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가에 약속 이행 의무 부여해야
국제헌법재판소 창설 계획안
이집트와 시리아의 유혈 진압, 미국의 만연해진 불법 사찰, 망명자의 피보호권 침해, 중국의 저항운동 억압…. 스스로 서명한 협약서의 원칙을 아무렇지 않게 위반하는 국가가 더 이상 셀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이 원칙을 지키도록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총칼의 힘이 아닌 법의 힘으로….
‘아랍의 봄’을 통해 얻은 성과 중 가장 놀라우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국제헌법재판소 창설 계획안일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몬세프 마르주키 현 튀니지 대통령이 제헌의회의 국가 기관 구성을 기다리는 동안 무기력한 국제법의 한계 앞에서 겪은 쓰디 쓴 경험에서 탄생한 것이다. 튀니지는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의 독재하에서, 공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한다는 수많은 국제법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효력을 가진 제재 없이 속임수와 테러로 연임을 꾀해왔다.
민주주의가 국제사회에 보편적인 가치로 선포되었음에도, 그걸 집행할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정직성을 자신의 본래 자리인 정치 중심에 돌려놓아, 정치인들이 언행일치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1) 그러기 위해선,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부문의 국가 헌법 조항과 관행을 국제 표준에 비추어 통제할 법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국제법이 국내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다수의 헌법이 명확히 표명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어떤 한 가지와 그 반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음을 분명히 내포한다. 예를 들어 모든 시민이 △직접 또는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일반 평등(2) 조건하에 자국의 공직에 진출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등의 조항을 포함한 국제 협약에 국가 대부분이 동의했다면, 각국의 헌법 또는 입법 기관들은 이를 인정해야 하며, 이에 반대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람이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존중받아야 하며, 어떤 종교도 어느 누구에게든 신념을 강요할 수 없다.
공적자유와 인권보호에 초점
하지만 많은 국가가 자국이 비준하여 체결한 협약의 내용을 잊은 채, 이를 지금까지 마치 주술사의 주문처럼 취급했다. 이것이 냉전 당시 ‘민중의 나라’로 불리던 민주 국가든, 자유보다 종교적 교화를 중시 여기는 국가든, 또 전형적인 독재 국가든 상관없이 모두가 손잡던 협약임에도 말이다. 서방 국가는 이 협약이 서양에서 출발했다는 데에 큰 자부심을 갖지만, 사실상 이를 각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진정한 약속이라기보다는 자국의 덕성을 내보이기 위한 하나의 진열 창처럼만 여기고 있다.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치르는 선거 상황은 결과 조작과 불분명한 선거 자금 등을 통해 점점 악화돼가며, 전 세계 감옥에선 인간 존엄성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상황이 자행되고, 외국인에 대한 대우는 인권에 대한 원칙을 무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모든 결과는 각국이 직접 동의한 협약을 완전히 무시한 채 제정한 각종 헌법·입법·행정적 조치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법이 이런 상황을 멈출 수 없다. 이는 국제연합헌장에서 발생하는 모순, 즉 공동의 가치로 세워진 국제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모순에서 기인한다. 국제연합헌장은 국제법의 발달을 장려하면서, 한편으론 보편적 국제법의 모든 발전을 가로막는 각국의 주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국에 국제법을 적용하려고 해도 면책 원칙에 따른 무처벌 관행이 전 세계에 성행하고, 최종 결정권은 각국이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소극적인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현재로서는 그 어떤 국제 사법기구도 국가의 민주주의적 원칙 적용 여부를 통제할 책임이 없다. 현존하는 국제 사법기구는 그런 목적을 거의 띠고 있지 않고, 다루는 범위도 제한적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분쟁 중인 두 국가가 서로 동의할 때 제소할 수 있는 기구로 권고적 효력만 있을 뿐 구속력은 없다. 국제법의 놀라운 진보로 평가되는 국제형사재판소(ICC)도 국제범죄를 재판하는 목적만 있으며, 주요 강대국 중 협약에 비준하지 않은 국가가 있어 여전히 제한적이다. 유럽인권재판소(ECHR)만이 회원국에 구속력을 가지며 유럽연합 기본권 헌장의 위반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이지만, 그 범위가 유럽 내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리적 한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전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제도적 기구의 자리는 비어 있는 상황이다. 이 공석을 다각도로 채우려는 시도가 바로 튀니지 대통령이 내놓은 국제헌법재판소 창설 계획안이다.
