정부는 차후에 자신들을 따돌리고 외부에서 내려진 결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주의를 농락하는 금융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문제 삼기보다, 정부의 정당들은 모든 재앙의 책임을 집권팀에 돌리길 선호한다. 자신이 집권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보다 앞선 집권팀에 책임을 돌린다. 그러고는 너무나 자주 앞선 집권팀과 똑같은 정책을 펼친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혼란이 발생할 거라는 협박, 성과가 악화될 거라는 끊임없는 위협이 민주주의적 반사행동을 경직시킬 수 있다”(7)고 지적한다. 미국 역사가 하워드 진이 주장했던 것처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흑인 해방, 노동조합 투쟁, 성(性)평등 달성, 미국의 베트남 철수와 같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변화는 투표용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합법적 혹은 불법적 전략을 구사한 대중운동의 직접적 개입에 의해 이루어졌다”(8)는 지적 역시 사실이다. 이집트나 튀니지에서 통치자들이 최저임금 23% 삭감을 감히 제안하지 못했던 것은 정말 우연일까?(9)
흘러간 한 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주었고, 우리가 곧 새로 발견하게 될 것을 예고해줬다. 즉 대중운동이 자신의 힘과 성급함을 보여준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결집돼 있으면, 역사의 방향이 당연히 변화됐다는 사실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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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BC World Service News, 2011년 11월 23일.
(2) 알랭 가리구, ‘1848년, 인민의 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5월호 참조.
(3) 2011년 12월 18일, 이집트 시디부지드에서 발표된 강연.
(4) <더 네이션>(The Nation), 뉴욕, 2012년 11월 7일.
(5) 마커스 월커, 찰스 포렐, 스테이시 마이트리, ‘심화되는 유로존 위기가 지도자들을 차례로 수렁 속에 빠뜨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 2011년 12월 30일.
(6) 2012년 6월 17일 그리스 총선에서 보수당인 ‘신민주당’이 간신히 승리했고(유효표의 29.66%), 그 뒤를 이어 극좌 연합인 시리자(SYRIZA)가 제1야당이 되었다(유효표의 26.89%).
(7) <리베라시옹>, 파리, 2011년 11월 21일.
(8) Znet에서 인용, 2012년 11월 26일.
(9) 2012년 2월 ‘트로이카’의 압력을 받은 그리스 정부는 최저임금을 23%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최저임금은 2013년 4월 약 586유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