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인들, 태국으로의 힘겨운 망명
주민수가 고작 6 900만 명임에도,(1) 태국은 세계 3위의 어류 및 수산물 수출국이며, 태국의 주요 어항 라농 근해에서는 트롤선이 끊임없이 안다만해를 가로지른다. 이곳에서 잡아들인 생선 수천 톤은 교외 지역에서 포장 작업을 한다. 그 가운데 3분의 2가량은 동아시아와 유럽, 미주 지역으로 수출된다. 역한 비린내가 진동하는 공장에는 높은 담벼락이 쳐져 있다.
공장은 왜 그렇게 높은 담벼락으로 꽁꽁 둘러싸여 있는 걸까? 이 회사의 지도부는 수익 창출의 주된 요인인 버마인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을 꺼린다. 버마인은 이들의 선박이나 작업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그 언젠가 두 나라 사이의 협소한 해협을 건너 태국으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적법한 신분일까, 아니면 불법체류자일까? 임금은 제대로 지급받고 있을까? 근로자로서 권리는 제대로 존중받고 있는 걸까? 아니, 심지어 성인 노동자이기는 한 걸까? 고용주들은 이런 식의 질문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장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서신을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고, 번번이 연락을 회피한다. 입구는 야간 당직자들이 삼엄하게 감시한다. 그러던 중 라농 상공회의소 대표 나로우몬 코라품 기적적으로 나타나 개입해준다. 면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버마 이민 문제가 민감한 사안이고, 계속 제자리걸음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코라품 대표는 어디로 알 수 없는 먼 곳을 응시했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통화가 오고 갔다. 주로 상대편이 오랫동안 듣고 있는 분위기였고, 무언가 투덜거리는 조짐도 있었으나 확실히 코라품 대표의 뜻에 복종하는 것 같았다. “내일 오전 10시, 연체류 공장 하나가 당신들을 맞아줄 거예요. 아니에요, 천만에요. 곤란한 상황이 해결되어 다행이죠.”코라품 대표가 아니었다면, 라농 냉동식품(Ranong Frozen Foods·RFF) 책임자 나샤다 랑시야난트는 굳이 회사를 견학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및 싱가포르 고객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RFF사는 매주 컨테이너 3대를 방콕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5t에 달하는 오징어와 낙지 등이 비린내를 풍기는 창고에 저장되어 있으며, 그것은 미리 손질되어 소비자를 흡족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버마 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 환경
작업 중인 버마 노동자 450여 명 가운데 몇몇을 만나볼 수 없을까? 나샤다는 방문팀을 어느 밀폐된 구역으로 데려갔다. 그는 흰옷과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련된 몸짓에 차갑고 말이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 괴상한 작업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고무줄 처리가 되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만든 작업용 모자를 쓴 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며, 장갑과 장화도 착용했다. 한쪽에선 산더미같이 쌓인 물컹물컹한 생선들을 분류했고, 다른 한쪽에선 화학물질을 넣어 생선을 하얗게 만드는 수조를 휘휘 젓고 있었다. 주어진 조리법에 따라 양념을 가미하는 팀도 있고, 이를 냉동시키는 작업조도 있었다. 2인 1조로 짝을 지어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일하는 팀도 있었다. 여자가 칼로 오징어 머리를 잘라 바구니에 버리면, 남자가 몸통을 가져가 양쪽 껍질을 벗겨내고, 매끌매끌한 살 부분을 또 다른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중간의 점심시간을 포함해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이 이어진다. 작업은 매우 고될뿐더러 일당 200~250바트로 급여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2) RFF 노동자 가운데 태국인은 한 명도 없다.
이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1990년대 태국 경제가 급격히 발전한 이후, 3D 업종에 종사하는 이는 대부분 외국인이다. 캄보디아인과 라오스인도 수만 명에 이르지만, 특히 버마인 수가 200만 명 이상이다. 다양한 자원과 꾸준한 성장을 기반으로,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역동성에 주축이 되고 있는 선진 공업국가 태국은 이웃 국가 버마에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버마는 군사 독재정권과 자급자족 경제에서 벗어난 지 가까스로 50년이 되는 나라이다. 버마 처지에서 태국은 일할거리가 넘쳐나는 나라다. 고용주가 아무 거리낌없이 외국인들을 ‘차별’해주는 만큼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거리는 더욱 넘쳐난다.
RFF사는 라농에서 근무 환경이 최악인 곳이 아니다. 매일 새벽, 이 도시에서 규모가 제일 큰 업체인 시암차이 국제식품회사(Siamchai International Food Company·Sifco)의 트럭들은 수많은 노동자를 공장으로 싣고 온다. 트럭별로 젊은 일꾼 70여 명을 싣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가축 수레에 동물이 실리듯 선 채로 차를 타고 온다. 이를 지켜보던 한 구경꾼은 “승차 요금 없이 30분 정도 그렇게 타고 오는데,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일꾼들은 이미 작업 유니폼을 입은 상태로 간이 배식까지 받은 상태였다. 공장에 도착하면 터치 화면에 엄지를 찍은 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는 ‘안전우선’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아웅 티 우의 생활도 이와 같다. 주6일 근무하는 그녀는 통근 트럭이 지나가는 길에 새벽 5시 30분부터 나가 차를 기다린다. 실제 일은 오전 7시부터 시작이다. 이후 오전 11~12 점심 식사를 한 뒤, 다시 오후 5시까지 일을 한다. 그날 추가 근무는 당일 통보한다. 오후 5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추가 근무는 밤 10시나 11시가 되어서야 끝난다. 간혹 자정까지 일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집안 일이 되겠는가?”
