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장미 시들다

세계의 선거

2013-08-08     레지 장테

옛 소련 역사상 최초로 2012년 10월 1일에 치러진 투표로 조지아는 민주주의와 동거정부, 두 가지를 동시에 맞이했다. 백만장자 비지나 이바니슈빌리는 정계에 뛰어들었고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야권 총리를 임명하게 만들었다.

물병의 물이 흘러넘쳤다는 말은 어쩌면 억지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물병은 가득 차 있었다. 2012년 9월 18일, 조지아의 미래를 결정할 국회의원선거 2주 전, 조지아 교도소 수감자 학대 장면이 담긴 비디오 스캔들이 터졌다. 아마 우연히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대걸레 자루로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수감자의 이미지에 카프카스의 작은 공화국 조지아는 분노의 물결로 뒤덮였다. 비디오를 제작한 간수는 나중에 치욕적인 상황을 보여준 것이고, 나아가 연출일 수도 있었다며 성폭행은 없었다고 확인했다.

옛 소련의 공화국이던 조지아의 감옥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 고문까지는 아니어도 직권남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옴부즈맨을 필두로 한 조지아 국내와 해외 기구들은 조지아의 인권침해를 정기적으로 규탄해왔다. 정부는 단 한 번도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민주주의 성공 스토리의 대척점에 서 있는 고문의 증거가 최초로 텔레비전과 국제회의에서 방영된 것이다.

10월 1일 선거 결과로 보자면- 과두체제 대표인 비지나 이바니슈빌리가 이끄는 야권 연합 ‘조지아의 꿈’이 전체 의석 150석 가운데 85석을 차지하며 승리했다- 이 스캔들이 사카슈빌리의 통합국민운동당과 2003년부터 활기차게 진행돼온 친서구적 ‘장미혁명’에 종지부를 찍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조지아 정치 옵서버가 지적한 것처럼, “비디오가 유권자의 마음을 그토록 빨리 바꿔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사실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지아의 꿈’이 훨씬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거나, 통합국민운동이 생각보다 훨씬 인기가 없었던 것이다.”(1) 사회학자인 코바 투르마니드제는 “비디오가 ‘장미혁명’에 대한 불만을 결집시켰다”고 인정한다. 평소에는 수동적이던 수천 명의 공립대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온 것이 그 예다. 시위에 참가한 영어과 재학 여대생 소피 젠티는 “교육수준이 대단히 낮다. 카카 벤두키제(2)가 설립한 사립대를 예로 들면, 교수 월급이 훨씬 높다. 그래서 뛰어난 교사는 떠나고, 우리의 학위증은 평가절하된다”고 설명한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정책은 사회 여러 분야에 실망을 가져왔다. 먼저 사카슈빌리 정부가 극도로 부패했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대통령 체제에서 만들어진 수천 개의 공무원직을 없앤 것을 들 수 있다. 한 유럽 외교관은 “사람들은 2003년 사카슈빌리 대통령 선출 당시의 쇠락했던 조지아 상황과 그가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로 했던 용기를 지나치게 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 그가 수립한 많은 사회 대책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정책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출현시켰다.

대통령 진영은 무엇보다 그의 실패가 많은 분야에서 여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선거 패배 다음날 친(親)사카슈빌리 계열의 주간지 <타불라>는 이바니슈빌리의 승리를 축하하며, ‘장미혁명’ 지지자들이 ‘붉은 인텔리겐치아’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자유주의와 이념적으로 대립하면서 소비에트연방에 향수를 느끼는 인물로 평가하는 유명 여성 예술인 두 명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이건 프로파간다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유럽만을 꿈꾼다. 나는 자유주의자지만 사카슈빌리의 인위적인 자유주의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고유의 자유주의 역사가 있다.” 이바니슈빌리의 학술정책 자문을 담당한 철학교수 자자 피랄리슈빌리의 말이다. 이른바 이데올로기적인 또 다른 반대는 강력한 조지아정교회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조지아 총대주교 일리아 2세는 중립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신학자인 바실리 코바키드제는 “조지아정교회는 사카슈빌리에게 복수하려 했다. 조지아정교회는 그의 친서구적 성향, 민주주의, 개인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증오한다”고 평가한다. 선거 전 ‘조지아의 꿈’ 야권 연합 시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직자들이 참여했던 것에 비추어보면 적어도 조지아정교회 일부는 그렇다. 그러나 카프카스 전문가인 실비아 세라노에 의하면, “조지아정교회에는 유럽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신도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문제는 사카슈빌리 정부가 비판적 목소리를 내게 내버려두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정교회를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불만을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장미혁명’은 명백하게 조지아정교회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경찰, 부패 척결, 조직범죄 해소 등의 분야에서 이룩한 성공적인 개혁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개혁에는 이면도 있다. 교도소 수감자에 대한 가혹 행위 비디오 스캔들이 이를 증명한다. 구타와 모욕에 시달리는 수감자들은 자신이 ‘법적 범죄자’(옛 소련의 유산)인지, 그들을 존중하는지 심문당한다. 사카슈빌리가 집권하면서 이 ‘범죄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탕해야 할 ‘혁명의 적’을 상징했다.

