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먼지 터는 대학생들
2013-09-13 카밀라 바예호
칠레의 진보세력은 오랜 기간 살바도르 아옌데 전 대통령을 진보 진영의 우상으로 삼아왔다. 그의 개인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까지 강조되었으며, 사람들은 1973년 9월 11일 쿠데타에서 그가 보여준 영웅적 측면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손에 무기를 들고 싸우다 죽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에 대한 이런 찬사는 대개 공산당과 사민주의 세력 연합인 아옌데 집권 정부 민중연합(UP)의 야심 찬 개혁정책과 공적을 은폐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2011년, 1990년 민주주의가 복권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학생시위가 일어나고, 국내 전역에서 노조 및 생태주의 등 새로운 사회운동이 부상하자 좌파 진영이 들썩이기 시작했다.(1) 이에 따라 심도 있는 구조적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즉, 양질의 무상교육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수단으로까지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조세개혁과 구리 국유화, 특히 독재정권하에서 제헌국회가 소집되어 승인한 1980년 헌법에 포함된 신자유주의 모델의 종식으로 눈을 돌렸다. 거리에는 다시금 아옌데 초상이 내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우상을 추대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그가 구현하던, 그가 여전히 구현하는 정책의 노선을 따랐다.
세 번의 대선 실패 후, 아옌데는 1970년 칠레의 대통령궁 모네다(La Moneda)에 입성한다. 사회주의 운동가인 그는 제국주의 세력과 과두정치에 대비되는 민중 세력을 가장 폭넓게 규합하는 데 힘썼다. 게릴라전으로 분열된 남미 지역에서, 아옌데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 변혁을 추구하기 위한 길을 제안했다. 앞서 그가 속한 정당에서조차 1967년 치얀 당대회에서 무장 투쟁 방식을 선호하며 제도적 방식에 따른 해법을 폐기하기로 결의한 상황이었다.
이는 아옌데만의 차별화된 시각이며 이를 발판으로 그는 야심 찬 개혁정책을 시작한다. 대선에서 승리한 날 저녁, 그는 칠레 대학생연맹 발코니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제국주의의 착취를 완전히 타도하고 독점 행위를 종식시키며, 농지개혁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끔 심도 있는 농지개혁을 하고, 이어 수출입 무역을 통제하며 부채를 국유화하는 임무를 띤 우리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의 발전 정책에 추진력을 부여해줄 수 있는 사회 자본을 형성하면서 칠레의 진보를 위해 지탱해주는 기둥들이 많습니다.”
민중연합 집권기 1천 일 동안은 이례적인 정치개혁이 이뤄진 동시에, 칠레 국민에게는 굉장한 희생을 요구했다. 집권 기간 칠레의 정당과 노조, 기업 연대, 물가 통제 및 수급 위원회는 국내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해외 자본의 시도를 무마하고, 제국주의의 이득을 높이려는 노력에 대응할 수 있는 민중 권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자신들의 힘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민중연합의 실험은 실패했다. 개혁의 시도가 꺾인 것이다. 아옌데는 실패할 정치개혁을 추구하는 이상주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과감한 정치개혁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아옌데라는 인물은 칠레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 사회변혁 계획의 현대성을 나타낸다. 어떤 맥락에서든 지정학적 세력 관계가 두드러진 남미 지역 대부분에서 그가 앞서 남긴 정치개혁의 길을 채택하고 있다. 진보주의 정부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들은 아옌데의 정치 이상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비단 과거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오늘날의 대통령상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