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계속되는 9월의 산티아고
“우리는 라틴아메리카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믿게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1970년 11월 6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국가안보회의에서 한 말이다.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첫 사회주의 정권이 막 출범한 시점이다. 좌파 정권을 탄생시킨 인민연합의 힘은 약했고, 미국 정부는 칠레 경제를 파탄 낼 준비가 되었다.
수개월간 온갖 책동(제도적 교란, 사장단 파업, 시위, 쿠데타 시도 등)이 이어지다가 급기야 칠레 군대가 개입했다. 그들은 언론과 파시스트 조직 ‘조국과 자유’, 국민당,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에 폭격이 시작됐다. 아옌데는 죽기 몇 시간 전 라디오 연설을 통해 역설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을 멈추지 못한다. 범죄로도 폭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 후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최악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3천 명 이상이 죽고, 약 3만8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고문당했으며, 수십만 명이 칠레를 떠나야 했다. 쿠데타 발발 며칠 후 영화감독 브루노 뮤엘은 카메라를 들고 칠레로 향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우리는 산티아고행 첫 비행기를 탔다. 같은 비행기에는 인민연합 반대파들이 귀국을 자축했다. 비행기가 눈 덮인 안데스산맥을 지나가는 순간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우리는 영어권 방송사 로고가 찍힌 편지지로 멋진 취재허가증을 만들고, 카메라와 마이크에 스티커를 잔뜩 붙였다. 다행히 그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칠레 군인들은 별다른 질문 없이 판지로 급조한 취재증을 내주었다. 수중에 몇 개의 전화번호밖에 없었다. <르몽드> 산티아고특파원 피에르 칼퐁,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젊은 칠레인 변호사, 칠레로 이주한 한 프랑스 여성 정도였다.
길목마다 군인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질서를 ‘되찾은’ 산티아고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일몰부터 새벽까지 우리는 전 세계 기자들이 꾸역꾸역 밀려들던 대형 호텔 안에 갇혀 있었다.
그들이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발언하는 위험을 감수한 것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힘이 그들의 입을 열게 한 것이다. 인터뷰가 아니라 차라리 선언에 가까웠다. 저녁이 되어 호텔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는 낮 동안 보고 들은 것은 함구했다. 말하는 게 불가능했다. 머릿속도 등화관제 중이었다.
한 열흘쯤 지나자 길에서 촬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군인들이 우리를 불러 세우고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 우스꽝스러운 취재증을 살펴보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아침, 한 가정집 조그만 뒷마당에서 기술대학에 다니는 두 학생을 인터뷰한 후 테오에게 말했다. “충분히 찍은 것 같은데. 이제 뜰 때가 된 것 같군.”
출발 전날, 우리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날 쿠데타 세력에게 반대하는 최초의 대중집회를 목격할 줄 몰랐다. 장례식을 30분 앞두고 묘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군인을 가득 태운 두 대의 트럭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군중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군인들이 다시 되돌아와 총을 쏘아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카메라가 너무 많았고, 외교관들도 참석 중이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덤 사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군중의 머리 위로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우리는 산티아고공항에 도착해 검색대를 통과해서 장비 상자와 필름, 녹음테이프등의 짐을 부쳤다. 맨 처음 찍은 필름은 에어프랑스 파일럿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확성기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나를 부른 곳으로 갔다. 칠레 군인 세 명 앞에 내 장비 상자와 짐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모든 걸 단념했다. 군인 중 상관이 취재증이나 허가증은 요구하지도 않은 채 엄숙한 목소리로 칠레에서 무엇을 목격했는지 물었다. 나는 우물거리며 “산티아고가 매우 조용했다”고 대답했다.
<연 표>
1970년 9월 4일: 민중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 36.3% 득표율로 칠레 대선에 당선.
1970년 10월 26일: 정국이 상당히 긴장된 상태에서 의회가 대선 결과 비준. 이런 분위기는 결국 1970년 10월 25일 충직한 장성 르네 슈나이더의 암살로 이어짐.
1970년 11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의 대통령 취임 및 ‘민중 정부의 40개 조치’ 시행.
1971년 7월 15일: 구리 국유화
1971년 12월: 우파가 조직한 대대적인 1차 ‘빈 냄비’ 시위 개최.
1972년 10월: 8월 이후 고조되면서 정부의 단합을 저해하던 불안정화 술책이 국가를 마비시킨 화물운송업자 파업으로 극에 달함.
1972년 11월: 국민의 움직임과 갖은 노력으로 위기 극복.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세계 순방. 이로써 UN 연단에까지 서게 됨. 이 자리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칠레 집권 정부에 대한 공격을 비난하고, 특히 미국 측의 공격을 규탄함.
1973년 3월: 민중연합, 총선에서 43.4% 득표율 확보.
1973년 6월: 미국 처치(Church)위원회 보고서에서 ITT(국제 전화 전신 회사) 및 CIA(미국 중앙정보국)의 칠레 정권 불안 유도 활동을 폭로. 6월 29일 포병 연대가 봉기하여 정부 청사 포위. 이른바 ‘탄카소’(Tancazo·탱크와 중장비를 동원한 공격) 시도. 이들의 쿠데타 기도는 실패했으나 결국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예행 연습이 되었다.
1973년 8월: 기독교 민주주의 측에서 민중연합 정부의 ‘위헌적’ 성격 규탄.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우가르테가 주도한 쿠데타 발생.
글•브루노 뮤엘 Bruno Muel
테오 로비셰, 발레리 메유와 함께 영화 <Septembre Chilien>(칠레의 9월)을 제작했다.(Editons Monparnasse, Iskra, 2006.)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리듬분석> 등이 있다.
(1) 빅토르 리디오 하라 마르티네스(1932~73). 가수이자 작곡가. 공산주의자인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지지했다. 군사 쿠데타 며칠 후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살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