‘위대한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내세우는 자유주의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진행된 9년 동안 수많은 인권침해가 저질러졌다. 한 예로 2008년 초, 인권감시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집권 정치 엘리트와 그 지지자들 사이에 나타난 지배적인 여론”을 주목했다. 이 여론에 따르면 “단기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인권 희생은 장차 인권을 더 잘 보호해줄 더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명한 러시아 저널리스트 마트비 가나폴스키는 “아마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카슈빌리가 조지아의 존재와 그 방어를 위한 대단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2003년 이후 조지아를 그만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나는 우리의 혁명을 ‘장미혁명’이라 부른다.
사카슈빌리가 자유주의와 볼셰비즘을 혼합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주목할 사항이 있다. 정치 시스템은 세월이 흐르면 폐쇄된다. 사카슈빌리 당은 강력한 미디어를 독차지했다. 사법부는 더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정치성을 띠었다. 장미혁명의 자유주의 정신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진정한 토론은 홍보 활동으로 대체됐다. 예전에는 대통령 지지자이기도 했던 반대파는 사업가들의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어려움을 호소했다.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파파바는 “붉은 혁명과 비교했을 때, 나는 우리의 혁명을 장미혁명이라 부른다. 사카슈빌리가 자유주의와 볼셰비즘을 혼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가들에게조차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내게 하며 늘 혁명세를 내도록 했다. 그의 자유주의는 겉모습뿐이다”라고 평가한다. 

 어려운 재정 상황 외에도 사카슈빌리 반대파는 공동 이데올로기 및 공동 전략 부재로 불화를 겪었다. 2011년 10월 초, 모든 것이 변했다. 이바니슈빌리가 기습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것이다. 56살의 이 지도자는 현재 50억 유로로 추정되는 재산을 1990년대 러시아 혼란기에 모았다. 그의 정치 투신은 조지아 정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총리가 됐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칩거해왔던 이 백만장자는 정치 경험이나 주변에 인맥을 형성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그의 재력은 자신의 약점을 덮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10월 1일의 ‘전환점’은 그의 승리라기보다 사카슈빌리의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에게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그래서 선거 뒤 정계의 태도는 신중하다. 신임 총리가 여러 주제에 관해 정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털어놓으며 모순적인 발언을 거듭하고 있는 만큼 더욱 그렇다. 그의 대외정책은 NATO와의 화해 추구와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라는 두 가지 모순적인 당면 과제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마리나 무스켈리슈빌리는 안심하는 편이다. “이바니슈빌리는 이질적인 제휴를 맺었기 때문에 진정한 프로그램을 내세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국민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당면 과제가 고용, 사회복지, 농촌 문제, 정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이바니슈빌리의 정치 입문 때부터 정권은 상황의 위험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이바니슈빌리를 ‘푸틴 프로젝트’로 몰았다. 기가 보케리아 국가안전보장회의의장은 “러시아 대통령이 그에게 사카슈빌리를 물러나게 하라는 언질을 줬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2012년 5월까지 이바니슈빌리의 주력사업은 러시아에 있었고 사업체를 헐값에 러시아에 넘겼다는 사실은 그와 러시아의 사이에 완전한 합의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라고 단언한다. 이 점을 부각시키는 선거 캠페인을 벌였지만 역효과를 가져왔다. 투르마니드제는 “조지아 사람들은 사카슈빌리가 사용했던 반러시아 수사학에 진저리를 친다. 여론조사를 보면 친서구 정책을 지지하고 푸틴에게서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 중 80%가 반러시아 수사학을 추종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고 지적한다.

새 여당이 부패사건 처벌 의사를 밝힌 뒤
3명의 전직 장관이 조지아를 빠져나갔다.

 
청년변호사협회 타마르 슈고슈빌리 회장은 “캠페인은 추잡했다. 정권은 정당자금특별법을 채택했고, 사람들이 체포됐으며, 이바니슈빌리는 조지아 시민권을 박탈당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조지아는 강력한 두 정치세력이 처음으로 대치하는 무대가 됐다. 백만장자의 재력은 무엇보다 3천 대의 카메라를 구입하는 데 이용됐다. 중앙선거위원회의 주라브 카라티슈빌리는 아직까지도 놀라워하며 “조지아의 모든 투표소에서 전 선거 과정이 촬영됐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10월 1일 저녁 폭력 사태 발생을 우려했지만 결국 전체적으로 평온하게 진행됐고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했다. 또 다른 유럽 외교관은 유감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지만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본받을 만했다”고 평가했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바람직한 체제 작동의 보증인이 되겠다고 발표하는 대신 이제 야당의 위치에 서게 됐다고 발표했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조지아가 NATO와 EU의 통합을 원한다는 사실은 사카슈빌리로 하여금 도박을 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일부 사람들이 비난하는 독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이번 선거로 증명됐다. 좋든 싫든 그의 대통령 임기하에 민주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 동안 동거정부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물론 새 여당은 많은 분야에서 이전 정책, 특히 NATO와 EU 가입 관련 정책의 지속을 약속했다. 하지만 새 여당이 몇몇 부패 사건의 처벌 의사를 밝힌 뒤 벌써 3명의 전직 장관이 조지아를 빠져나갔다. 게다가 야권 연합 ‘조지아의 꿈’은 즉각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했다. 다비드 우수파슈빌리 신임 국회의장은 사카슈빌리의 통합국민운동당에 맞춰 입안된 헌법의 결함을 일일이 지적했다. 1991년 조지아 독립 이래 최초로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사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도박이 될 것인가?

 

글•레지 장테 Régis Genté

번역•김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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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크 뮬렌(국제투명성기구 조지아 지부 회장), ‘쌍방 모두 잘못이다’, <조지아저널>, 트빌리시, 2012년 10월 10일.
(2) 과두체제 지도자이자 사카슈빌리 정부의 전 장관, 조지아 ‘자유지상주의’ 발안 사상가 중 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