불결한 판잣집과 오두막집 신세
골든 시푸드 인터내셔널사 같은 경우 9시간 근무하는 하루 일당이 155바트밖에 되지 않는다. 근무시간만 상계한 금액이다. 8개월 전부터 이곳에서 일해온 스무 살의 예 흐테트 네웅는 끓는 물에 새우를 한 움큼 집어넣고 소금을 친 뒤, 새우가 다 익으면 끄집어내는 일을 반복한다. 살아 있는 생물을 먹는 음식으로 바꾸는 일은 불교 신자인 그녀의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살생을 한다. 굉장히 고된 업보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한탄한다.
트마트 친 모에 같은 경우, 한 달 급여 4500바트를 받고 매일 12시간씩 얼음 제조 공장에서 힘겹게 일한다. 그는 “죽을 만큼 춥고, 장갑도 방한복도 따로 안 준다”고 말한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어떤 이는 자기 돈을 들여 회사 유니폼을 사야 했고, 또 어떤 이는 작업장에 마실 물이 없다며 불평을 토로했다. 병가 급여도 따로 없고, 휴가도 따로 없다. 급여 수준이 상당히 낮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추가 근무도 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다. 어업이라는 특성상 변동사항이 많아 그에 맞추느라 부득이하게 예기치 못한 추가 근무가 생긴다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이 때문에 일일 근무시간은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늘어난다.
직장을 벗어난다고 해서 삶이 그렇게 즐거운 것도 아니다. 태국인은 도시의 고지대에서 사는 반면, 버마인은 부두 근처 저지대에 붙박이로 살아간다. 비린내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이들만의 게토(격리구역)에선 가장 불결한 매춘이 성행하고 서민들의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이어진다. 이곳 주민들은 허름한 판잣집과 지저분한 오두막집을 짓고 살며, 빈랑과 구장, 석회 따위를 좌판에 늘어놓는다. 평소 이들이 씹어 먹는 경미한 마약 때문에 사람들 입술이 붉게 물들고 도로 위가 지저분하게 얼룩진다.
여성들은 타나카 파우더를 마음껏 바르지 못한다. 화장품으로 쓰이거나 자외선차단제 기능을 하는 노란색 파우더인데, 동남아시아 여성 가운데 버마 여성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버마 인권교육연구소의 동성애자 비공식조직 대표 나이 라인 흐티케는 “이 파우더를 바르지 않아야만 그나마 눈에 덜 띨 수 있고, 태국 사람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태국 남부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이들은 양국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역사를 아직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다. 양측 왕들이 대치하던 오래전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학교에서도 반복적으로 이를 가르치고, 영화 산업에서도 이를 써먹는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으로 꽉 찬 대규모 흥행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다.” 16~18세기 양국 간에 끊이지 않던 전쟁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원한을 심어주었고, 버마 사람들과의 동거는 이런 원한을 종종 인종차별적 가혹 행위로 발전시킨다.
극도로 불안한 삶에도 버마 노동자들은 태국에서 사는 게 고향에서 지내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라농에서 이들은 비록 급여도 적게 받고 멸시와 원한의 눈초리 속에서 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몸을 피할 집은 있다. 박대는 받을지언정 약간의 희망이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네피도 정부는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걸 금지하지 않는다. 버마는 북한이 아니다. 하지만 주민의 이주는 오랫동안 불법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 북부에서는 야당 인사나 유격전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을 위한 불법 밀입국 경로가 마련되어 있다.
이 난민들은 난민 지위도 상실한 채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방콕은 유럽연합의 1951년 난민협약을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부 쪽 불법 경로에서는 주로 밀수입과 밀거래가 이뤄진다.(3) 태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사람들은 일단 버마 카우타웅의 밀입국 브로커를 찾아가야 한다. 라농시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 자매 도시의 브로커들은 막대한 보수를 받은 세관의 협조를 얻거나, 아니면 이들 모르게 사람들을 태국으로 밀입국시킨다. 비용은 밀입국자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높은 만큼 더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야밤에 바다를 건너다 익사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일단 라농에 도착하더라도, 경찰에게 발각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만일 경찰에 잡히면, 제대로 된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현금을 쥐어주고라도 상황을 모면하지 못하면 다시 버마로 송환된다.