국제헌법재판소의 특징은 민주주의의 구성 요건인 공적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보장하는 개념인 인권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계획안의 핵심은 민주주의 수호에 있다. 각 회원국이 체결한 의무를 성실히 준수하기 위한 기존 국제기구들이 기울이는 노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인권이사회, 자유권 규약위원회를 비롯해 그 외 수많은 지역기구가 실질적인 재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유엔의 수많은 결의안이 민주적 정당성 실현을 위해 각국에 지우는 의무를 상술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동의 권리, 이민자에 대한 권리 등에 대한 유엔 협정 또는 기타 협약에 따른 조항은 전 세계의 헌법적 규범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규범성을 실제로 적용하게 하는 것이 국제헌법재판소의 존재 목적이다.
국제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 및 공적 자유에 대한 원칙과 규범을 ‘자문’과 ‘소송’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통해 적용해나갈 것이다. 자문 기능 측면에서, 재판소는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법적) 자문을 원하는 다양한 기관, 예를 들면 정부를 포함한 국제나 지역 기구, 비정부기구(NGO), 정당, 국가 협회나 직업 단체를 자문해줄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법안이나 법안 계획을 재판소에 제출할 수 있게 된다. 재판소는 제출된 법안이 민주주의와 공공의 자유에 관한 원칙과 규칙에 상응하는 평가해주는 소견서를 제시할 것이다.
소송 기능 측면에서, 개인들(이들을 지원하는 청원이 있는 경우), 국제나 지역 기구의 총회, NGO 단체 등이 재판소에 소청을 제기할 수 있다. NGO 단체는 민주주의 원칙과 민주적 선거 여건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모든 행위(사건이나 법률적 행위)를 재판소에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국가는 재판소 판결을 통해 자신이 제출한 문제에 대한 국제법 준수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국제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총 21명으로 구성되며, 필요에 따라 그 수를 늘릴 수도 있다. 모든 재판관은 각국의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세 단계 과정을 통해 선발된다. 먼저 개별 국가에서 1차 후보를 선정해 명단 목록을 작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목록은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관, 그리고 유엔 국제법위원회의 회원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에 전달된다. 즉 국제법과 국제사법계에 대해 가장 해박한 인물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면 이 특별위원회는 작성된 명단 중 기량이 가장 뛰어나면서도 청렴한 42명의 후보를 선발한다. 마지막으로, 42명의 후보 중 최종 21명을 국제연합총회에서 재판관으로 선출한다.
각국 주권에 대한 위협은 없을 것
분명 국제헌법재판소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가 나와 창설을 막아설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국가 및 국제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유사한 기구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분명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헌법재판소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국제적 범위의 헌법적 규범성 위반을 다루는 법적 제재 기관은 없다고 응수할 수 있다. 아프리카·미주 지역 등 지역 기구가 회원국 자격 정지 및 박탈 등의 정책적 제재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나, 이는 국가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연합의 경우 한발 더 나아가 마스트리히트 조약 제2조와 7조를 통해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할 경우의 제재 내용과 함께, 제3국과 협정을 맺을 시 반드시 민주주의 조항을 포함해야 하며 이를 위반한다면 이론적으로나마 협정을 중지한다고 명시한다. 국제헌법재판소 창설 계획안은 새로운 법적 제재 기관과 이런 기존 기관을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또한 청구 대상은 먼저 국내 기관에서 가능한 모든 제청 방법을 해본 경우에만 자체적으로 제한할 것이다. 기존 기관과의 소송 절차 연결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각국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반대 의견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국민을 극단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꾀어내는 많은 국가에서는, 그들의 권리를 가장 잘 수호하기 위한 힘은 퇴보가 아닌 국제법으로 잘 통제된 진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국제법이 각국의 주권의 범위를 제한한다고 단언하기 이전에, 그 국제법 자체가 이미 각국 주권의 합의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국제헌법재판소 창설 계획안은 국가의 주권을 위협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협의해 맺은 약속만큼은 준수해야 한다.
아프리카연합은 이미 해당 계획안에 대한 지지결의안을 가결했고, 오는 가을에 열릴 유엔 총회에서 이를 발표할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의 진정한 진보에 관심을 가진 전 세계 국민은 모두 커다란 책임을 안게 됐다. 우리가 ‘시민 사회’라 명명한 이 시대와,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발전해가도록 힘을 쓰는 국가 결정 기관 및 정당들로부터 지지를 얻어야 한다. 각국에서도 뻔뻔하게 ‘불성실’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면, 이제 남은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일 뿐이다.
글·모니크 쉬밀리에장드로 Monique Chemillier-Gendreau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1969년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26조에서는 “(약속은 준수하여야 한다) 유효한 모든 조약은 그 당사국을 구속하며 또한 당사국에 의하여 성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113개국이지만, 관습적 규범을 다루고 있으므로 공식 협약 당사국이 아닌 국가에도 규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25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