노동허가증이 이민자들의 착취를 제도화
세월이 몇 년 흐르면서 상황이 꽤 정상화가 되었다. 모터보트 운전자 차우는 “이제 국경을 넘으려면 라농에서의 일주일 체류를 허가하는 임시 비자를 태국 이민국에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 후로는 정식으로 노동허가증을 취득한 사람들과 한데 섞여 지내야 한다. 그렇다고 경찰이 신분증을 검사하지 않을 리 없다. 약삭빨라 보이는 스무 살 파이파이는 “경찰은 사람들의 눈을 살펴본다. 이런 면에 있어선 도가 튼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버마인 거주 구역에서 자란 파이파이는 태국에서 살아남는 수법을 다 꿰고 있는 듯했다. “어제 친구 중 하나가 노동허가증 없이 돌아다녔다. 사소한 실수였다. 결국 경찰의 검문에 걸려 체포됐다. 그 친구가 태국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한테 전화를 했다. 경찰이 요구한 돈은 3천 바트였다. 나는 협상해서 1천 바트로 낮추었다. 이들은 어떤 건물 뒤에 세워둔 자기들 차에서 만나자고 했다.” 왜 굳이 차 안에서 만날까? “자신들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사진에 찍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 경찰서에서 보면 되지 않은가? “다른 동료와 돈을 나눠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라농시에는 이렇듯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만한 사회 인력이 부족하고, 해외 비정부기구는 더욱 없는 실정이다. 예리한 눈매에 명확한 언변을 구사하는 존 신부는 호주 가톨릭대학 연계 교육기관의 현지 코디 업무 담당자로서 뉴질랜드에서 와서 6년째 태국에서 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나마 “버마 사람들의 상황이 해가 갈수록 개선됐다”고 한다. 불법이민자 신분으로 거의 노예에 가까운 근로 조건 속에서 고기잡이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래도 이제는 가족과 함께 지내며 취업 이민을 했기태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서서히 토착세력이 되어가면서 이들은 누가 봐도 명백한 학대 행위로부터 차츰 보호받을 수 있게 됐고, 최소한의 권리도 인정받게 됐다. 2005년 8월 이후로는 태국 법에서 이민자 자녀들의 취학 문제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 취학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존 신부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상적인 건 아이들이 자기 고유의 문화를 지키면서 태국의 공립학교에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버마 사람들 사이에서 교육은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따라서 11~12살이 된 아이들은 일터에서 떨어뜨려 놓으려 애쓰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태국으로 온 버마 이민자들의 건강 문제도 있다. 결핵 및 에이즈 전문의 미에 미에 한에 따르면, “버마 노동자들은 자기 몸을 돌볼 여유가 없다. 공장에 들어가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 만큼 건강을 미리 챙기기란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굉장한 진전이 이뤄진 건 사실이다. (1유로도 안 되는) 진료비 30바트로 진찰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반대파 측에선 태국 의료보건제도에서 이 비용을 부담하는 데 비판이 일고 있다. 가령 라농시의 경우, 버마인 수가 너무 많아 이들이 도시 주민 40만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일, 태국의 잉락 친나왓 정부는 역사적인 조치를 시행했다. 국내 근로자든 해외 근로자든 최저 임금 수준을 일당 300바트(7.50유로)로 올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40% 선의 임금 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라농시 버마인에 관한 2010년 연구’(4)의 공저자 일본인 학자 미와 야마다는 “태국의 노동허가증이 이민자들의 착취를 제도화한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 이는 노동허가증이 아니라 고용허가증이다. 따라서 취업의 열쇠는 고용주 측에서 쥐고 있는 셈이다.” 연초 이후로는 사주 측에서도 임금 인상을 하지 않기 위한 묘수를 짜냈다. 일일 식대를 없애고 2주 200바트로 책정되어 있던 보너스도 한 달 300바트로 줄인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임금에서 식비와 서류비도 공제했다.
“모두가 평등하나, 어떤 이들은 더 평등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새벽 4시 항구에서 20여 명의 장정이 도르래로 트롤선에서 물건을 내린다. 태국인 선주를 빼면 모두 버마 사람들이다. 수많은 통에서 크기도 형태도 다양한 각종 생선이 방파제 위로 한없이 쏟아지고, 버마인 장정 수백 명은 놀라운 속도로 생선을 분류한다. 느긋하게 여유를 갖는 건 거만하게 손에 주문 장부를 든 회계원뿐이다. 이들은 분명 태국인이었을 것이다. 이들 말고 누가 분홍색 장화를 신을 수 있겠는가?
글·그자비에 몽테아르 Xavier Monthéard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2012 어업 및 양식업 세계 현황’, 유엔식량기구, 로마, 2012.
(2) 1유로=40바트.
(3) 막심 부트리와 자크 이바노프, ‘국경에서의 검은 돈: 태국 남부에서의 버마인 이주와 조직망 구조 및 국경의 국제화’(La Monnaie des frontiers. Migrations birmanes dans le sud de la Thaïlande, structure des réseaux et internationalisation des frontières), 현대 동남아시아 연구소, 방콕, 2009.
(4) 코이치 후지타, 타마키 엔도, 이쿠코 오카모토, 요시히로 나카니시, 미와 야마다, ‘Myanmar migrant laborers in Ranong, Thailand’,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 일본 치바현, 2010.